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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속에서 영생하라 신혜원 동지여!”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1/03/2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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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김정은 국무위원장 서울방문을 환영하는 순회공연 '꽃물결' 활동을 한 신혜원 동지.     ©김영란 기자

 

▲ 2017년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벽화 작업.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가 벽화를 보며 기뻐하고 있다.     ©김영란 기자

 

▲     ©김영란 기자

 

1. 신혜원 작가의 약력

 

1978년 2월 4일 서울 출생

1996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입학

1996년 민족무예경당 동아리 백두대간 활동

2000년 홍익대 동아리연합회 회장 역임. 한총련 대의원으로 수배

2001년 홍익대 총여학생회 회장 역임

2002년 투옥

2004년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교육선전국장

2005년 미술운동단체 그림공장 활동

2012년 콜트 콜텍 전시회 참여

2013년 7월 국정원게이트 버스킹 참여

2013년 12월 종북예술제 참여

2014년 그림책 『들꽃의 노래』 출간

2015년 4월 개인전시회 ‘들꽃의 노래’

2015년 영화 ‘불안한 외출’ 포스터 작업

2017년 5월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벽화 작업

2017년 7월 미술운동단체 ‘베란다항해’ 결성

2017년 10월 방미 트럼프 탄핵 청년원정단 실천

2017년 11월 한미일 삼각동맹 풍자 전시 ‘마름전’ 진행

2018년 1월 반미반일통일전시 ‘지금, 우리’ 진행

2018년 4월 제주 4.3 전시 ‘이제사 고람수다’ 진행

2018년 6.13 지방선거 강남 ‘다’ 선거구 민중당 후보로 출마

2018년 12월 김정은 국무위원장 서울 방문을 환영하는 순회공연 ‘꽃물결’ 활동

2019년 6월 세월호광장 금요실천 시작

2019년 8월 통일선봉대 참가

2020년 1월 유방암 말기 판정, 투병활동 시작

2021년 3월 22일 오후 12시 24분 영면

 

2. 신혜원 작가의 삶

 

신혜원 작가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의 삶은 조국과 민중, 조직과 동지를 위해 헌신해 온 삶이었다.

 

신혜원 작가는 자주·민주·통일을 염원하며 자신의 한 생을 바쳤다. 

 

신혜원 작가는 1996년 홍익대 동양화과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96년 당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은 3월부터 학원자주화 운동을 비롯해 반미, 조국통일운동을 맹렬히 펼쳤다. 신혜원 작가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알게 되면서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다.  

 

신혜원 작가는 2000년 홍익대 동아리연합회 회장을 결심한다. 그 당시 한총련 대의원이 되면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자가 되고 차가운 감옥으로 갈 것을 알면서도 결의했다. 결국 2002년 신혜원 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연행된 후 투옥이 되었다.

 

학생운동 이후 신혜원 작가는 자주·민주·통일에 대한 염원을 미술작품으로 표현해왔다. 

 

학생운동 이후 미술단체인 ‘그림공장’ 활동을 하면서 반미와 통일을 주제로 한 작품을 창작했다. 그 외에 2012년 콜트 콜텍 전시회, 2013년 7월 국정원게이트 버스킹, 2013년 12월 ‘종북예술제’, 2018년 1월 반미반일통일전시 ‘지금, 우리’ 만나 등 다양한 작품을 창작했다. 

 

특히 신혜원 작가는 통일의 열기가 높아졌던 2018년, 김정은 국무위원장 서울 방문을 환영하는 순회공연 ‘꽃물결’ 활동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기다리며, 통일의 염원을 담은 작품을 다양하게 창작했다. 

 

▲ 2017년 벽화작업 이후에 벽화처럼 함께 춤을 추는 신혜원 작가(맨 오른쪽)과 동료들. 이들은 이후에 '베란다항해'라는 그림단체를 만들었다.     ©김영란 기자

 

신혜원 작가는 민중을 한없이 사랑한 사람이었다.

 

신혜원 작가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작품으로 표현했다, 

 

위안부 할머님들의 미술치료사가 되었고 위안부 할머님들을 ‘들꽃’으로 형상한 그림책 『들꽃의 노래』를 펴내기도 했다. 또한 세월호참사 이후에는 이를 주제로 한 작품을 창작했다.

 

윤미향 의원은 신혜원 작가에 대해 “그 길이 이 땅의 민중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세월호 노랑리본이 되고, 우리민족 자주를 세우고, 통일을 위한 길에, 베트남의 미국전쟁에서 한국군과 미군에 의해 인권을 짓밟힌 희생자들을 위한 길에, 재일조선학교 아이들과 함께 하는 길에,  몸으로 그림으로 삶을 살아냈더이다”라고 기억했다. 

 

신혜원 작가는 조직의 요구에 늘 충실한 사람이었다. 

 

신혜원 작가를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조직의 숨결과 방향과 일치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신혜원이다. 단 한 치의 타협을 몰랐고 물러서지 않았다.”

 

신혜원 작가는 좋은 시기이든 어려운 시기이든 조직의 요구를 관철하는 데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신혜원 작가는 갑자기 제기된 전시회, 작품 제작 요구를 밤을 새워서라도 완수해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잠은 대체 언제 자느냐’라고 신혜원 작가에게 물었다고 한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고생쯤은 달게 여기며 생활해왔다.   

 

이렇듯 신혜원 작가는 묵묵히 자기 일을 완수해왔다.   

 

▲ 신혜원 작가의 그려주는 인터뷰     ©김영란 기자

 

신혜원 작가는 동지를 귀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신혜원 작가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지들에게 건네는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뜨거운 사랑이 담겨있었다. 또한 동지들의 고민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도움을 주는 작가였다. 한 마디로 ‘웅심 깊은 사랑’을 주는 사람아 신혜원 작가였다. 

