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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만행의 역사는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기고] 5.18과 나의 인생 유전

 

 

 

 

 

자유한국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모독한 김순례, 김진태 의원에 대해 '솜방망이' 징계를 내렸다. 사실상 '면죄부'를 쥐어 줬다는 비판도 나온다. 5.18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자국민을 학살하고, 이를 통해 독재 정권을 낳은 최악의 인권 유린 사태였다. 과거의 사실이 밝혀진 오늘날까지도 그 후유증은 여전히 깊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신군부의 언론 통제에 항의해 사표를 쓴 후 학자가 된 이상백 전 건국대 부총장이 최근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망언 사태를 보고 과거 자신의 경험담을 전해 왔다. 편집자.  
 
나는 교수이기 이전에 기자였다. 어언 39년의 세월이 건너간 옛 일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고 전두환 신군부가 당시 '언론자유 수호선언'에 가담한 기자들의 대량 해직 폭거를 자행하기 전, 나는 과감히 먼저 사표를 던지고 신문사를 떠났다. 광주 항쟁의 무력 진압에 항거하여 20대 후반부터 40대 초까지 오롯이 내 청춘을 바친 언론인 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그 후 보안사와 안기부의 지속적인 미행과 감시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으며, 한동안 실업자 생활을 면치 못하는 등 굴곡의 인생 유전이 시작되었다. 
 
얼마 전 몇몇 극우 성향 국회의원들의 '5.18' 폄훼 발언과 '600명 북한군 침투설', 전두환 씨의 광주 법원 출두로 광주민주화운동이 새삼 부각되었다. 한국동란 이후 가장 비극적인 참사로 기록되는 이 사건을 느닷없이 정쟁의 도구로 들고 나온 일부 보수 정치인들의 태도와 전 씨의 뻔뻔스런 발언에 탄식과 울분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윽한 동안 잊고 지내던 5.18 당시의 험악한 사회 분위기를 전하고, 그에 저항하여 기자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나의 사연을 말하고자 한다.  
 
5.18은 광주에서 일어났지만 그 불행은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며, 나 역시 그런 불이익과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5.18은 전국의 각 직장의 운명은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개인사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비극이었다.  
 
김재규의 저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 이 나라 모든 국민의 가슴은 그 동안의 오랜 군부독재가 끝나고 이 땅에도 진정한 민주 정치가 구현되리라는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 이후의 나라 현실은 국민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박정희 정권 때보다 더 가혹한 신군부의 등장으로 귀결되었다.  
 
이에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지에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마침내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자 전두환 일당이 공수부대를 투입, 무력으로 이를 제압하는 한편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한 방편으로 철저한 언론통제에 들어갔다. 신군부는 일간 매체에서 제작되는 신문이 시중에 배포되기 전 반드시 군 보안사의 검열을 거치도록 제도화 했고, 그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삭제하도록 강제했다.  
 
그 당시 군부의 검열을 받기 위하여 시쇄 몇 부를 들고 서울시청에 마련된 검열실을 다녀온 기자들의 참담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 곳이라도 온전한 기사를 싣기 위하여 검열관과 치열한 실랑이를 벌이며 그 정당성을 역설했지만, 번번이 위관급 검열관의 강압에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허탈과 울분으로 상기된 표정들이 지금도 나의 안전에 어른거린다. 
 
평상시 같으면 이미 가판대에 진열되었을 시간이라 다시 조판을 할 수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윤전기에 걸려 있는 연판에서 지적된 부분을 긁어내고 신문을 찍어내다 보니 곳곳이 여백으로 뻥뻥 뚫린 흉물인데다가 더러는 문맥조차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만신창이 신문을 독자들 앞에 내놓아야 했다.  
 
