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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가 손 놓은 사람들, 공공임대서 쫓겨난 그들은 판결문에서도 말이 없었다

[공공임대주택-구멍뚫린 복지(4)]LH가 손 놓은 사람들, 공공임대서 쫓겨난 그들은 판결문에서도 말이 없었다

김원진·김지원 기자 onejin@kyunghyang.com

입력 : 2019.10.24 06:00 수정 : 2019.10.24 10:09
 

LH, 전세임대 명도소송 남발

‘1년 이상’ 연체가구 4년 새 2.31배
갓 성인 된 소년소녀가장 등 포함
2017년 1월 이후 판결 600건 이상
“나가면 쪽방뿐…보호제도 필요”

판결문은 달랑 두 장. 주문의 요지는 간명하다. “밀린 월세를 갚으라” “월세가 연체됐으니 집에서 나가줘야 한다” “강제집행 할 수 있다” “소송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공임대주택인 전세임대주택 세입자를 상대로 건 명도소송 판결문의 ‘고정불변’ 형식이다. 명도소송은 건물을 비워달라는 요청을 세입자(점유자)가 응하지 않을 때 제기하는 소송이다.

경향신문이 대법원 판결문 열람에서 ‘전세임대주택’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을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LH가 2017년 1월 이후 전세임대 세입자에게 명도소송을 걸어 확정 판결을 받은 사례는 600건이 넘었다. LH가 광주 등 일부 지역에서는 4~5명을 묶어 소송을 제기해 퇴거 판결을 받은 세입자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세입자인 피고 측 사연은 판결문에 담기지 않았다. 월세가 밀린 세입자가 비용과 시간 등의 이유로 전부 무변론으로 재판에 임한 탓이다. LH는 재판부에 4~5장짜리 의견서를 냈다. 판결문에 첨부된 LH 측 의견서를 보면 세입자들은 대개 13개월간 130만원 안팎의 월세가 밀렸다. 한 달에 월세 10만원을 내지 못한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 저렴주택마저 무더기 명도소송

전세임대라면 보증금만 넣으면 될 텐데, 월세 체납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국 19만4898가구 전세임대는 공공임대 아파트와 달리 도심에도 물량이 일부 분포해 있다. 입주자격은 일정 소득 요건을 충족한 청년·한부모가족·신혼부부 등에게 주어진다. 세입자가 조건에 맞는 집을 구해오면 LH가 집주인과 전세계약을 체결하는 구조다. LH가 보증금 6000만~1억2000만원을 집주인에게 지급한다. 정부가 주택 공급 없이 보증금만 지원해 공공임대로 볼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전세임대는 월세도 내야 한다. 세입자는 보증금의 이자 형태로 매달 10만원가량을 LH에 내야 한다. 일종의 월세다. LH가 정부 기금에서 지원한 보증금의 5% 수준의 자기부담금(약 500만원)과는 별도다. 월세와 전세가 혼합된 반전세에 가깝다. 집주인이 추가 월세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세입자 부담이 30만원대로 치솟는 일도 발생한다. 한두 푼씩 불어난 월세는 전세임대 세입자들의 임대료 체납 원인 중 하나다.

2017년 1월 이후 LH의 전세임대 퇴거 판결은 지역 내 전세임대 물량 대비 인천·광주·대구에서 많았다. 인천은 지난해 기준 명도소송이 92건이었다. 인천의 전세임대는 2만8000가구 정도인데, 5만2000가구가 있는 서울(89건)보다 명도소송이 많았다. 해당 지역에 저렴한 전세임대 월세조차 감당하지 못한 세입자 비중이 커 명도소송도 많았다는 게 LH 설명이다.

지난해 인천, 대구, 광주의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률은 각각 3.7%, 4.5%, 5.0%로 전국 평균(3.4%)보다 높았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자료로 추산하면 인천의 3.3㎡당 1000만원 이하 저렴주택 비율은 57%로, 같은 수도권인 서울(6.3%)·경기(38.9%)보다 높다. 광주(69.9%)는 저렴주택 비율이 광역시 중 가장 높았다. LH 관계자는 “최대한 기다리다 마지막 수단으로 명도소송을 했고, 판결이 나더라도 강제집행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대료를 연체하는 전세임대 세입자는 전국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달 초 공개한 전세임대 연체료 현황을 보면 지난 7월 기준으로 6개월 이상 12개월 미만은 5654가구, 12개월 이상은 7090가구였다. 2015년에 비해 각각 1.97배, 2.31배 증가했다. 2015년에서 지난해 8월 사이 서울도시주택공사(SH)에 임대료 문제로 명도소송을 당해 퇴거한 공공임대 입주민 중에는 전세임대 세입자가 27.7%로 가장 많았다.

■ 명도소송은 세입자 압박용?

임대료를 밀린 전세임대 세입자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다. 올해 초 LH 지역본부에는 만 20세를 갓 넘은 청년이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임대료 부담을 상담하러 온 사례였다. LH는 아동복지시설 퇴소자와 소년소녀가장,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미성년 자녀 등에게 만 20세까지 임대료 없이 전세임대를 제공한다. 만 20세를 넘으면 월세를 내야 한다. 전세임대 명도소송 판결문을 보면 LH가 전세임대에 살던 소년소녀가장이나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등에게 명도소송을 걸어 확정 판결을 받은 사례도 여럿 있다. LH 관계자는 “오래 집을 비워 수소문하다 안되면 소송을 한 사례가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의료비가 부족해 주거급여를 쓰다 연체된 세입자도 있었다. 영구임대나 매입임대의 월세는 세입자의 주거급여에서 자동이체되지만, 전세임대는 주거급여가 바로 임대료 납부로 이어지지 않는다. 통장에 들어온 주거급여를 의료비 지출에 쓰다 임대료가 수십만원 밀렸다. 윤정선 서울 금천주거복지센터 실장은 “어르신들은 의료비와 생계비처럼 가장 급박한 곳에 생긴 돈을 쓴다. 임대료 연체가 발생하는 현실부터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명도소송이 세입자 ‘압박용’으로 쓰였다는 내부 자성의 목소리도 있다. 한 지방도시공사 고위 관계자는 “명도소송을 걸었다가 취하하는 사례가 많다. 겁만 주고 밀린 세를 내겠다고 하면 취하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LH는 명도소송 진행 중 35~45%가량을 취하한다.

명도소송에 앞서 주거취약계층의 월세 연체 사유를 확인해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는다. 부담능력을 따져 월세를 차등화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최병우 대구주거복지센터장은 “공공임대에서 쫓겨나면 갈 곳은 쪽방뿐이다. LH가 장기간 월세를 내지 못한 세입자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한 뒤 국토부·복지부 등 관계부처와 함께 대응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담당 기관들도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LH는 오는 12월18일 발표하는 ‘공공임대주택 비전 2030’에 ‘저소득층 점유권 보장을 위한 퇴거기준 제도개선안’을 담기로 했다. LH는 세입자를 강제퇴거 위기에서 보호하는 규정을 공개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0240600035&code=940100#csidxd80f0cbd652f111ac821cf30d7977c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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