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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차별의 역사, 성소수자는 우리시대 백정인가?

[손호철의 발자국] 5. 경남 진주 : 형평운동은 한국 인권운동의 효시

가축을 도살하는 정육업이 이처럼 대접을 받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가축을 도살하는 백정은 노비는 아니지만 양민 중 최하층으로 차별과 천대를 받고 살았다. 이들은 거주가 제한되어 따로 집단을 이루어 살아야 했고, 호적이 없는 무적자여서 일반 상민들과 달리 별도로 관리되었다. 이들은 외출 할 때는 상투를 틀지 않은 채 백정의 신분을 나타내는 특수한 모자인 패랭이를 써야 했다.

 

경기도 양주 불곡산에 가면 산 초입에 넓은 빈 공터가 나온다. 안내판을 보면,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의적으로 불리는 임꺽정의 집터라고 표시되어 있다. 임꺽정은 백정 출신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천대당하며 컸다. 백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동네 우물물도 마시지 못하게 해 가까운 불곡산까지 가서 산에 흐르는 물을 떠다 마시며 컸다고 한다.

 

▲ 경기도 양주 불곡산 입구에 있는 임꺽정 집터 보존비. 임꺽정은 백정으로 차별을 받고 살았다. ⓒ손호철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라. 그럼으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여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 사람이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本社)의 주지(主旨)니라. 우리도 조선민족 2천만의 분자이며 갑오년 6월부터 칙령으로 백정의 칭호를 없이하고 평민이 된 우리들이다. 애정으로 상부상조하여 (…) 공동의 존영을 기하고자 40여만이 단결하여 (…) 그 주지를 선명히 표방코자 하노라."


 

일제 치하인 1923년 4월 25일, 경산남도 진주의 한 강당에는 백정 출신의 지역 재력가들과 '깨인' 양반 출신 지식인 등 80명이 모였다. 창립선언문이 보여주듯이, 수백 년 간 차별을 받아온 백정들이 백정 등에 대한 차별이 없는 공평한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로 '저울(衡) 같이 공평(平)한 사회(社)'라는 뜻의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한 것이다.

 

▲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제6회 형평사 전국대회(1928년) 사진 ⓒ손호철
▲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 ⓒ손호철

이 선언에서 언급했듯이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폐지되었고 그동안 호적이 없는 무적자로 지내온 백정도 1896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호적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차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직업란에는 여전히 백정이라 표시했고 학교나 교회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수업을 받거나 예배를 볼 수 없었다. 일제도 이 같은 정책을 이어받아 직업란에 백정을 표시했고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내는 서류에도 반드시 신분을 표시하도록 했다.


 

이 같이 실질적인 차별이 계속되고 있던 때에 기폭제가 된 사건이 터졌다. 진주의 백정으로 돈을 많이 번 이학찬이란 사람이 자식들을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하자 백정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입학 거절을 당했다. 우회곡절 끝에 간신히 입학을 허가받았으나 백정의 자식임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압력 때문에 학교를 그만둬야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화가 난 이학찬은 1년 전 일본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백정들이 '수평사(水平社)'라는 조직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와 비슷한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진주에서 형평사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적으로 형평운동이 불처럼 번져갔다. 5월에는 각 지방대표자 회의가 열린 진주에서 차 3대에 타고 시내를 다니며 7000장의 선전문을 나눠줬다. 부산, 대구, 논산, 옥천에 지사를 설치했고 이어 정읍에 분사를 설치했다.


 

1년 뒤에는 전국에 12개 지사와 67개 분사가 설치됐고 1926년에는 일반인에 의한 차별과 박해가 심한 것, 관광소와 교원이 차별 대우하는 것, 목욕탕, 식당 등에서 공공연하게 차별이 행해지는 것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형평운동을 시작한 10년 뒤인 1933년에는 240개의 분사가 설치되어 40만 백정들의 이익을 대변했다.

 

물론 형평운동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형평운동이 시작되자 진주 각 동의 대표자들이 모여 쇠고기를 사먹지 않기로 결의하는가 하면, 각 마을마다 쇠고기 사먹는 집이 있는지 감시하고 협박하는 등 형평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주목할 것은 반(反) 형평운동을 주도한 것이 상류층만이 아니라 오히려 농민, 노동자 같은 '기층민중'이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23년 진주에서 형평사 축하식이 열린 다음날, 2500명의 농민들이 형평사 본부를 습격했고 제천에서는 노동자들이 백정을 집단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미국에서 흔히 흑인으로 잘못 불려온 아프리카계에 대한 인종차별 폐지에 대해 같은 유색인종인 동양계가 펄펄 뛰며 반대하고 나서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이는 기층민중인 노동자, 농민이 자기들보다 더 하층인 백정을 탄압한 안타까운 사건으로, 기층민중들의 의식이 얼마나 지배 질서가 강요해온 신분제에 물들어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한때 조국 서울대 교수 같은 부유층 좌파에 대해 '강남 좌파'라는 담론이 등장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강북 우파', 즉 보수적인 기층민중이라는 점과도 연결된다.


