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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북한에 대한 '완승' 전략으로는 역사 못만든다

윌슨의 '승리 없는 평화'와 트럼프의 '빅 딜'

 

 

 

세계외교사에 이름을 남긴 외교의 거장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외교 전략과 전술에 능해 국가의 이익을 적극 실현한 인물들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9세기 유럽질서의 토대를 마련한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19세기 후반 현란한 비밀동맹외교로 프로이센의 안보를 확보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 1970년대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 내면서 미국의 국익을 최대화하려 했던 헨리 키신저 등이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외교이념과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 인물들이다. 집단안보체제라는 새로운 개념을 바탕으로 국제연맹을 창설한 우드로 윌슨, 유엔의 역할을 단순한 '평화 관리'가 아니라 '평화 창출'로 설정하고 세계를 누빈 제2대 유엔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윌슨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들고 나온 '14개 조항'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특히 '14개 조항'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는 우리의 3.1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윌슨은 1차 대전 참전여부를 고민하던 1917년 1월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제목은 '승리 없는 평화'(Peace without Victory). 연합국이 전쟁에 이기더라도 패전국을 완전히 굴복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완승은 장기적 평화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 논거였다. 참전하면 승리해야 하고, 나아가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데, 그 방안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찾아낸 답의 일단이었다.  

비슷한 사고는 윌슨과는 결이 다른 외교 거장 비스마르크에서도 발견된다. 독일통일을 위해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이긴 다음, 프로이센은 1866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했다. 뛰어난 군사전략가 헬무트 폰 몰트케 덕분에 한 달 만에 승세를 굳혔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진격해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군부 지도자들은 그러자고 했다. 왕 빌헬름 1세도 동조했다.  

하지만 재상 비스마르크의 생각은 달랐다. 오스트리아를 완전 굴복시키면 원한을 남기게 되고, 다음 전쟁 상대인 프랑스를 칠 때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군의 후미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군부와 왕을 설득해 빈 공격을 막았다. 덕분에 5년 후 프랑스와의 전쟁(보불전쟁)에서도 승리해 독일 제2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목하 빅딜을 고집하고 있다.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을 위시한 빅딜론자들의 주장을 들을 때면 위의 두 사례가 겹쳐 떠오른다. 북한이 핵무기, 핵물질, 핵시설, 다른 대량살상무기(WMD)까지 모두 폐기하면 경제제재를 해제하겠다는 게 빅딜의 개요이다. 
 

▲ 지난 2월 28일(현지 시각)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PA=연합뉴스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이 중간단계에서 일부 제재 해제의 가능성을 언뜻언뜻 비추기도 하지만 명료한 것은 없다. 윌슨·비스마르크의 '승리 없는 평화'와는 대척점, 즉 '승리 있는 평화' 또는 완승전략이다. 완승은 불신과 적대감을 배태하는 길이고, 장기적 평화와는 반대의 길임을 잊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북한의 반응은 트럼프 행정부의 완승전략이 장기적 평화는커녕 당장의 협상타결도 얻기 힘들 것임을 예고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북한은 최근 농업과 수산업의 발전을 강조하면서 자력갱생과 자립적 민족경제의 구호를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외치고 있다. 러시아와의 정상회담도 열어 북-중-러의 북방 삼각관계를 강화하려는 모양새다. 미국과의 장기 교착에 대비하고 있는 것일 게다.  

미국은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온건보다는 강경파가 힘을 더 얻을 공산이 크다. 대외정책에 관한 한 유화적인 주장보다는 강한 정책이 대중영합적이고 표를 모으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면 지금의 미국 입장은 '빅딜 아니면 안 된다. 빅딜에 응하든지 아니면 내년 대선 이후에 보자'라고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트럼프가 3차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은 본인이 원래 주장했던 '기존 정치세력과 다른 접근을 통한 핵문제 해결', 즉 김정은과의 담판을 통한 비핵화의 가능성은 남겨두어, 미국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는 계속 갖고 있도록 하고자 하는 전략일 것이다. 그만큼 3차 북미 정상회담의 가능성은 낮아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트럼프의 거장 욕구다. 세계외교의 거장들이 했던 것처럼 완승보다는 항구평화의 길을 찾아 노벨평화상도 받고 세계외교사의 한 페이지도 장식하고자 하는 욕심을 발휘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미국이 두 단계건 세 단계건 단계를 나누어 비핵화하는 협상에 적극성을 보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이 협상의 기본을 상기하는 것이다. 협상의 기본은 상호신뢰다. 신뢰는 반복적인 주고받기 속에서 생긴다. '얼마를 주니까 얼마가 돌아오더라'라는 경험이 신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북미는 지난 70년 간 불신을 쌓아왔다. 그래서 깊은 신뢰가 필요한 빅딜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고, 불신을 신뢰로 바꾸어 가는 작업은 필수불가결이다. 그러자면 작은 규모라도 주고받기가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급선무이다. 그런 연후에야 '빅 딜'(Big Deal)이건, '패키지 딜'(Package Deal)이건,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이건 비로소 가능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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