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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살아 있는 '5.16 악법', 박근혜는 폐기할까?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과 관련해 16명 사건 재심 진행 중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5-16 오전 9:24:40

 

 19세 다방 여종업원 신OO 씨는 1961년 4월 2일 대구시 전동 교원노조 사무실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 이 집회에 모인 100여 명은 오후 4시 무렵 대구역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들은 "2대 악법은 살인법이다. 죽음으로 막아내자", "장(면) 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찰이 제지했지만 이들은 가두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대구 데모 사건'으로 알려진 '2대 악법 반대 투쟁'이다. 당시 장면 정부가 추진한 반공임시특별법(현 국가보안법과 유사)과 데모규제법(현 집시법과 유사)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번지던 차였다.

시위는 저녁 무렵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반공이란 미명 아래 다시는 안 속는다'는 내용이 적힌 펼침막을 펴들고 "악질 경찰 물러가라", "마산 사건(김주열 열사 사망 사건)을 아느냐", "너희들(정권)도 자동 케이스 15년감이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신 씨는 이들에 섞여 잠시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경찰에 체포된 신 씨는 4월 16일 기소를 당한다. 당시 공소장에는 집회의 즉시 해산을 요구하는 경찰국 경비과장을 향해 "저 새끼 잡아 죽인다"고 소리를 지른 '죄'로 적혀 있다.

단순 시위 사건이지만, 5.16쿠데타 후 신 씨에 대한 공소장이 변경된다. 신 씨에게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이 적용됐다. 두 달 반 후 만들어진 법에 의해 처벌을 당한 것이다. 19세 다방 종업원은 졸지에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선고받는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 신 씨는 재심을 청구할 수 있게 됐지만, 청구하지 않고 있다. 그는 '악법'에 의해 현재까지도 '유죄' 상태다. 1961년 5월 16일이 개인의 운명을 바꿔버린 이러한 사례는 당시 다반사로 일어났다.

▲ 박정희의 5.16쿠데타는 무법적인 상황을 연출했고, 숱한 피해자를 낳았다. ⓒ연합뉴스

52년 전 '5.16악법', 아직도 폐기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2년 전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육군본부를 점령했다. 같은 시각 해병대 병력이 남산 중앙방송국(KBS)을 덮쳤다. 당시 박종세 아나운서는 군인들이 들이민 '군사혁명위원회' 명의의 혁명선언문을 받아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해병대 중사 하나가 소리쳤다.

"아니 이 친구, 지금 상황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혁명이 일어났다고 했잖아. 읽으라면 읽어!"

박근혜 대통령이 "구국의 혁명"이라고 표현했던 5.16쿠데타의 한 장면이다. 당시 서울장충초등학교 4학년이던 만 9세 박근혜 대통령이 전날 숙제를 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을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쿠데타 후 계엄령을 발동한 박정희 세력은 다음 날인 5월 17일, 군사혁명위원회 명의로 전국 지구 육군방첩대 '위험인물 예비 검속 계획'이라는 문건을 발송한다. 이 문건의 '세부 계획'에는 "예비 검속 대상자의 소재를 파악(한) 후 경찰과 합동 수사하여 체포한다"고 돼 있다. 5월 26일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한다.

1961년 6월 3일 자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공문 '예비 검속자 처리에 대한 건의'에 따르면 쿠데타 이후 18일 동안 군·검·경은 무려 2769명을 체포·검속했고, 이 중 692명을 "장차 반공특별법이 공포되면 동법을 적용해 의법 처단할 대상"으로 분류했다. 앞으로 만들어질 법에 저촉되니, 가둬놓고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쿠데타에는 법도, 상식도, 절차도, 아무것도 없었다. 무법 상태의 공포 통치, 그 서막을 알린 셈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 유족들을 중심으로 1960년 4월혁명 이후 생겨나고 있던 전국의 '피해자 유족회'들은, '앞으로 반국가 행위를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로 몰려 졸지에 '반혁명 세력'으로 체포됐고, 많은 사람들이 실형을 받았다. 재심 청구 사건 중 유족회 사건이 유독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5.16쿠데타로 만들어진 국가재건최고회의(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해 7월 3일 의장에 오른다)는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만들고, 이에 근거해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 설치법과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을 각각 6월 21일, 6월 22일 만들었다. 문제의 특별법은 1957년 12월 21일부터 소급해 시행된다. 무려 3년 6개월 전의 행적까지 소급 적용하도록 한 이 법은 5.16쿠데타의 무법성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4월혁명 이후 점차 목소리를 높여 가던 혁신계 정당 및 시민단체는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당시 쿠데타 세력이 '쿠데타에 반대할지도 모르는' 신 씨 같은 사람들을 영장 없이 체포·구금하고 감옥에 보내기 위해 만든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은 아직까지도 폐기되지 않은 채 법전 속에 존재하고 있다. 특별법이기 때문에 효력을 상실한 지 오래지만, 완전히 폐기하기 위해서는 국회가 폐지법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5.16 악법' 관련 16명 사건 재심 진행 중

"제6조 (특수반국가행위) 정당(과) 사회 단체의 주요 간부의 지위에 있는 자로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고무, 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쿠데타 세력이 제대로 된 입법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만든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안에서 가장 문제가 된 조항이다. 이 조항을 이용해 쿠데타 세력은 사실상 첫 희생양으로 언론을 택했다. 정론직필의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 유명한 민족일보 사건이다.