 

형평사 운동은 반형평운동의 저항뿐만이 아니라 내분으로도 고통을 겪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운동의 본부를 어디에 줄 것이냐는 지역적 주도권 문제, 온건한 투쟁방식을 추구할 것인가, 급진적인 투쟁방식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투쟁 전략 문제 등으로 갈등하고 내분을 겪었다.


 

"형평사 동인 제군, 우리들 수평사 동인과 제군 사이에 있는 것은 단 하나의 해협뿐입니다. 우리들은 고작 122마일에 불과한 이 해협이 우리의 굳건하고도 따뜻한 악수를 막는 데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몰지각한 인간모독자의 눈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른 바 정신적 노예제의 영역을 돌파하려는 인류의 기수로 선택된 민중이라는 기쁨을 함께 나누며 전진합시다."

 

 

형평사 운동에서 주목할 것은 이 운동이 처음부터 국제연대투쟁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형평사의 선배 격인 일본의 수평사는 형평사의 요청에 따라 형평사 창립대회에 축사를 보내왔다. 그들의 열악하고 천대받는 사회적 지위가 국경을 넘어 쉽게 연대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진주 시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볼거리는 진주성, 특히 임진왜란 당시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것으로 유명한 촉석루다. 이 촉석루의 강 건너편에는 남강을 따라 길게 만들어진 작은 공원이 있다.


 

그 공원에는 진주가 전국적인 형평운동을 주도한 것을 기념하는 형평운동기념탑이 설치되어 있다. 반달 모양의 탑 앞에 두 남녀가 서 있고 그 위에 또 다른 건축물이 세워져 있는 특이한 모습의 조형물이다. 반달 모양의 탑에는 '자유, 평등, 형평정신'이라는 글씨와 함께 형평이라는 깃발을 든 투사를 부조로 새겨놓았다.


 

▲ 진주 남강변에 설치되어 있는 형평운동기념탑 ⓒ손호철
▲ 다른 각도에서 본 형평운동기념탑 ⓒ손호철

이 탑은 '형평 정신'은 진주 정신의 상징이라는 취지에서 시민 1500명이 성금을 내서 1996년 진주성 앞에 세운 것이다. 하지만 진주성 앞에 진주대첩광장을 만들면서 여러 시민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것도 백정 차별의 유제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기념탑 앞에 세워진 취지문에는 "형평운동은 수 천 년에 걸친 신분 차별을 없애려는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금자탑"이라고 쓰여 있다. 민주주의란, 인권이란, 모든 착취와 억압만이 아니라 모든 차별과 배제에도 반대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취지문은 정곡을 찌른다. 그렇다. 형평운동은 우리나라의 근대적 인권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의 참사를 목도하고 자성 속에 1948년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은 제1조에서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백정을 포함한 그 어떤 천민도 다른 사람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선언. 그것이 바로 형평운동이다. 이 점에서 이 탑을 1996년 유엔이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일인 12월 10일에 설립한 것은 더욱 의미가 크다.


 

형평운동기념탑에 쓰여 있는 '자유, 평등, 형평정신' 글귀를 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차별받고 있는 성소수자 등 '우리 시대의 백정'에 대해, 그리고 2007년에 고(故) 노회찬 의원이 발의했지만 아직도 통과되지 못한 차별금지법이 생각났다.


 

세계인권선언 제2조는 말한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는다." 우리가 기본적인 인권을 무시하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비판하는 쿠바도 2019년 성소수자 등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는데, 우리나라는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반대 등에 막혀 아직도 모든 차별을 금지하자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 백정이라는 차별의 언어와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성소수자와 같은 '또 다른 백정'은 여전히 존재하며, 차별 없고 저울같이 공평한 사회를 만들자는 형평정신, '누구나 공평하게 인간 존엄을 누리고 서로 사랑하고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형평정신은 아직도 우리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요한 정신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진주 남강을 떠났다.

 

▲ '동성애는 인권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시위를 하는 기독교근본주의자들 ⓒ프레시안

그동안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30회에 걸쳐 되짚어왔던 <한국일보> '손호철의 발자국' 칼럼이 이제부터 <프레시안>에서 주 3회씩 연재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해외여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에서, 지역 곳곳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높이고 '교양 있는' 여행을 돕기 위해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발로 뛰며 쓰는 한국 근현대사 기행입니다. 제주와 호남을 시작으로, 영남, 충청, 강원, 경기, 서울까지 약 60회에 걸쳐 이어질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합니다. <편집자>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1618004059602#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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