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헤매는 동안 안철수의 시간이 왔다. 한국갤럽 조사에선 단숨에 15%를 돌파했다. 선거에서 15%는 꽤 큰 의미를 갖는다. 정권교체 단일화 관점에서 보면, 안철수의 두자릿수 지지율은 전략적인 의미를 갖고, 15% 돌파는 흔히 3파전이라 불리는 '대등한'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지만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지지율의 출렁이는 날씨 속에서도 정권교체 구도는 완강하게 유지됐기 때문이다. 이재명의 대척점에 있는 두 개의 꼭짓점이 크게 출렁인 것이다. 이 기간 이재명의 지지율은 대체로 35%~39%의 박스권을 형성했다.
위기의 윤석열이 서둘러 전열을 정비했다. 김종인을 쳐내는 대신 이준석과의 갈등을 봉합했다. 이준석은 당내 여론 악화와 이른바 성상납 파문의 협공을 받았다. “그만 까불어라!” 보이지 않는 검찰의 손이 작동한 것이다. 특수통인 윤석열이 공안통인 권영세를 사무총장에 앉힌 것도 의미심장하다. 특수통과 공안통이 연합한 것이다. 후보사퇴론이 발호하자 재벌2세 그룹이 지원사격에 나선다.
정용진발 '멸콩' 해프닝이 과연 우연일까. '사퇴하지 마라. 우리가 있다'는 신호 아니었을까? 너무나 시대착오적이라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비판과 자제 목소리가 나오는 '멸콩' 릴레이는 3만불 시대의 대통령선거를 무려 3천불 시대로 되돌린 선거사상 최악의 반동적 블랙코미디로 기록될 것이다.
어찌됐건, 안철수의 시간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지지율 15%에 호감도 1위까지 기록한 안철수 상승세는 언뜻 보면 알차게 보인다. 하지만 다른 조사에서 안철수를 계속 지지할 것이라는 응답은 고작 40%대에 머물고 있다. 매우 취약하다는 뜻이다. 독립재가 아니라 대체재라는 뜻이다. 이는 안철수를 과소평가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에 부합한다. 하지만 말실수를 일상화한 윤석열이 언제든 추락할 가능성이 있는 한 안철수의 급부상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특히 전략을 다루는 사람은 안철수의 시간이 만들어낼 최선의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안철수는 대선 삼수생이다. 참고로 윤석열은 현역이고, 이재명은 재수생이며, 심상정은 사수생이다. 기억이 흐릿할 것 같아 덧붙이면, 심상정은 2007년 당내 경선에서 노회찬을 이기고 권영길과 결선투표에 올랐다가 졌다. 2012년에는 진보정당에서 이정희와 함께 출격했으나 문재인 당선을 위해 후보를 사퇴했고, 2017년에 첫 완주에 나서 6%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삼수생 안철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최근의 안철수는 예전보다 훨씬 능숙해졌다. 삼수생이라는 뜻은 2012년처럼 단일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사퇴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유치원 공공성이 부각될 때 사립유치원장협의회를 방문해 스스로를 훼손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많은 사람들이 TV토론의 악몽을 떠올리겠지만, 삼수생 안철수는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로서 안철수의 시간은 중립적이다. 어디로 향할지 장담할 수 없다. 또한 안철수의 시간은 상대적이다. 변수가 상수를 압도한다. 최근 넷플릭스에 <나는 사랑과 시간과 죽음을 만났다>라는 영화가 올라왔다. 윌 스미스, 에드워드 노튼, 키이라 나이틀리 등 초호화 배역이 출연하는 영화다. 딸의 죽음 뒤에 3년 넘게 방황하고 있는 윌 스미스를 치유하기 위해 사랑과 시간과 죽음이라는 캐릭터를 가진 배우를 만들어 윌 스미스와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사랑과 죽음을 잇는 브릿지'로 정의된다.
