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의혹은 점점 커져만 갔다. 사법부 자체 조사 보고서에도 법원행정처가 어떤 판사와 어떤 모임의 동향을 살폈고, 행정부 눈치를 보거나 부적절한 판단이 있었다는 내용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결국 이 많은 의혹을 뒷받침하는 증거와 진술들이 2019년 1월 24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시켰다. 사법신뢰는 그 사이 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사법신뢰의 회복은 사법농단 사태에서 출발해야 한다. <오마이뉴스>는 이를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결정적 장면 6가지를 꼽았다.
[장면 ①] 사표 한 장이 불러일으킨 태풍
▲ 2017년 사표를 제출하며 "판사 뒷조사 의혹"을 공론화한 이탄희 판사. 사진은 지난 12월 22일 참여연대 의인상 수상 소식을 보도한 MBC 뉴스 화면 | |
ⓒ MBC 뉴스 화면 갈무리 |
2017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기획2심의관으로 막 파견된 이탄희 판사가 급작스레 사표를 냈다. 법원행정처는 그를 발령 11일 만에 원래 근무지,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으로 복귀시켰다. '출세의 길'로 알려진 자리를 버린 이 판사도, 곧바로 그를 돌려보낸 법원행정처도 이례적이었다.
그해 3월 초, 이 판사가 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판사 뒷조사 파일' 작성 지시에 반발해 사표를 냈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고영한 법원행정처장은 "개인 사정에 따른 조치"라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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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자 양승태 대법원장은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를 구성해 조사를 지시했다. 한 달 뒤, 이인복 위원장은 "보복성 인사조치는 없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공개된 진상조사보고서에 나오는 이탄희 판사의 진술은 상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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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②] 3차 조사 끝에 드러난 것
▲ 대법정에 뛰어든 해고노동자의 절규 지난해 5월 29일, 철도노조 KTX 열차승무원지부 김승하 지부장이 법원 진상조사 결과 드러난 재판개입 의혹과 관련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들어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수사와 김명수 대법원장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 |
ⓒ 이희훈 |
결국 김명수 대법원장이 새로 취임하고 나서야 2차 조사가 시작됐다. 2017년 11월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판사 인사개입 문건뿐 아니라 양승태 대법원이 숙원사업이던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재판 거래를 시도한 정황들을 밝혀냈다. 그러나 관련자들이 컴퓨터 조사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3차 조사단(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꾸려졌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양승태 대법원이 원 전 원장 사건만이 아니라 KTX 승무원 해고 사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시국선언 사건 등 박근혜 정부의 관심 사건 재판 결과를 상고법원과 맞바꾸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 대법원이 처음 공개한 내부 문건 410개 중 174개만 보더라도 청와대와 관계를 두고 "국정 운영의 동반자·파트너", "윈윈" 같은 표현이 서슴없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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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조사의 한계는 명확했다. 특별조사단은 2018년 4월 24일과 5월 24일 두 차례나 양 전 대법원장을 직접 조사하려 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이들이 내놓은 결론조차 '문제는 있지만 범죄가 아니다'였다. 곳곳에서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장면 ③] 양승태의 자신감 "검찰에서 수사한답니까?"
▲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6월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신의 자택 인근에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
ⓒ 이희훈 |
마침내 양 전 대법원장이 침묵을 깼다. 지난해 6월 1일 그는 경기도 성남시 자택 인근 놀이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허리춤에 두 손을 얹은 채, 양 전 대법원장은 모든 의혹을 부인했다.
"대법원장으로서 재직하면서 대법원 재판이나 하급심 재판에 부당하게 간섭 관여한 바가 결단코 없다. 대법원 재판은 정말 순수하고 신성한 것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법원 정책에 반대한 사람이나, 또는 어떤 일반적인 재판이나 특정한 성향을 나타낸 사람이나, 그런 법관에게 불이익을 준 적이 전혀 없다."
그는 검찰 수사에 응할 것이냐는 질문에도 "검찰에서 수사한답니까? 그때 가서 보겠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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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④] 쪼개지는 법원, 김명수의 약속
▲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해 6월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국민과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에 참석하고 있다. | |
ⓒ 이희훈 |
양 전 대법원장의 해명에도 법원 안팎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비교적 젊은 판사들인 단독·배석·중앙 부장판사들은 "성역 없는 철저한 수사를 통한 진상규명을 촉구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윗선은 달랐다.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들과 전국 법원장들은 "대법원장 등이 형사 고발, 수사 의뢰, 수사 촉구 등을 할 경우 법관과 재판의 독립이 침해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라며 나아가 "(사법농단 의혹에)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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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5일, 김명수 대법원장이 결단을 내렸다. 그는 "최종 판단을 담당하는 기관의 책임자로서 섣불리 고발이나 수사 의뢰와 같은 조처를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필요한 협조를 마다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했다. 이후 검찰은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을 구성, 수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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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⑤] 기각에 또 기각... 하지만 조금씩 열리는 빗장
▲ 구속 심판대 오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사건 "키맨"으로 불리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해 10월 26일 오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에 대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하고 있다. | |
ⓒ 권우성 |
하지만 법원은 쉽게 수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현직 판사들, 법원행정처 국제심의관실 등을 대상으로 한 압수수색영장 청구는 번번이 기각됐다. 법원행정처의 관련 자료 임의제출도 원활하지 않았다. 검찰 수사팀 내부에선 "압수수색영장은 수사의 기본인데, 뭘 줘야 들여다볼 게 아니냐"는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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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착수 약 3개월 만에야 빗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2018년 10월 27일 임민성 서울중앙지방법원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범죄사실 중 상당한 부분에 대해 소명이 있다"라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상급자인 양 전 대법원장과 하급자인 심의관들 사이에서 '실무'를 담당한 임 전 차장은 처음으로 구속된 사법농단 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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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검찰 수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등 윗선을 향해 나아갔다.
[장면 ⑥] 모든 것이 '헌정사 최초'가 된 그
▲ 영장실질심사 마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농단’ 최종 책임자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 |
ⓒ 유성호 |
2019년 1월 11일 마침내 양 전 대법원장이 '피의자'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는 전날 미리 서울중앙지검 현관에 만들어진 포토라인이 아니라 대법원 앞에서 소회를 밝히길 고집했다.
당시 여러 판사는 "설마 가시겠나, 주위 의견 아니냐"며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으나 양 전 대법원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규탄하는 시위대 소리에도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법원에서 전 인생을 근무한 사람으로서 법원을 한번 들렀다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사건 관련 법관들도 법과 양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에게 과오가 있다고 밝혀진다면 그것도 제 책임이고, 안고 가겠다."
☞ 대법원은 양승태의 추억거리로, 모든 비판은 선입견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는 영장실질심사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말을 바꿨다. 검찰이 확보한 결정적 증거에도 조작 가능성을 언급하며 후배 법관이 "의혹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을 모함하는 것 같다"라는 취지로 반박했다. 결국 명재권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사안이 중대하고,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그를 구속했다.
☞ 2019년 1월 24일 전 대법원장이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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