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씨가 〈한겨레〉와의 인터뷰 도중 자신이 받은 상과 취득한 자격증을 설명하고 있다. 이우연 기자
‘상관 찌른 여군’ 꼬리표
‘가해자 꼬셨다’는 소문
‘입막음’용 회유와 압박
육군 하사였던 ㄱ씨는 전역한 지 3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군복 입은 중년 남성을 보면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적성인 줄만 알았던 군대에서 제 발로 걸어 나올 수밖에 없게 한 ‘그 사건’ 때문이다. 지난 15일 지역에서 만난 ㄱ씨는 성추행 피해를 신고한 뒤 숨진 공군 이아무개 중사를 보고 과거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그 사건’ 뒤 공황장애 등으로 현재까지 병원에 다니고 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든 버텨서 신고되지 않게 했을 겁니다. 양성평등담당관에게 무슨 피해를 겪었는지 얘기를 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신고 뒤가 더 괴로워서…”
ㄱ씨는 고3 때 우연히 군복 입은 여군을 보고 군인을 동경해 부사관 임관이라는 꿈을 이뤘다. 여군은 일을 못 한다는 편견을 깨고 싶어 누구보다 열심히 업무에 매달렸다. 장기복무나 진급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간호조무사, 소방안전관리자, 응급구조사, 한국사, 한자 등 각종 자격증도 땄다.
그러나 1년 뒤 참모로 부대에 전입해 온 ㄴ중령(현재 전역)을 만나고 ‘지옥’이 시작됐다. ㄴ중령은 ㄱ씨의 얼굴에 서류를 던지며 소리친 것을 시작으로 “쓸모없는 XX”, “개XX”, “장기(복무) 못하게 네 (인사)평정을 그어버리겠다”고 수시로 폭언을 했다고 한다. 폭언과 괴롭힘은 성희롱과 성추행으로 이어졌다. ㄱ씨는 “그가 악수할 때마다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긁었고, 수시로 팔과 속옷 부근을 쓰다듬었다. 그밖에 다른 일도 많았다”고 잊고 싶은 기억을 다시 꺼냈다.
군인의 꿈을 놓을 수 없었기에 1년 넘게 매일 몰래 울고, 속으로 삭이며 버텼다. 그러나 사건은 공론화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ㄴ중령은 간부 20여명 앞에서 ㄱ씨에게 폭언을 가했다. 욕설과 성희롱에 시달린 ㄱ씨는 공황장애 증상을 느껴 화장실로 도망갔다. 이 장면을 본 한 여군이 양성평등담당관에게 신고했고 사건은 참모장과 사단장에게 보고돼 ㄴ중령은 징계 절차를 밟게 됐다.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금세 무너졌다. ㄱ씨의 피해 신고는 공군 이 중사 사건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피해자·가해자 즉시 분리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피해 신고와 사단장 보고 뒤 가해자가 다른 부대로 전출되는 데 3일이 걸렸다. ㄱ씨는 가해자가 전출 전에 자신을 따로 불러 2시간 동안 달래고 압박했다고 말했다. 당시 ㄱ씨가 녹취한 내용을 보면, 가해자는 “딸 같아서 그랬다. 내가 너한테 그런 감정을 가졌겠냐”, “너가 하사인데 나한테 뭘 할 수 있겠냐. 네 맘대로 한 번 해보라”고 했다.
이후 ㄱ씨는 영문도 모른 채 다른 부대로 전출됐다. 게다가 가해자가 같은 부대로 전출와 같은 건물,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일도 벌어졌다.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은 ㄱ씨는 3개월 동안 10kg이 빠졌다. 양성평등담당관에게도 기댈 수 없었다. “한 번 차 마시러 오라”는 말에 몇차례 면담을 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현역 군인이었던 담당관이 소문을 낼까봐 믿고 말하기 어려웠어요.” 그 사이 ‘상사를 찌른 여군’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ㄱ씨가 가해자를 꼬셨다’는 소문이 부대에 퍼졌다.
가해자는 상급자인 자신의 위치를 활용해 끈질기게 ㄱ씨를 압박했다. ㄱ씨는 가해자가 “모욕과 폭언은 인정한다. 중징계를 받을 수 있는 성희롱만은 빼달라”는 요구를 계속 해왔다고 말한다. 가해자와 가해자의 가족들이 ㄱ씨의 어머니를 찾아와 돈을 내밀며 진술을 바꿔달라고 하거나, 가해자 가족이 당직근무 중인 ㄱ씨를 찾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가해자와 가까운 사이인 준위와 원사가 ㄱ씨를 식사자리로 불러 회유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ㄱ씨는 장기복무심사를 앞두고 전역을 결정했다. ㄱ씨는 전역하고 한참 뒤에야 가해자가 정직 1개월의 중징계를 받은 뒤 항고했고 이후 전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으로부터 사건 처리 관련해 연락은 없었다. 군인사법은 가해자가 징계를 받더라도 피해자가 결과를 통보받을 수 있는 근거가 없다.
ㄱ씨는 전역 뒤 10곳 가까운 정신과 병원과 성폭력상담소를 전전했다. 자살 고위험군이라는 진단까지 받았고 매일 약을 먹어야 잠에 들 수 있었다. 힘든 기억을 꺼내놓은 건 군이 조금이라도 변해, 후배 여군들이 당당하게 군 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그는 이 중사 사건을 계기로 군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양성평등담당관부터 내부자인 군인이 아닌 민간인으로 다 바뀌어야 합니다. 모두가 졸면서 듣는 성폭력 예방 교육도 내실 있게 진행해 성인지 감수성을 높여야 합니다. 원스트라이크 아웃제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요. 오히려 성폭력을 감추려고 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이중사 사건 관련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모습을 보여 여군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선례를 만들어야 합니다.” ㄱ씨는 공군참모총장이 사의를 밝힌 것에 대해서도 “그래선 안 됐다”고 했다. “끝까지 남아서 책임을 져야죠. 게다가 자신이 겪은 일로 참모총장이 물러난다면 여군들이 부담스러워서 신고를 할 수 있을까요.”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99887.html?_fr=mt1#csidx0a476df6aac1cce8cfa81bfe28b7a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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