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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정부의 '수많은 K'에서 빠진 'K-복지', 이재명은 바꿀까?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ILO 사회복지 협약은 10개, 그러나 한국 정부의 비준은 0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 대해 오해가 많다. 이름에 '노동(Labour)'이 있어 많은 이들이 국제 노동조합 단체가 만드는 기준 같은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9년 창립된 ILO는 전쟁과 혁명의 예방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목적을 갖고 탄생했다.

 

산업평화를 위한 '노동의 조건'

 

전쟁에 승리한 제국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이 1919년 봄 프랑스 파리에 모였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영국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프랑스 수상 조지 클레망소, 이탈리아 수상 빅토리오 올란도가 '빅4(Big Four)'로 불리며 강화회의를 이끌었다. 대만과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아시아 강국으로 떠오르던 일본도 영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전승국 자격으로 5명의 대표단을 보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채택된 베르사유 조약 제13장은 ILO의 역할과 기능을 못 박았다. 전쟁과 혁명이 일어난 이유를 '노동의 조건(conditions of labour)'이 비인간적인 데서 찾았다. 모든 나라에 통용되는 노동 기준을 만들어 산업평화를 실현함으로써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려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열망 속에서 ILO는 태어났다.

 

1919년 가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창립대회에서 ILO 헌장이 채택되었다. 여기서 ILO는 "어느 한 나라에서 인간적인 노동의 조건을 채택하는 데 실패한다면, 이는 다른 나라에서 노동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선언했다.

 

ILO 협약 190개 중 32개만 비준


 

여기서 ILO는 산업평화를 위한 '노동의 조건'으로 △일하는 시간의 규제, △일하는 날과 주의 최대치 설정, △노동 공급의 규제, △실업의 방지, △적절한 생활 임금의 제공, △고용으로 인한 질병과 재해로부터 노동자 보호, △아동과 청소년과 여성의 보호, △노령자와 장애인을 위한 부조, △타국에 취업한 노동자 이익의 보호, △동등한 가치의 일(work of equal value)에 대한 동등한 보수 원칙의 인정, △결사의 자유 원칙의 인정, △직업교육과 기술교육의 조직을 내세웠다.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산하 기관으로 태어났던 ILO는 2차 대전 이후 유엔 산하의 노동문제 전문기관으로 거듭났다. 유엔 기관으로서 ILO의 역할은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에 관한 국제 노동 기준, 즉 국제노동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ILO가 만드는 국제노동법을 협약(Conventions)이라 한다. 지난 백 년 동안 ILO는 모두 190개의 협약을 노사정 3자 합의로 채택했다. 190개 협약은 기본협약(8개), 정부정책 우선협약(4개), 기술협약(178개)의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1991년 12월 ILO에 가입한 이래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협약은 32개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38개 회원국은 물론이거니와 ILO의 187개 회원국 중에서도 비준한 협약의 수가 가장 적은 그룹에 속한다. 특히 경제 규모와 민주화 수준이 비슷한 나라들과 비교할 때는 최하의 그룹으로 분류된다.


 

일과 삶에 직결된 ILO 기술협약


 

ILO협약의 세 가지 범주 중에서 한국의 비준이 가장 열악한 것은 기술협약(Technical Conventions)이다. 기본협약은 8개 중 7개(비준율 88%), 정부정책 우선협약은 4개 중 3개(비준율 75%)를 비준했다. 반면 기술협약은 178개 중 22개만(비준율 12%) 비준했다.  

 

기술협약의 범주에는 △직업지도와 직업훈련, △고용보장, △임금의 보호, △일하는 시간의 규제, △야간근무의 규제, △산업안전보건, △사회보장, △모성보호, △사회정책, △이주노동자의 보호 등의 주제와 관련된 협약들이 들어간다.

 

노동자가 생애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에서 일어나는 핵심 문제들인 근무시간, 고용, 직업훈련, 임금, 안전보건, 사회보장, 이주, 모성보호와 관련된 협약들이 모두 기술협약으로 분류된다.

 

기술협약이야말로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겪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개선하는데 필요한 '핵심 협약(core conventions)'임에도 불구하고, 기술협약 178개 가운데 한국 정부가 비준한 협약은 고작 22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와 이낙연 공동위원장이 지난해 12월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국가비전·국민통합위원회 출범식에서 비전·통합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회복지' 협약 10개, 비준 0개


 

지난 12월 2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이낙연 국가비전국민통합위원회 공동위원장과 함께 발표한 '신복지 공약'의 하나로 ILO의 제102호 '사회보장(최저 기준)' 협약 비준을 내세웠다. 이것은 민주당 내부 경선 당시 이낙연 후보의 공약이었다.