이와 같은 전대미문의 언론 탄압에 분개한 기자들의 저항 운동이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해 몇몇 신문사에서 암암리에 전개되고, 그 흐름 속에서 나의 인생행로도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1980년 당시 나는 동아일보 편집국 스포츠동아부의 편집기자로 재직하고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5월 하순, 같은 부서의 이계홍 기자가 은밀히 나에게 다가와 지금 편집국 내에서 뜻있는 기자들이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준비 중인데 이 선배도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즈음 사회부의 심송무 기자, 문화부의 박병서 기자, 국제부의 김재홍 기자 등이 주동해 이 선언을 준비 중이었다. 그 선언서에 서명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하여 각 부서에 실무 간사 한사람씩을 선정했는데, 그때 스포츠동아부에서는 이계홍 기자가 간사로 나섰다. 
 
나 역시 5.18 사태에 분개하던 터라 이 기자의 권유에 놀람과 함께 공감을 느꼈으나 내심 한편으로는 그 서명이 가져올 후환을 예감하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좀 더 생각해보고 가부를 알려주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철학도인 이 선배 같은 분이 서명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고 결과를 알려주십시오." 
 
그날 밤 나는 이 문제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섣불리 서명했다가 해직되는  것은 물론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군부정권에 체포돼 구속되고, 고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당시는 항용 그랬으니까 각오해야만 했다. 이런 참혹한 상황에 내가 과연 동조해야 하는가?
 
이런 고뇌 중에도 문득 문득 되씹히며 떠오르는 것이 "철학도인 이 선배 같은 분이 서명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라는 이 기자의 목소리였다. 심각한 심적 갈등으로 엎치락뒤치락 하던 어느 순간 문득 다음과 같은 통렬한 자각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른바 철학도로서 나름 지적 존재임을 자부해온 나에게 그 지적 존재로서 나의 존재가치를 드높여 주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일찍이 칸트가 지적한대로 내심의 도덕률일 것이다. 한갖 고상한 이론이 아니라 나의 행동의 원리로서 자각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내심의 외침 말이다. 한데 그동안 나는 그 외침에 과연 얼마나 귀를 기울이며, 그에 부응하고자 노력해 왔던가? 특히 결단의 대상이 나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경우, 과연 나는 이를 뿌리치고 내심의 외침, 곧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 왔던가? 아무리 좋은 사상이나 생각도 행하지 않으면 헛된 꿈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두려워하지 말고 나서자. 양심의 소명에 충실하자. 그것이 양심을 지킨 철학도로서의 책무다." 
 
이튿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이 기자를 불렀다.  
 
"이형, 앞장서시오. 심송무 기자에게 갑시다." 
 
이렇게 해서 나는 5.18의 거센 물결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나의 '언론자유수호선언' 동참 소식이 알려지면서 소속 부서인 스포츠동아부 부원들의 미묘한 반응들이 침묵 속에 나를 긴장시켰다. 그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데스크였다. 그는 미리 부원들을 다잡은 뒤 나를 불렀다.  
 
"이상백 씨, 최고참 선배가 그럴 수가 있어? 선동하는 거요?"
 
분노가 묻어나는 일갈이었다. 그리고 그의 일장 훈시가 장황하게 이어졌다. 
 
"과거의 그 어느 정권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친 신군부가 마음만 먹으면 신문사 하나쯤 정간시키거나 폐간시키는 일쯤 식은 죽 먹기인 시국이요. 자중하시오. 선임기자가 선동하는 모습은 모양이 좋지 않소!"  
 
현 시국에 대한 기자들의 결사(結社)를 염려한 회사 당국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자들에 대한 선무 공작은 늘 그렇듯 평기자와 지근거리에 있는 데스크들의 몫이다. 최고참 기자에다 선임기자인 내 행동을 그는 20여 명 부서 기자들 앞에서 제압하면서 다른 기자들이 동요하지 못하도록 무언의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나는 후배기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처지여서 내 움직임 하나하나가 주시의 대상이 되는 상황이었다. 
 
데스크의 강압적 충고에 나는 한동안 꾹 참았다. 그러나 신군부의 폭력진압을 불가피한 일로 용인하는 듯한 그의 언동에 발끈하고 말았다. 욕설과 함께 심한 언쟁이 오가고 여태까지 흉허물없이 지내던 둘 사이는 한 순간에 회복하기 어려운 관계로 돌변했다. 노선상의 차이는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되었으나, 내 양심이 시키는 행동이었으므로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후 사측으로부터도 협박성 회유가 있었다. 고참 기자들이 선두에 나서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이 다각적으로 내려왔다. 나는 신군부와의 싸움 이전에 데스크를 비롯한 사측과 먼저 싸워야 하는 입장에 처하고 말았다.  
 