안철수의 레토릭과 상관없이 안철수의 시간은 단일화를 지향한다. 지지율의 형성 자체가 단일화 방향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스를 확률은 적다. 현단계에서 이재명과의 단일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윤석열과의 단일화 과정도 매우 험난할 것이다. 일부 조사에서 안철수가 단일화 경쟁력이 더 높은 것으로 나오지만, 일단 협상이 시작되면 조직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국민의당은 체력과 화력 측면에서 국민의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후보를 전제로 '막가파식' 단일화 협상을 시작할 것이고, 파행과 결렬을 반복하면서 불가피하게 큰 상처를 남길 것이다. 오세훈과의 단일화 패배 기억도 아프게 남아 있다.
2002년 11월 11일 조사에서 이화창은 36%, 노무현은 22.1%, 정몽준는 22.8%였다. 3파전 필승국면이었다. 이회창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이회창 캠프의 핵심 열에 일곱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불발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책사였던 윤여준 의원이 단일화 변수를 걱정하자 이회창은 특유의 말투로 “윤의원, 단일화!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잘라 말했다. 재벌과 빈농의 아들이 어떻게 단일화를 하느냐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이회창 진영은 대통령이 다 된 것처럼 방심했고, 디제이피 연합의 역사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당시에도 지지율에 밀리던 노무현이 정몽준의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는 통큰 결단으로 단일화를 이겼다. 단일화 직후 조사에서 노무현은 41.1%를 기록하며 37.6%를 기록한 이회창을 처음 앞서기 시작한다.
지지율의 힘보다 조직의 힘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 단일화의 방정식이다. 이것이 안철수의 시간이 가진 최대의 딜레마다. 심지어 지금 이재명은 이회창과 달리 단일화를 전제로 선거전략을 짤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조직은 절대적으로 열세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안철수는 삼수생이고, 직전 선거의 실패 경험도 갖고 있다. 안철수가 최소한의 협상력을 가지려면 설 전에 3파전 구도에서 윤석열을 이기는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안철수라면 모든 것을 걸고 명실상부 최고의 단일화 협상팀을 만들 것이다.
안철수의 시간엔 단일화를 둘러싼 여러 경우의 수들이 형성된다.
첫째,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 심상정 4파전으로 치러질 경우, 이재명 당선가능성이 매우 높다.
둘째, 윤석열로 단일화될 경우, 승부는 오차범위 내 접전이 될 것이지만 정권교체 가능성이 좀 더 높다.
셋째, 안철수로 단일화될 경우, 안철수가 제법 큰 격차로 이길 것이다.
넷째,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재명과 안철수가 단일화 할 경우, 이재명이 당선될 것이다.
이재명의 입장에서 안철수의 시간에 대처할 방법은 무엇인가? 경우의 수로 볼 때 이재명은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재명의 통제범위에 있지 않다. 적어도 단일화 과정에 더 많은 상처를 입힐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전략적으로 안철수에 대한 과소평가나 조롱의 분위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섬세하고도 냉정한 전략적 대응을 해야 한다. '단일화 대응 TFT' 같은 걸 만드는 것이 좋겠다.
또한 현재로선 가장 확률이 높은 둘째 가능성, 즉 윤석열로 단일화될 경우를 대비한 필승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재명 측에서 정권교체와 정권재창출 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이미 형성된 구도를 바꾸려고 하면, 상대의 프레임에 말려들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아진다. 이것보다는 2030을 비롯한 중도층에게 형성돼 있는 '기득권 대 국민' 프레임을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해야 한다.
무엇을 하는 것보다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이재명을 찍고 싶지만 민주당의 기득권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들을 공략해야 한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은 김종필과의 연합이라는 이른바 '대연정' 프레임으로 간신히 이겼다. 그것만으로 이긴 것도 아니다. 당시 권노갑, 한화갑 등 김대중의 핵심 측근 7명이 '임명직 포기선언'을 함으로써 중도층을 안심시킨 사례가 있다. 이재명이 민주당 정권이 형성한 기득권 내로남불 프레임을 넘어서려면 최소한의 안전조치가 필요하다. 가령 586 운동권 핵심들의 임명직 포기선언 같은 가시적 조치가 필요한 셈이다. 중도층에게 '적어도 이재명 정권에서 586 운동권들이 설치는 일은 없겠구나'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당사자들은 가혹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재명의 승리를 위해 이 정도 헌신은 기본으로 해야 한다. 정계은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안철수의 시간에 심상정은 고사 위기에 처했다. 지지율 하락을 넘어 존재감마저 잃어가고 있다. 심상정은 지금 정책을 말할 때가 아니라 정의당의 존재 이유, 심상정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진보정당의 후보라는 이유만으로 도전자가 되지는 않는다.
