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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전선] 98년 12월

 

노동자 정치운동의 현단계 과제


8∼90년대 민주노조운동과 현장조직운동, 그리고 정치적 노동운동의 종합으로 노동자 정치운동을 바라본다면 우리 노동자 정치운동이 직면한 현단계 과제들을 보다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은 투쟁의 발전, 이념의 정립, 대중적 단결의 확대라는 세 측면 모두에서 '정치'를 요구받고 있다. 투쟁은 총파업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총파업이냐라는 그 투쟁의 정치적 내용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현실적(?) 양보냐, 원칙적(?)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느냐? 겉으로 보기에 이 문제는 현실론과 원칙론의 대립이라는 식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미리 양보해서 더 큰 양보를 막아보자는 현실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타협적이었던 자본의 일관된 원칙론에 밀려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어버렸다. "가장 원칙적일 때 가장 현실적"이라는 교훈을 이번에 우리는 자본한테서 뼈저리게 배운 셈이다. 따라서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현실론과 원칙론의 대립 따위가 아니라 자본의 원칙과 우리의 원칙이 현실의 힘관계 속에서 어떻게 부딪히는가 이다. 투쟁의 정치적 내용은 바로 우리의 원칙을 현실의 이름으로 자본의 원칙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갈라지며 이 점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을 위치지을 수 있을 것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의 연장에 서 있는 사회적 조합주의나 공황기 케인즈주의적 노동운동론(?) 들은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그러나 이때의 경제란 '노동자·민중의 경제'가 아니라 '자본 중심의 경제'이다―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을 바람직하거나 객관적으로 불가피한 것으로 보면서 그 개편을 지지하거나 묵인하는 가운데 그 피해를 사후적으로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길"이고 계급적·정치적 노동운동론은 "정권과 자본의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모든 수준, 모든 측면에서 저항하면서 위기를 만들어낸 근본원인을 해결하고 사회구조의 발본적인 개편을 위해 노력하는 길"(주1)이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이 정립해야 할 이념은 이 둘중 하나다. 대중적 단결의 확대·발전 또한 이제 정치적 단결의 확대·발전 없이는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른바 퇴조기 상황에서 선진층의 투쟁이 중후진층의 이탈과 후퇴를 늦추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선진노동자들의 정치적 단결과 투쟁 없이는 대중적 단결의 유지조차 힘겨운 현실이다.

현장조직운동은 그 앞선 부분에서 내부의 정치적 분화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 여전히 한지붕 몇가족인 곳도 있지만 대동단결을 주장하면서 정치적 분화를 회피하거나 결사반대하는 분위기는 이미 매우 약해져 있다. 이런 점에서 따져본다면 현장조직운동 수준에서 대중조직운동에 개입하는 과정 과정마다 서로 대립하는 현장조직들더러 정치조직운동 수준에서 한 지붕 아래 단결하라는 소리는 억지가 되어버린다. 국민승리21처럼 노동조합운동의 연장에서 정치운동을 추진하려고 하는 경우에 가장 크게 걸리는 문제가 바로 이 점이다. 현장조직운동은 이제 자신의 과도성을 마감하고 정치적 노동운동과 결합한 정치조직운동 속에서 미래를 개척해가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정치적 노동운동 또한 노동자 정치운동을 본격화하는 속에서 자신의 과도성을 마감하는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노동자 정치운동을 포방하는 정치조직은 내년 상반기 안에 아무리 적어도 4개 이상은 출현할 것 같다. 노동자 정치조직은 단 한개여야 한다는 주장처럼 터무니 없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치운동과 노동운동의 어정쩡한 중간지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노동자 정치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일부로서 정치적으로 결사한 주체들에 의해 전체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고양되어 스스로 권력으로까지 조직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단계는 바로 그 첫 출발점이다. 이 출발은 8∼90년대 세축으로 발전해온 노동운동의 성과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묵인하면서 차선을 추구하는 태도와 분명히 선을 긋고 노동자계급을 우리 사회발전의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이제 경향적으로만 서로와 자신을 확인하던 과거를 마감하고 새로운 정치조직으로 단결해야 한다. 노동운동은 이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와 바로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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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김세균, [노동운동의 탈계급화·탈정치화를 위한 최근의 시도들에 대한 비판-한겨레21의 논조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현장에서 미래를> 198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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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0:19 2005/02/1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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