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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 꺼지지 않게”...故이선호 친구들의 간절한 바람

친구들이 기억하는 개구쟁이 선호...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남 일 아니란 걸 알았다”

이승훈 기자 
발행2021-05-07 21:55:39 수정2021-05-07 21:55:39
고 이선호 씨의 빈소ⓒ민중의소리
 

“이 향이 꺼지지 않아야…”

7일, 故 이선호(23) 씨의 빈소에서 만난 선호 씨 친구들은 필사적이었다. 밥을 먹다가도 향이 꺼질까 봐 뛰어가서 향을 피웠고, 새벽 3~4시에 잠들어서 향을 피우지 못할까 봐 다들 알람을 맞췄다고 했다.

일터에서 벌어진 선호 씨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선호 씨 아버지는 경찰 참고인 조사와 언론 인터뷰 때문에 정신없었다. 어머니는 아픈 선호 씨 누나의 병간호로 빈소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호 씨 친구 4~5명은 밤새 빈소를 지키며 이 같은 노력을 지난달 22~23일부터 2주 넘게 이어오고 있었다.

선호 씨 친구 배민형(23) 씨는 “평소에는 이런 거 믿지도 않았지만, 인터넷에다 쳐보니 향이 (이승과 고인을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하더라. 혹시라도 그 말이 진짜라면…”이라며 향이 꺼지지 않도록 항상 보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 채종우(23) 씨도 “선호랑 같이 있음을 알려주는 장치라고 생각이 든다”라며 “선호가 정말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 선호가 보고 있었으면 해서, 향만큼은 꺼지지 않게 계속 피우고 있다”라고 말했다.

선호 씨의 친구들은 스물셋의 나이에, 빈소에서 피우는 향의 의미를 깊이 알아버렸다.

 

“우리 나이가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민형 씨 말처럼, 선호 씨 친구들은 항상 뉴스로만 접하던 산재사망사고가 “그냥 남의 일인 줄”만 알았다고. 그래서 “뉴스로 접하긴 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안전이 중시되지 않는 일터에서의 비극적인 사고가 그저 다른 세상의 일이 아니게 됐다고 했다.

선호 씨의 친구들은 또 이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길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갈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고 이선호 씨는 바닥 홈 부분에 남아 있는 나무 잔해를 제거하다가 FRC 날개가 넘어지면서 사고를 당했다.ⓒ대책위 관계자 제공

친구의 죽음으로 세상이 바뀐 청년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었다”
“같은 일 반복되면 안 된다”

항만 하청 일용직 노동자 故 이선호 씨는 지난달 22일 평택항 신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FRC(FR컨테이너, Flat Rack Container) 해체 작업 중 300kg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졌다.

선호 씨는 아버지가 직원으로 일하는 우린인력이란 하청업체를 통해 지난해 초부터 이곳에서 동식물 검역 관련 일을 했다. 선호 씨가 사고를 당한 이날은 처음으로 FR컨테이너 작업에 투입된 날이었다. 원청이라고 할 수 있는 ㈜동방의 관리자가 바뀌고 검역별로 분리 투입되던 인력이 통폐합되면서 동식물 검역만 하던 선호 씨가 FR컨테이너 작업도 하게 됐다.

하지만 작업 투입 전 안전 교육은 없었고, 중장비를 다루는 위험 작업 현장에 반드시 필요한 안전 관리자 및 신호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업 순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안전핀 제거 상황에서는 절대 FR컨테이너 안쪽으로 들어가면 안 되지만, 선호 씨는 컨테이너 날개가 접히는 안쪽에서 나무 합판 조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대편 날개 쪽에 있던 지게차 기사가 선호 씨의 상황을 보지 못했는지 컨테이너 날개를 접는 작업을 진행했다. 반대편 날개가 접히면서 발생한 진동으로 안전핀이 제거된 선호 씨 쪽 날개도 함께 접혔다. 300kg의 묵중한 컨테이너 날개가 선호 씨를 덮쳤다.

‘故 이선호군 산재사망사고 대책위원회’와 유족은 현장에 있던 동료의 진술을 근거로 원청 직원의 지시가 있었기에 선호 씨가 컨테이너 안쪽에서 합판 잔해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봤다. 반면, 원청 측은 지시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시가 있었거나 없었거나, 안전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선호 씨 친구들은 이 같은 비보(悲報)를 믿지 않았다. 서로 짓궂게 장난도 치던 사이라, 종우 씨도 민형 씨도 “병문안 오라고 장난치는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비보는 사실이었다.

민형 씨는 “이런 (일터에서의 산재사망사고 관련) 뉴스 많이 나오지 않나.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평소에 관심 없었다. 우리 나이가 죽음을 상상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고 여긴 듯하다”라며 “저도 공장 등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이 있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라고 털어놨다. 이어 “(안전에 관한) 이런 사소한 규칙들을 저도 무시하면서 살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지켜야 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선호 씨 친구 김벼리(23) 씨와 서현진(23) 씨도 같은 생각이었다. 벼리 씨는 “산재사고 뉴스를 많이 보고,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제 친구에게 이런 일이 발생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라며 “산재사고라고 하면 화가 나고 언제까지 이래야하나 하는 막연한 분노가 일었다면, (막상 친구가 당하니) 그 (사고) 장면과 친구의 얼굴이 계속 생각나서 힘들다”라고 토로했다. 현진 씨도 “사실 제 일이 아니라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라며 “그런데 친구가 이렇게 되니, 무섭다”라고 했다.

종우 씨도 “마냥 남 얘기인 줄 알았다”라며 “친한 친구가 당하니까 이게 남 일이 아니구나, 누군가의 친구·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구나 싶었다. 당황도 많이 했고, 믿기지도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종우 씨는 “그러다가 마음이 좀 진정되니까. 다른 선호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피해자가 제발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그런 마음으로 빈소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라고 말했다. 현진 씨도 “같은 일이 또 반복되면 너무 슬플 것 같다”라며 다시 친구가 겪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힘줘 말했다.

민형 씨, 종우 씨, 벼리 씨, 현진 씨에게 선호 씨는 항상 웃음을 주는 친구였다.

종우 씨는 “선호가 사진을 보면 험상궂게 생기긴 했는데, 내면이 정말 순수하고 어린아이 같아서 닮고 싶었던 친구”라며 “항상 주변 친구들을 웃게 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선호 씨를 생각하면 “학교 운동장에서 같이 막춤을 추며 웃고 떠들던 때가 떠오른다”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부반장이었던 선호 씨와 같은 반에서 반장을 맡았던 현진 씨도 “개구쟁이 같아서 애들에게 항상 웃음을 줬다. 반 친구들에게 웃음을 주던 모습이 떠오른다”라고 말했다.

민형 씨에게 선호 씨는 아픈 누나를 생각하며 술자리에서 눈물 흘리던, 불안한 미래를 함께 고민하면서도 “우린 아직 젊다”며 위로하던, 짬뽕을 좋아하던 ‘분위기 메이커’ 친구였다.

그런 친구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친구들은 15일 넘게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민형 씨는 말했다. “만약 제가 죽었어도, 선호가 똑같이 해주지 않았을까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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