정의당이 가진 낡은 운동권 이미지와 심상정이 가진 기득권 이미지를 넘어서야 한다. 승리가 아니라 필요를 증명해야 한다.
4등이 1등처럼 하면 망한다. 4등의 전략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진보란 무엇인가?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진보는 언제나, 계산하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정의당이, 심상정이 노동의 깃발을 흔들며 민노총과 한노총을 오갈 때, 그들을 약자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이미 기득권이 돼버린 양대노총에 의존하는 한 진보의 이미지를 전취할 가능성은 없다. 심지어 대전환의 시대 아닌가?
또 이재명은 민주당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인물이다. 노동, 경제, 복지 등 대부분의 정책에서 이재명은 심상정의 정책을 무력화할 수 있다. 나아가 이재명은 빈민 출신의 후보다. 반기득권 이미지도 갖고 있고 약자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도 있다. 최근의 행보를 볼 때 캠페인 학습능력도 매우 뛰어나다.
심상정의 유일한 가능성은 2030 여성뿐 아니라 4050 여성에게서 높은 호감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심상정의 핵심 전략은 대중의 관심이 높고, 이재명과 확실히 차별화할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 메시지의 전파 속도는 대중의 관심에 비례한다. 윤석열이 여가부 폐지를 들고 나왔을 때 심상정은 오롯이 여기에 전선을 쳐야 한다. 이준석의 반여성적 백래시를 타격하지 않고 이른바 '진보'라는 이름을 아로새길 수 있는가? 세계 선거 역사에서 이번 대선 같은 반여성적 캠페인을 본 적이 있나?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마저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한 과거를 잊었나? 하지만 정의당의 전통주의자들은 이재명이 더 강할지도 모르는(적어도 국민들이 그렇게 인식할 가능성이 높은) 노동과 복지만 반복해서 주장하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소거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 진보가 해결해야 할 핵심적 시대정신은 다름아닌 '다원적 민주주의 시대'를 앞장서서 개척하는 것이다.
이번 대선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국민소득 3만불 시대에 치러지는 첫 번째 선거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에 진입했다. 그렇다면 진짜 선진국이란 어떤 모습인가? 심상정의 주4일제 공약이나 이재명의 탈모 건보 공약이 왜 화제가 되는가? 안철수의 연금개혁 공약은 중도층의 신뢰를 얻는다. 모병제는 또 어떤가? 2만불 시대가 아니라 3만불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다.
윤석열은 주 120시간 발언으로 1만불 시대로 퇴행하더니, 멸콩 해프닝으로 3천불 선사시대까지 찍었다. 민주당은 2만불 시대의 초입에 멈춰섰으며, 이재명은 특유의 감각으로 가끔씩 3만불 시대를 흡수하고 있다. 안철수는 3만불 시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지만, 보수 지지표 감옥에 갇혔다. 심상정의 머리는 3만불 시대를 이해하지만 몸은 2만불 시대에 묶여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가려면 다원주의적 가치로 무장하고, 기후위기 대응을 선도적이고 전면적으로 감행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우린 망했다!"고 결론적으로 얘기하는, 현대사를 통틀어 처음으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로 살아갈 것이 확실시되는 2030 세대의 절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을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공감하는 길은 이슈나 정책이 아니라 태도에 달려 있다. 누가 진심으로 미래세대의 편에, 약자의 편에 설 것인가? 한국계(아시아계) 미국인의 존재와 절망을 다룬 캐시 박 홍의 책 '마이너 필링스'를 읽고 영감을 얻을 후보가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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