 

자주민주통일의 길에 동지와 함께 가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한 그림’을 기치로 한 젊은 미술인 단체인 ‘베란다항해’를 조직화하기도 했다. 조직가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신혜원 작가의 동지애를 엿볼 수 있는 것은 ‘그려주는 인터뷰’라 할 수 있다. ‘그려주는 인터뷰’는 신혜원 작가가 동지와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대담 내용과 함께 그 동지의 장점과 특징을 그림으로 표현한 인터뷰였다. 초상화와 함께 그 동지에 대한 느낌을 글로 적어서 동지에게 주곤 하였다. 본지에 ‘그려주는 인터뷰’를 기고하기도 했다.   

 

“자신의 몸이 아픈 와중에도 후배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거금을 준 누나”, “후배가 몹쓸 병에 걸렸을 때 후배를 위해 자진해서 모금활동을 한 언니”, “활동을 어려워하는 후배를 위해 달려가 매일 격려하며 활동을 북돋아 줬던 선배”, “늘 웃으며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던 후배”라며 많은 이들이 신혜원 작가를 기억하고 있다.   

 

신혜원 작가는 미술 실력도 아주 뛰어났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들어갈 정도라면 기본적으로 그림 실력이 우수한 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혜원 작가는 더 높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과 연습을 해왔다. 미술학원을 나가면서 그림 실력을 더 높이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한다. 아무리 바빠도 매주 미술학원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신혜원 작가가 실력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은 그림으로 민중에게 더 복무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신혜원 작가는 높은 실력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림책 『들꽃의 노래』는 ‘볼로냐 아동도서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볼로냐 아동도서전’은 50년 넘게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개최돼 온 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 도서전 박람회이다.   

 

신혜원 작가는 영화 ‘불안한 외출’의 포스터, 도서 『일하는 사람의 철학이야기 1,2』 표지디자인과 삽화,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벽화 작업’ 등의 작품도 남겼다. 

 

신혜원 작가는 실천에서도 앞장선 사람이었다. 

 

한반도 정세가 격화되던 2017년 10월 신혜원 작가는 ‘방미 트럼프 탄핵 청년원정단’에 함께 했다. 당시 미국의 입국 거부로 방미가 불발되자 동료들과 함께 광화문광장에서 노숙농성을 하며 반미투쟁에 앞장섰다. 2018년 6.13 지방선거에 강남 ‘다’ 선거구 민중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진보정당을 강화하기 위해 직접 후보로 출마해 활동을 한 것이다. 또한 2019년 6월부터 세월호광장에서 금요실천을 ‘베란다항해’ 동료들과 매주 진행해왔다. 2019년에는 통일선봉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렇듯 신혜원 작가는 개인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고 ‘거리 예술가’, ‘민중 예술가’로 한생을 살았다. 

 

신혜원 작가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학습이 있었다. 신혜원 작가는 한순간도 책을 놓지 않았다. 특히 투병 중에도 조국의 내일을 밝히는 글을 빠짐없이 읽었다. 

 

신혜원 작가의 학습은 자주·민주·통일에 대한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신혜원 작가의 삶은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신혜원 작가의 자주·민주·통일 염원은 다른 사람들의 투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 신혜원 작가의 부고를 접한 뒤 후배동지가 그린 작품, (왼쪽부터 김승교 변호사, 비전향장기수 박선애, 박순애 선생, 신혜원 작가, 김복동 할머니, 이창기 기자) 그리고 세월호.     ©연두

 

▲ 신혜원 작가의 동지가 그린 그림. '새순'은 신혜원 작가의 대학시절 별명이었다.     ©채수정

 

3. 국민주권연대 추도사

 

애석하고 비통합니다.

 

밝은 얼굴로 동지들을 반겨주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이리도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신혜원동지는 그림공장 활동에 이어 베란다항해를 만들고 자신이 가진 예술적 재량과 함께하는 동지들의 재량을 조국을 위해 바치고자 헌신적으로 살았습니다.

 

동지는 자주민주통일에 대한 고귀한 뜻과 뜨거운 지향을 가지고 살았던 동지였습니다.

 

조직가로서 능력, 예술가로서의 재량을 보여준 동지를 잃은 것은 우리의 큰 아픔이고, 진보운동의 큰 손실입니다.

 

우리는 신혜원동지의 뜻을 이어 굴함없이 자주민주통일의 길로 전진하겠습니다.

 

동지의 염원이 담긴 민들레를 더욱 강화하고 동지의 몫까지 온 넋을 다해 투쟁하겠습니다.  

 

동지의 심장은 비록 멈추었지만 동지는 우리와 함께 자주민주통일의 길에 언제나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민주통일 승리와 더불어 동지를 영원히 추억할 것입니다. 

 

2021년 3월 22일

국민주권연대

 

<관련기사>

[부고] 진보통일 예술인 신혜원 작가 운명 (http://www.jajusibo.com/54871)

 

[추모시] “원, 그대는”, “붓의 항해”... 신혜원 작가를 그리며 (http://www.jajusibo.com/54875)

  

“신혜원처럼 타협 없는 예술투사들이 되겠다” 추모의 밤 열려 (http://www.jajusibo.com/54891)

 

신혜원 작가의 자주민주통일 세상을 향한 신념을 늘 기억하겠다 (http://www.jajusibo.com/54931)

 

[신혜원의 그려주는 인터뷰] 5. 김맹구 대진연 문예위원장 (http://www.jajusibo.com/48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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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원의 그려주는 인터뷰] 1. 김나현 청년미래교육원 교원 (http://www.jajusibo.com/45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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