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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6 07:16l최종 업데이트 21.11.26 07:16l
전두환 사망 이후 그의 역사적 죄악에 대해 많은 언론이 다루고 있다. 전두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미 끝났고,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그의 죄악을 확인해 다시는 이러한 독재자·학살자가 나오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전두환 정권의 가장 큰 죄악인 광주학살에 대해 언론이 관심을 갖는 것은 필요하고 당연하다. 특히 전두환은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사죄를 하지도 않았고, 역사적 진실 규명에 그 어떤 협조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두환의 과오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래서 광주학살 외에도 그의 집권기에 이뤄졌던 수많은 폭정과 인권탄압도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삼청교육대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열사 죽음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 역시 전두환의 역사적 죄악으로서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과 진실이 있다. 그것은 전두환 정권은 '고문공화국'이었고 바로 그 고문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 왜 고문이 많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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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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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형태의 고문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인권탄압 과정에서 자행됐다. 일제는 수많은 고문기법을 개발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친일 경찰들이 독재 정권에서도 그대로 활동하게 됐고 이들의 잔혹한 속성과 각종 고문기술 등은 민주화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데 그대로 활용됐다.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고문은 전두환 정권 이전부터 존재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고문도 매우 악명이 높았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차이는 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대규모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목표물로 삼은 소수세력에 탄압을 집중했다.
그에 비교해서 볼 때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민주화운동이 활성화됐다. 약간 늘어난 정도가 아니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민주화 운동이 양적으로 늘어났고 질적으로 강화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만큼 전두환 정권의 탄압은 정비례로 강화됐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거리에서는 최루탄이 쉴 틈 없이 터뜨렸고,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은밀한 지하에서는 수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을 불법 체포해서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던 것이다. 거리에서는 최루탄, 지하에서는 고문. 전두환 정권은 이렇게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최악의 정권이었다.
고문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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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가 기록한 수기 ‘남영동’을 영화화한 [남영동 1985]에서 김근태의 진술을 토대로 재현된 전기고문 장면 |
ⓒ 민청련동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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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각종 기록 등을 통해서 고문의 실체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안다. 그리고 자신이 고문을 받는 상황을 상상해본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필자도 그런 상상을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는데,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그래서 그때마다 그런 고문을 당하면서도 대의를 위해서 투쟁을 이어간 수 많은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존경심을 더 깊이 갖게 됐다.
고문은 어떤 면에서는 순간의 고통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면이 있다. 고문피해자들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고문피해자 "차라리 나를 죽여라, 죽여!"<br />고문가해자 "여기서는 그냥 죽는 게 오히려 행복한 거야. 그러니 우리가 너를 왜 죽이겠냐.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고 당해봐."
극심한 고통을 견디기 힘든 고문피해자는 오히려 자신을 죽여달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고문가해자는 순간의 고통으로 죽게 하는 것보다 고문을 통해서 심신의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가장 잔혹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피해자는 죽여달라고 애원하고, 가해자는 순간의 죽음보다 더한 고문으로 괴롭히겠다고 조롱하는 상황, 이것이 전두환 정권 시절 우리가 볼 수 없고 몰랐던 지하의 어느 공간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일이다.
고문이 끔찍한 또다른 이유가 있다. 고문 피해는 정신적·신체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전두환 정권의 악행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는 요즘에 고문 피해 문제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고문후유증에 의한 죽음이 대체로 전두환 퇴임 이후에 이뤄졌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피해가 오랜 기간 나타나는 것이다. 그만큼 고문은 한 사람과 그 가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끔찍한 국가테러이자 범죄이다.
대표적인 고문 피해자 송건호, 김근태, 김홍일을 생각하며
사장,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김홍일 전 국회의원(연합뉴스, 민청련동지회,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image-rendering: -webkit-optimize-contrast;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 왼쪽부터 고 송건호 전 <한겨레신문> 사장,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김홍일 전 국회의원(연합뉴스, 민청련동지회,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 오마이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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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전두환 정권이 자행한 고문으로 피해받은 사람들은 매우 많다. 이 글에서 모두를 거론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송건호 선생, 김근태 선생, 김홍일 선생 등 3명의 사례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대표적인 저항언론인인 송건호 선생은 2001년 74세로 타계했다. 송건호 선생은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으로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송건호 선생은 고문후유증으로 1990년대 들어서부터 파킨슨병을 앓게 돼 온몸이 마비되기 시작했고 1997년부터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됐다. 그리고 2001년 타계했다.
김근태 선생은 2011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근태 선생은 민청련 사건으로 체포돼 1985년 9월에 고문을 받았다. 김근태 선생에 대한 고문사실은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의 상징적인 사례이며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다. 김근태 선생은 축농증 치료를 위해 수술이 필요했지만 수술대에 누으면 고문 받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수술을 못할 정도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렸다. 그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도 악화돼 파킨슨병을 앓았고 복합적인 고문후유증에 의해 64세라는 이른 나이에 타계했다.
김홍일 선생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째 아들이다. 김홍일 선생은 2019년 71세로 별세했다. 김홍일 선생은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으로 체포돼 고문당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김홍일 선생에게 그의 아버지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조작된 혐의를 시인하라고 협박하면서 고문을 자행했다. 김홍일 선생은 고문을 받다가 조작된 혐의를 인정하게 될 것이 두려워 자살을 시도했다. 그 이후 각종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던 김홍일 선생은 2000년경부터 파킨슨병을 앓게 됐고 이후 제대로 거동하기조차 힘들어졌다. 세상을 떠나기 10여 년 전부터는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 전두환 정권은 아들에게 고문을 가해 그의 아버지의 죄를 조작하려고 할 정도로 잔인했다.
민주화투쟁은 인권투쟁이다
전두환 정권의 고문은 잔혹했다. 전두환 정권을 '고문공화국'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잔혹한 고문이 광범위하게 자행됐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생을 마감했다. 참으로 끔찍하고 아픈 역사이며 다시는 잊어서는 안 될 전두환 정권의 악행이다.
이러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고문은 학살과 함께 최악의 인권탄압이기 때문이다. 고문을 자행하는 정권은 학살도 서슴지 않는다. 고문만 하고 학살은 하지 않는다거나, 학살만 하고 고문을 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런 면에서 민주화투쟁은 인권투쟁이기도 했다.
11월 25일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인권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서 오랜 기간 노력한 민주화운동가, 우리 국민의 힘으로 탄생한 소중한 기관이 바로 국가인권위원회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되돌아보면서 인권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한번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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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곳에서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25주기였던 2012년 1월 14일 오후 고인이 물고문을 받아 사망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09호 조사실 물고문 현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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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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