5.18 폭거에 대한 언론자유 실천운동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지난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루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모 부장이 나를 다방으로 불러냈다. 그분은 내 팔을 붙잡더니 사정하듯, 그리고 충고하듯 말했다. 
 
"이 기자, 뭐 언론자유 선언인가에 서명했다면서? 75년 광고 사태 때도 회사 경영에 큰 시련이 있었던 거 아시잖아. 제발 너무 나서지 말고 회사 안정에 협조하세요. 이 기자가 다칠까봐 걱정돼서 하는 말이요. 용기는 가상하지만 개인이 다칠 때 누가 보상할 것이요? 자중하시오."  
 
그분 말대로 내가 걱정되어 충고 한마디 해준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 측의 압력임을 알게 모르게 시사해주는 것이어서 뒷맛이 씁쓸했다. 이런 때 회사가 구성원을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도리어 군부 편에 서는 듯한 압력에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데스크와의 알력이 깊어졌다. 그와는 직급의 고하를 떠나 사사로운 입장에서 오랜 친구지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 눈을 맞추는 것조차 겸연쩍을 정도로 서먹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이 같은 그와의 반목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회사를 등에 업고 나를 짓누르는 것이라 여겨지자 더욱 참기 어려운 모욕감과 분노가 일었다.
 
자고로 심적 고통의 약은 한잔 술 아니던가? 나는 이래서 매일 저녁 청진동 뒷골목 소줏집에서, 또는 지금은 없어진 국제극장 뒤 카페에서 가까운 친구들과 후배기자들을 불러내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서는 귀가 시간에 늦곤 했다. 패거리 가운데는 타사의 박 모 후배 기자도 있었다. 그는 당시 진행되고 있는 광주 현지의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무언가 비선망이 있는 듯 했다.  
 
광주의 신문사 지국조차 폐쇄되다 보니 도통 안개 속인 그곳 소식을 우리는 그의 입을 통하여 생생히 들을 수가 있었다. 며칠 전엔 광주역 앞에서 시위대 몇 명이 죽고, 또 며칠 전엔 전남도청 앞에서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시 외곽에서도 탈출하던 시민들이 무더기로 총 맞아 죽고, 그리고 마침내 시민군이 무장했다고 하는 내용들이었다. 이런 내용을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뉴스를 다루는 기자들마저 몰랐으니 암흑세상이라고 해야 옳았다. 
 
그래서 그는 이런 참상을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신문사에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비분강개했다.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나보고도 이런 비굴한 지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형도 삼시세끼 굶지 않을 텐데 왜 형답지 않게 꿍꿍 앓고만 있느냐며 취중이었지만 거칠게 나를 추궁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폭압권력에, 세상에 항변하는 절규였을 것이다. 나는 박 기자의 충동적인 권유 때문에서가 아니라,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작금의 여러 가지 내 처지를 생각하며 나도 이제 거취를 결단해야 할 때가 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마침내 사표를 쓰기로 결심했다. 문제의 서명으로 인해 언젠가 강제 해직이 될 수도 있는 처지인데 몇 주, 몇 달쯤 더 버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사내의 '언론자유실천위원회'가 정식 결성되기 전 사표를 던지고 회사를 나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회의 첫 일터였던 신문사를 떠났다. 
 
그러나 결행은 했지만 내면의 갈등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당장 실업자가 된 공포감이 나를 짓눌렀다. 더군다나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등졌다는 아쉬움 때문에 견디기 어려웠다. 막상 떠나긴 했지만 정작 갈 곳이 없다는 현실이 또한 나를 암담하게 했다. 부모와 형제들, 자식을 거느린 장자로서 앞으로도 계속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섣부른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후회되기도 했다.  
 
