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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전 시장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연대의 제안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07/24 10:05
  • 수정일
    2020/07/24 10:0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의혹만으로 박시장의 10년 시정(市政)을 부정할 수 없다.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0/07/23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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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논객인 김민웅 교수는 지난 10년 박 전 시장의 시정(市政)의 자취는 천만 시민들의 자산인 만큼 계승되어야 하고, 미래를 위한 정치적 힘이 되어야 하며, 명예를 부여할 것이 있다면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올라온 박시장 사자명예훼손 관련한 청원 © 프레스아리랑


 

대표적인 사회활동가 겸 논객인 김민웅 교수가 22일 사회관계망 글을 통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연대를 호소했다. 

 

김교수는 이렇다 할 증거하나 없는 의문 투성이의 사건임에도, 고소인의 진술이 그대로 진실이 되고 있다며, 박원순 시장의 평생을 매장시키는 논란의 책임은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고 있는 변호인쪽에 있다고 주장했다. 

 

설혹 박 시장의 성추행이 확정된다해도 그에 합당한 사회적 질타를 받고 피해자로 입증된 이에 대한 위로와 보상, 적극적 해결책이 모색되면 그뿐, 그것이 죽음의 무게를 넘어설 수는 없는 만큼 박 전 시장의 죽음에 대한 예의는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애도의 시간이 끝나기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없을까, 라고 간절하게 애원했던 가족들의 청을 일거에 묵살하는 (변호인의) 태도에서 ‘성추행 이상의 폭력’을 목격했다.”고 글을 이었다. 

 

또한 “피해를 주장하는 이와의 연대는 죽음에 대한 애도와 모순되지 않는다”며. 박원순 시장을 잃어버린 이들의 통절함이 피해를 주장하는 이를 모욕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설명했다. 

 

2회의 기자회견으로도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을 확신할 수 있는 물증 하나 없다보니 도리어 법정대리인측에 대한 의혹이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변호인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한 질문을 2차가해, 피해자에 대한 공격, 법정대리인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2차가해라는 말이 고소인을 보호하기보다,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폭력적 언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변호인들은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사실여부를 밝히는데는 관심이 없고, 성추행 혐의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이것이 가능했던 구조적 조건, 즉 방조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1차가해가 확정된 바 없기에 2차가해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

 

증거가 없다면 당연히 법정대리인에 대한 공세적 질문이 이어질 것이고 법정 대리인은 이 질문에 대해 성실하게 답변해야 의뢰인을 지켜낼 수 있는데도, 김재련 변호사는 피해를 주장하고 있는 고소인조차 의혹의 대상이 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한평생 이 나라의 정의와 미래를 위해 진력을 다해온 한 인간의 삶이 귀하게 여겨진다면 명료한 사실관계에 대한 규명의지와 깊은 성찰의 힘을 가지고 이 길을 함께 가자는 김민웅 교수의 제안에 <프레스아리랑>은 연대를 표명하며 청와대의 국민 청원을 함께 공유한다.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90711?fbclid=IwAR2A1y-2BucRRNcDvS1crgbgMlXB_NGQ4KVF8sXIMGPWULILv6Gu3nHW9ns

 

본사기자 

 


아래는 김민웅 교수가 페이스북에 발표한 글 전문이다. 

 

<고(故) 박원순 시장의 명예를 위해>

 

1. 죽음에 대한 예의

 

그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또는 누가 벼랑 끝으로 그를 몰아댔을까?

 

아직 이에 대해 우리는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그 죽음의 경로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는 별도로

그의 죽음이 “누군가를 향한 가해”라거나

“진상규명을 틀어막기 위한 것”이라거나

“실망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당연한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이 죄를 자인한 결과라거나

노회찬 의원의 자살이 또한 죄를 자인한 결과라고 여기고

그 죽음을 모욕하지는 않았다.

모두 아파했고

지금까지 아파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은 지금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가?

 

나는 설혹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그 진상이 확정된다고 하여도

그것이 결코 죽음의 무게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주장 외에 없는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입증된다면 

그건 그것대로의 무게에 합당한 사회적 질타를 받으면 된다.

피해자로 입증된 이에 대한 위로와 보상,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해결책이 모색되면 된다.

 

인간의 생명을 압도하는 성추행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성추행을 정당화하자는 논리가 아님은 다 알아 들을 것이다. 

 

박원순 시장의 발인, 그날 비가 내렸고

1차 기자회견이 있었다.

오늘 2차 기자회견이 열린 날

또 비가 내렸다.

 

나는 그 빗소리에서 하염없는 통곡을 듣는다.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조차 

애도가 가해라며 모욕한 이들의 모습에서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고발자들의 얼굴을 본다.

 

그 고발자에서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은 제외시키고 싶다.

그녀 역시 박원순 시장의 죽음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그녀와 법정 대리인(+관련 여성단체)의 목적이 

서로 동일한지 점점 확신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녀가 법정 대리인(+관련 여성단체)에게 

진정 보호받고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게 되고 있다. 

 

보호라는 이름의 은폐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정작 당사자의 생생한 육성은 실종된 고발이기 때문이다. 

 

애도의 시간이 끝나기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없을까, 

라고 간절하게 애원했던 가족들의 청을 

일거에 묵살하는 태도에서 

“성추행 이상의 폭력”을 목격했다.

 

피해를 주장하는 이와의 연대는

죽음에 대한 애도와 모순되지 않는다.

박원순 시장을 잃어버린 이들의 통절함이

피해를 주장하는 이를 모욕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더군다나 그가 평생을 통해 한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이끄는데 모든 것을 바쳐왔다면

누구나 숙연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아직 진상을 몰라 어리둥절하면서도 

박원순의 삶과 죽음을 존중하는 가운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가지고자 하는 슬픔의 시간을 박탈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그의 위력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규탄한 것을 보면서

순수한 애도의 마음까지도 이토록 매도당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를 

뼈저리게 아파하게 된다. 