 

사회복지와 관련한 ILO 협약은 모두 10개다. 주제별로 보면 사회보장 협약 8개와 사회정책 협약 2개를 노사정 3자 합의로 채택해 놓고 있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기술협약으로 분류되는 사회복지 관련 협약 10개 가운데 한국 정부가 비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사회보장 협약' 비준으로 법정상병수당 도입의 물꼬 터야


 

이재명 후보가 비준하겠다고 공약한 제102호 협약은 ILO가 만든 여러 사회보장 협약들의 토대로 여겨지고 있다. 제102호 협약은 국제기구들이 제정하거나 채택한 국제 기준으로는 유일하게 기초적인 사회보장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협약은 사회보장의 영역을 의료, 상병급여, 실업급여, 노령급여, 산재급여, 가족급여, 모성급여, 장애급여, 유족급여 등의 9가지로 명시한다.


 

지난 6월 ILO의 연차 총회인 국제노동회의는 ILO 기준의 중요한 기둥인 보편적 사회보호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더 많은 회원국이 제102호 협약을 비준하도록 촉구한 바 있다.


 

지난 10월 25일 파라과이 정부가 제102호를 비준하자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은 "이번 비준은 코로나19 감염병 상황에서 이뤄진 것으로 시기적으로 대단히 적절하다"고 평가하면서 "전 세계 인구의 50%가 사회보장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ILO의 사회보장 기준은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 사회보호체제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ILO 협약의 비준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선 입법-후 비준'이다. 입법을 완료하여 제도를 갖춘 다음에야 관련된 국제 조약을 비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대한민국에는 유엔 산하 기구인 ILO가 노사정 3자 합의로 채택한 국제 기준에 걸맞은 사회보장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게 한국과 미국을 제외한 OECD 회원국 대부분이 갖고 있는 법정유급병가(statutory paid sick leave)다.


 

OECD, 법정상병수당 도입을 권고


 

ILO의 사회보장(최저 기준) 제102호 협약이 말하는 상병급여는 유급병가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사용자(고용주)가 노동자의 상병(傷病)에 대한 재정적 책임을 지고 노사가 공동으로 기여한 사회보험이나 정부 재정(조세)을 통해 부상이나 질병으로 일할 수 없게 된 노동자의 소득 손실을 공적으로 부조하는 제도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OECD는 한국의 사회보장 제도가 가진 치명적 결점이라고 지적한다.


 

2018년 OECD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사용자에게 노동자의 상병에 대한 책임을 부과하는 조치와 더불어 현금성 상병혜택, 즉 상병수당과 상병급여를 도입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일본처럼 공적의료보험이나 캐나다처럼 고용보험을 통해 상병급여 같은 현금성 상병 혜택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조세를 통한 국가 재정으로 상병급여 제도를 운영한다.


 

'수많은 K'에 복지의 자리는?


 

문재인 대통령은 3일 신년사에서 "대한민국은 지난 70년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고 자평했다. 문 대통령은 "수많은 케이(K)가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고, K-산업이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는 시대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 "무역 강국", "수출 강국", "군사력 세계 6위", "세계 TOP 10 국가"가 되었다면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연 데 이어 지난해 3만5000달러로 올라섰고 4만 달러 시대를 바라보게 되었다"면서 "K-방역"과 "K-문화"와 "K-산업"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수많은 케이(K) 가운데 사회복지의 자리는 분명치 않다. 코로나19 감염병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겪고 있지만 유급병가와 상병수당은 공무원이나 대기업 노동자만 누리는 '사적 복지제도(private welfare system)'로만 존재할 뿐이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노동시장의 상층부가 기업의 지불능력에 의존하는 '사적 복지'에 집착하고 노동시장의 하층부가 차별에 기반을 둔 '잔여적 복지'에 의존하는 잔인한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ILO가 채택한 사회복지 관련 협약 10개 가운데 하나도 비준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수립되지 못한 '복지 후진국'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과연 차기 정부는 "사회복지 협약 0개"라는 후진적인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사회복지의 최저 기준을 명시한 ILO 제102호 협약을 비준하겠다는 이재명의 공약에 관심이 가는 이유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10314423617295#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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