광야에 내던져진 마음으로 한동안 거리를 헤매었다. 막상 사표를 던지고 나니 동료, 후배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영웅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내 양심의 소명에 따른 것인데, 혹 영웅주의적 모습으로 비쳐질까 주저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당장 개인적으로 좋은 면도 있었다. 아우들의 등록금 등으로 부채의 중압감에 허덕이던 나에게 퇴직금이라는 목돈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나는 석사학위를 갖고 있었고, 두서너 군데 강사를 뛰면 최소한의 생활은 버텨낼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강사라도 제대로 하려면 박사과정을 이수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뒤늦은 공부 끝에 박사과정에 적을 두었다.  
 
그런 어느 날 뜻밖의 보도가 나왔다. 전두환 정권의 문교부 장관이던 이규호 장관이 졸업 정원제를 시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슨 대학 입학 정원을 현재보다 30% 이상 늘려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대신 졸업 시에 그에 비례한 30%를 탈락시켜 졸업을 어렵게 만든다는 제도였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완화하여 입시생과 학부모의 환심을 사는 한편 졸업을 어렵게 함으로써 재학생들이 데모 따위에 한 눈을 팔지 않고 학업에 전념하도록 만든다는 궁리에서 나온 정권 나름의 묘책이었다. 
 
이렇게 학생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경우 교수의 수요 역시 급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당시 박사 과정에 있던 예비 교수들이 하나둘 대학 전임으로 자리를 잡았고, 나도 그 흐름에 편승하여 마침내 지방 대학에 자리를 얻었다. 본격적인 학자이자 교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곧 난처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언론자유선언'에 서명한 후 사표를 쓰고 퇴사한 이력으로 인해 안기부의 신원 조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였다. 다행히 그것은 별 문제 없이 넘어 갔다. 
 
신군부의 압력으로 신문사들이 '언론자유선언'에 참여한 기자들을 일제히 해직한 날이 1980년 8월 9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앞서 자진 사표를 던지고 나왔으므로 그들의 체킹 포인트를 비켜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다. 교수 생활 초기에 기자 시절 '언론자유선언'에 서명한 사실과 이로 인해 사표를 쓰고 퇴직한 사실이 보안사의 정보망에 체크돼 또 다른 감시의 그물망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나의 연구실에 교무과장이 찾아와 엉뚱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날 오전 안기부 직원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최근 나의 동태를 묻고 갔다는 것이다. 아마도 신문사 시절에 있었던 일로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학교에서의 나의 일상에 관하여 좋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했다. 특히 강의를 잘해서 학생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있는 유능한 교수라고 전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난 학기말 수강생 수가 많은 교양과목 교수들을 상대로 시범 실시된 학생들의 강의평가에서 내가 최고점을 받은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얼마 후 건국대학교로 이직하게 되어 교수들에게 이임인사를 하던 중에 알게 된 일이다. 그 지방 출신으로 사회활동이 잦은 모 교수가 그 당시 내가 당국의 지시로 학교에서 파면을 당할 뻔했다는 저간의 사정을 귀띔해주었다. 요즘 생각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는 이처럼 독재 정권이 요주의 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사 전횡을 일삼던 시기였다.   
 
문제를 제기한 쪽은 안기부가 아니라 보안사였고, 보안사로서는 직무상 민간인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라 내 문제를 안기부에 이첩해 처리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는 보안사와 안기부라는 두 정보기관 간에 암투가 벌어지던 시절이라 그 지방 안기부 책임자가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교수를 공연히 잡으려 한다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면서 내 문제를 덮어버리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학군단장으로 평소 학내에서 호가호위하던 현역 육군 소령의 모함이 사건의 발단이었다고 했다. 공적인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학군단 학생들의 공결 처리를 요구하는 그의 제의를 거절한 일이 있은 후 그가 암암리에 내 뒷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정보기관에 문제 교수로 제보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동아일보에서 시국에 저항하여 사표를 던지고 나온 문제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문제교수로 낙인찍어 제보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대학 캠퍼스는 이렇게 정권이 다른 이들은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학내 감시 정보망을 구축해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가던 시기였다.  
 