 

서울 거리를 다니면서

도처에서 박원순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사소한 일상에서조차 그는 백년이 앞선 상상력을 추구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 앞에서

박원순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감당할 수 없는 수치일까? 

해명과 이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지레 포기한 것일까?

아니면 구구한 변명보다는 죽음으로 명예를 지키고 싶었던 걸까?

너무나 도덕적 기준을 스스로 높여 놓아버리는 바람에 

혹 남들에게는 작다고 할 수 있는 사안이 자신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우리 모두에게 그 죽음에 대한 성찰의 요청을 온몸으로 하고 떠난 것일까?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그 죽음을 예의를 가지고 대하고 싶다.

 

죽음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리는 사회는

삶에 대한 예의 또한 지켜낼 수 없다.

 

2. 주장과 증거

 

두 번의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와 만나지 못했다.

 

성추행의 특성상 물증 확보나 증거제시는 

대체로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주장한 바대로 무려 4년 동안 지속된 성추행이라면

그 물증 확보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피해방지를 위해 여러 차례 많은 이들에게 호소했다면

그 호소의 입증 근거를 대기 위해 확보한 물증이

없을 까닭이 없고

그렇게 공개한 물증을 기자회견장에서 공개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추가증거를 포함, 증거를 내놓지 않은 이유는

수사기관에 넘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나중에 혹 수사기관이 발뺌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바로 이겁니다, 라고 제시했다면

기자회견으로 도리어 법정 대리인 측에 대한 의혹이 

이렇게 늘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기자도 이러한 각도에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은 장면이었다. 

 

기자회견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열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국민의 알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질문은

2차 가해이며 피해자에 대한 공격이자

법정 대리인에 대한 공격과 동일시 되었다.

2차 가해라는 말이 진정 피해주장 당사자를 보호하기보다는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폭력적 언어가 되고 있기조차하다. 

 

물론 음모론적 시각에서 비난과 조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건 당연히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며

그 대상이 누구이든 금지되어야 할 바다.

 

우리가 문제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박원순은 가짜입니다.

진짜 숨겨진 모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가 입증되는 충격적 확인이 없다는 점이다.

아직 그 시신이 재가 되어 땅에 묻히기도 전에 

기자회견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초점은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건 이미 기성사실로 전제해놓고

이것이 가능한 구조적 조건으로 이동했다.

주범과 방조범이라는 틀이 만들어졌고

이제 주범은 확정되었으니 방조범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는 식이다.

 

이건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고

실체상으로도 가능한 논법이 아니다.

1차가해가 확정된 바 없는데 2차가해를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러니

피해주장에 대한 신뢰를 사회적으로 획득하려는 노력보다는

그 주장에 대한 질문을 공격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이 

기자회견의 목적인가 싶을 정도였다.

 

법정 대리인에 대한 공격은 곧 피해자에 대한 공격이라는 논법은

법정 공방의 현장이었다면

가해자로 지목된 쪽의 방어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논리가 된다.

 

이런 논법은 존재할 수없다. 

 

박원순 시장의 무고를 믿고 싶은 이들에게는

역설적이게도 그 무고함을 반전시킬 증거가 절실하다.

그러면 더는 무고함을 주장할 수 없게 되고

바보같이 왜 그랬어, 하면서 통절한 마음과 함께

피해자로 확정된 이에게 무한한 사과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증거가 없다면

당연히 법정대리인에 대한 공세적 질문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법정 대리인은 이 질문에 대해 성실하게, 근거있게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통해 자신이 변호하는 의뢰인인 피해주장 여성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태도는

피해주장 여성 조차도 의혹의 대상이 되게 하는 매우 위험한 방식이 된다.

이건 법정 대리인의 능력, 역할, 의무 그 모든 차원에서 문제가 된다.

기자회견 이후 벌어지는 모든 논란은 그에 기인하고 있다.

논란의 책임은 질문하는 쪽에 있지 않고 제대로 답하지 않고 있는 쪽에 있다.

 

3. 고(故) 박원순 시장의 명예를 위해

 

잘못이 있다면 잘못대로 

그에 합당한 질타와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당연하다.

피해자의 주장이 확정되면 박원순 시장과 함께 이런 저런 얽힘이 있는 이로서

머리 숙여 깊고 깊게 사죄할 것이다. 

 

그러나 정도를 넘는 과잉 응징은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만일 이토록 수많은 질문이 생겨나는 사건인데

피해를 주장하는 쪽의 진술이 입증없이 모두 그대로 진실이 되어

박원순 시장의 평생의 명예가 추락하고 매장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지난 10년 박원순 시장의 시정(市政)의 자취는

그만의 것이 아니다.

천만 시민들의 자산이다.

 

그래서 그가 뽑혔고 시장으로서 헌신을 다할 수 있었다.

그 자산은 분명하게 계승되어야 하고

미래를 위한 정치적 힘이 되어야 하며, 

명예를 부여할 것이 있다면 부여해야 한다.

 

오욕이 있는 인생사에서도 명예로운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박원순 같은 이의 삶은 어떠할까.

 

고(故) 박원순 시장의 명예를 지켜내고 싶다. 

함께 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함께 하고 싶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평생,

이 나라의 정의와 미래를 위해 진력을 다해온 

한 인간의 삶이 귀하게 여겨진다면

부디 

명료한 사실관계에 대한 규명의지와 깊은 성찰의 힘을 가지고

이 길을 같이 갔으면 한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있다. 

 

2020년 7월 22일 오후, 김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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