쿠데타 세력은 민족일보 관계자들을 영장도 없이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구금했다. 7월 23일 검찰은 조용수 사장을 비롯해 민족일보 관계자들을 기소한다. 한 달여 만에 1심 판결이 났고, 석 달여 만에 확정 판결이 났다. 혁명재판부는 당시 조 사장을 비롯해 송지영·안신규에게 사형을 선고했고(조용수 사장을 제외한 두 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다른 한 명에게 징역 15년, 두 명에게 징역 10년, 또 다른 두 명에게 징역 5년 형을 선고했다.

최근 민족일보 사건 관련 재심 6건에서 법원은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 사건 마지막 무죄 판결은 지난달 29일 있었다. 법원은 민족일보 설립 등에 관여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송지영 씨 재심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죽어서도 5.16과 싸웠던 그는 52년 만에야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4.9통일평화재단과 서울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가 함께 펴낸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제6조 위반 사건 재심 판결문 모음집을 토대로 <프레시안>이 분석한 것에 따르면, 5.16쿠데타 이후 이 법에 의해 재판을 받은 인사는 49개 사건, 총 206명이다.

이 중 당시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33명을 제외하면 173명이 면소에서 사형까지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이 중 82명의 유가족들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결정을 토대로 재심을 청구했고, 66명이 무죄 혹은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았다. 16명의 재심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도 52년 전의 과거와 싸우고 있다는 말이다.

나머지 91명은 대부분 실형을 받았지만, 재심을 청구하지 않았다. 신OO 씨도 마찬가지다. 쿠데타 세력이 찍은 '요주의 인물', 이들은 혹은 이들의 유가족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들에게 5.16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박근혜의 '5.16 사과', 그의 진정성은 믿을 만한가?

박근혜 대통령은 5.16쿠데타와 유신 독재에 대해 "구국의 혁명으로 최선의 선택이었다"며 "역사 평가에 맡기자"는 견해를 고수하다가 지난해 대선을 거치면서 태도를 바꿨다.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지난해 9월 24일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두 달 전에 5.16쿠데타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했고, 약 보름 전에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개의 판결" 발언을 해 후보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던 때였다.

깔끔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 박 대통령은 '유신 피해자 명예 회복 및 보상법'을 공동 발의했다. '배상'이 아니라 '보상'이었다. 그것도 유신 피해자에 한정한 것이었다. 이 법안은 국회에서 아직 논의도 되지 않고 있다. 정수장학회 문제도 그렇다. 5.16쿠데타로 인해 정권을 잡은 당시 집권 세력의 '장물'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박 대통령의 또 다른 측근으로 교체됐을 뿐이다.

5.16에 대해 박 대통령이 사과 대상을 "(5.16 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들과 그 가족"으로 한정한 부분에 대해 박 대통령이 언급한 "(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과 모순되는 말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최선의 선택이지만 정치 발전을 지연시켰고 피해자를 낳았다는 논리 구조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청문회를 거친 장관들 상당수가 5.16에 대한 답변을 회피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음은 5.16쿠데타로 직접적인 피해를 본 '특별법 피해자' 관련 재심 판결 결과다. 재심을 통해 50여 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이들도 있고, 아직 재심 절차가 진행 중인 이들도 있다.

특별법 제6조 특수반국가행위 위반 사건 재심 현황

-민족일보 사건. 재심 무죄 판결 6명.
-국제신보주필및상임논설위원사건. 재심 무죄 판결 1명.
-대구데모사건. 재심 무죄 판결 2명, 재심 진행사건 3명.
-조국통일민족전선사건. 재심 무죄 판결 1명, 재심 진행 사건 1명.
-범혁신동지회사건. 재심 무죄 판결 2명.
-한국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사건. 재심 진행 사건 2명.
-경상북도민족통일연맹사건. 재심 무죄 판결 5명.
-혁신당사건. 재심 무죄 판결 2명.
-중앙사회당사건. 재심 무죄 판결 4명.
-경상북도사회당사건(1차). 재심 무죄 판결 3명.
-경상북도사회당사건(2차). 재심 진행 사건 1명.
-경상남도사회당사건. 재심 무죄 판결 1명.
-중앙사회대중당사건(1차). 재심 무죄 판결 3명, 재심 진행 사건 1명.
-이리시사회대중당사건. 재심 진행 사건 1명.
-중앙통일사회당사건. 재심 무죄 판결 7명.
-경상남도통일사회당사건. 재심 진행 사건 2명.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사건. 재심 무죄 판결 5명.
-경상남도반민주악법반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사건. 재심 무죄 판결 1명.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사건. 재심 무죄 판결 1명.
-대구지구중고등학교교원노동조합사건. 재심 무죄 판결 1명.
-전라남도통일민주청년동맹사건. 재심 진행 사건 1명.
-경상북도민주민족청년동맹사건. 재심 무죄 판결 2명.
-경상남도민주민족청년동맹사건. 재심 무죄 판결 1명.
-부산민주민족청년동맹사건. 재심 진행 사건 1명.
-중앙민족자주통일협의회사건. 재심 무죄 판결 4명.
-충청남도민족자주통일협의회사건. 재심 진행 사건 1명.
-전라북도민족자주통일협의회사건(2차). 재심 무죄 판결 1명.
-전라남도민족자주통일협이회사건. 재심 무죄 판결 1명.
-경상남북도피학살자유족회사건. 재심 무죄 판결 6명.
-경주피학살자유족회사건. 재심 무죄 판결 3명.
-밀양피학살자장의위원회사건. 재심 무죄 판결 1명.
-금창피학살자합동장의위원회사건. 재심 무죄 판결 1명.
-동래피학살자합동장이위원회사건. 재심 진행 사건 2명.
-이낙호사건. 재심 무죄 판결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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