그 무렵 나는 수도권인 부천에 거주하고 있었다. 겨울 방학 중 어느 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경찰 한 명이 찾아왔다. 조사할 일이 있으니 경찰서로 함께 가줘야겠다는 것이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정보과장이라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뜸 "당신이 북한 체제가 남한보다 우수하다는 등 용공적 발언을 하고 다닌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자술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철학교수다. 평소 나는 강의시간에 '사회는 전투적인 혁명에 의해서만 발전한다'는 공산주의의 폭력성과 인민을 마르크스 레닌주의 및 김일성 주체사상이란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길들이는 북한식 교육을 소개하고 비판해온 사람이다. 그런 내가 북한을 두둔하고 다녔다니 동의할 수 없다"는 항변과 함께 자술서 작성을 거부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정보과 형사들이 번갈아 들어와 회유와 협박으로 나를 어르고 달래며 자술서 작성을 강요했다. 이런 사태가 사흘이나 계속됐다. 그들의 협박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이런 감옥과 같은 부정의한 세상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였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최근 지방 상공인들과 관변 단체의 모임에 초빙되어 강연을 했던 일이 생각났다. 명색이 철학교수인지라 '사회 지도층과 도덕성'이란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했는데 "회사건 국가건 지도 계층의 윤리적 규범이 그 사회와 조직의 성패를 좌우한다. 특히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직자의 윤리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데 공직자의 윤리의식과 민주의식이 절실히 요구된다"라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며칠 동안 경찰서에 붙들려 있는 나를 보고 심각성을 느낀 어머니와 동생들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어머니는 부천시 부녀회의 임원이었고, 그곳 유력 인사의 부인들과 친분이 있었다. 또한 나와는 달리 초등학교 때부터 부천서 학교를 다닌 동생들의 동창생 가운데는 부친이 지방 명사인 친구도 있었다.  
 
어머니와 아우들이 그런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나의 구명 운동에 나섰다. 몇 분이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셨고, 예술인 중 원로 몇 사람들도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의 탄원 덕분이었을까? 쇼비니스트 풍의 정보과장과 달리 신사적인 인상의 경찰서장이 심사숙고 끝에 나의 훈방을 결정했다. 내 문제가 정보기관으로 이첩되었더라면 경찰서에서보다 더욱 혹독한 고초와 함께 교수직마저 부지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될뻔한 일이었다. 이처럼 당시는 공포사회였다. 
 
이 모든 것은 동아일보 사직 사건으로부터 연원했다고 생각된다. 그때 이미 요즘 말하는 블랙리스트가 작성돼 나의 활동 공간을 알게 모르게 제약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나는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여유를 부리고, 평소의 소신대로 의사를 개진했지만 그럴수록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에워싼 '작은 저항'이 이토록 끈질기게 내 인생의 시련으로 다가올 줄이야 나는 상상도 못했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는 내가 이럴진대 당시 광주 항쟁의 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감시는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몸이 오싹해진다.  
 
나는 사실 이런 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80대 노년기에 이른 나로서는 한창 젊었을 때의 뜨거운 열망을 추억으로 간직하며 세상의 변화를 묵묵히 응원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데, 불과 수십 년 전의 일, 그것도 천하가 다 아는 5.18을 아무렇지 않게 폄훼와 왜곡, 조작까지 하는 자들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펜을 들었다.  
 
역사를 지우려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대로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 역사다. 화인처럼 더 생생히 부활하는 것이 역사의 정명(正名)이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시민정신이 깨닫고 있다. 때문에, 그것은 더욱 선명하게 깃발처럼 나부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정명의 정신으로 살아갈 것이다. 
 
필자 약력 
 
1939년 충남 홍성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대학 졸업 후 1980년까지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계 종사. 
그 뒤 전주대 전임강사를 거쳐 건국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건국대학교 부총장 역임.  
저서로는 <존재와 시간의 사유>(건국대출판부) 
<종교-영원과의 화해>(공저, 황소와 소나무)  
<이성과 반이성>(공저, 지성의 샘) 
<자아와 실존>(공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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