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독립운동 한 사람은 반제민족해방투쟁이어야 돼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통일뉴스]와의 신년 인터뷰 내내 ‘민족’을 강조하다가, 독립운동 대목에 들어가서는 특별히 ‘반제’를 붙이며 이같이 ‘독립운동은 반제민족해방투쟁(운동)’이어야 한다고 정의를 내렸다.
모든 나라의 독립운동이 처음에 한 건 반제국주의이기에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 혹은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반제’가 제일 먼저 들어가는데 우리나라는 독립운동 평가에서 반제가 떨어져 나가버려 “그냥 독립운동, 항일독립운동이 됐다”는 것.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개념이 잘못돼 있기에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임 소장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지난해 말 “여든의 황혼 길에서 제 인생 종합 성적표”인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록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발간했다. 70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에다 12장에서 ‘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이라는 독특하고 인상적인 내용을 담은 것. 그의 삶이 ‘민족과 반제국주의’에 닿아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답게 인터뷰 내내 일관되게 ‘민족’을 강조했다.
그는 민주화 운동 시기, 문학이 다른 학문에 비해 오히려 앞섰다면서 “모든 학문이 아직까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문학은 민족문학을 주장했다”고 상기시켰다. 오죽하면 민족문학은 6.25 이후로 ‘빨갱이문학’이라고 금지 당했는데도 몇 년 만에 회생할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고 질기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케이팝(K팝), 케이문화(K문화) 등 한류가 일어난 원인이 리얼리즘과 민족문학, 참여문학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리얼리즘과 민족문학, 참여문학에서 응용이 이뤄져서 영화, 그림, 드라마, 노래대로 다 발전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한 예로 케이팝의 가사를 보면 “리얼리즘 문학파들이 주장했던 사회비판적인 가사”라는 것이다.
2007년 ‘민족문학작가회의’가 20년간 사용해오던 단체 명칭에서 ‘민족’을 빼고 ‘한국작가회의’로 개칭한 것에 대해 그는 당시 개칭을 반대했는데 소수였다면서 아쉬워했다. 그는 우리 민족이 항상 외부에 당해왔기 때문에 민족을 내세워야 일체감이 든다고 밝혔다. 한국문학, 남북한문학, 겨레문학으로는 일체감이 안 들고 꼭 민족문학이라고 해야 일체감이 든다면서, 민족문학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최근 문학인에 대해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소설가, 평론가라고 하면 사회와 역사, 정치 평론을 겸할 수 있을 정도로 안목은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문학인들은 사회를 파악할 능력이 없다는 것. 지식인 자격을 잃은 문학인이기에 ‘기술로서 문예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로서 ‘민족’을 강조해서 그런가, 그는 그 ‘민족’ 때문에 사회활동가, 실천가로 다시 태어난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반체제 지하조직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한 것. 한때 자신이 속했던 남민전 최고책임자인 이재문에 대해서 “대단히 신중하고 훌륭”했으며, “큰일을 낼 사람”이었고, 신뢰가 가는 “그 당시의 투사”였는데, 단 하나 남민전 조직 기록을 갖고 있다가 검거된 것을 지적하며 “그것만 없었으면 완벽한 투사였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현안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북미관계가 근본적으로 풀리고 있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단호히 “미국의 책임”이라고 못박았다. 미국이 북한과 회담하기 전에 핵 문제를 먼저 꺼내는 건 대화를 안 하겠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는 주한미군 문제와 관련 “우리가 아무리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갈 사람들이고 자기들이 볼 일 없으면 우리가 바지를 잡고 ‘가시리 가시리잇고’ 노래를 불러도 갈 사람들”이라고 아주 명쾌히 짚었다.
최대 현안인 대통령 선거와 관련 그는 각 후보들이 속한 세력과 정당의 과거를 먼저 봐야지 인물 하나면 봐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아울러, 청년세대-엠지(MZ)세대에 대해서도 단호히 ‘젊다고 다 올바르거나 진보이지 않’으며 ‘진보 세력들도 너무나 꼴통화 되고 있다’면서 “진보도 타락하면 꼴통이 되고 보수도 개혁하면 진보가 된다”는 금언을 남겼다.
참고로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과 관련 은연중에 세 가지를 긍정 평가했다.
첫째는 민주화 운동 시기 지식인 중에서 비문학도라도 민주화 운동 하던 사람들은 다 문학에서 눈을 뜰 정도로 문학이 다른 학문에 비해 앞섰다면서, 그런 문학을 택한 게 “참 좋은 노선을 선택했다”고 자평했다. 둘째로 자신의 장래 및 직업과 관련해 정치가나 관료 되는 건 아예 선을 그어놓고 안 들어간 것에 대해 “능력 밖”이라면서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역시 긍정 평가를 했다. 마지막으로 체포와 죽음을 불사한 남민전 산하조직인 ‘민주투쟁국민위원회’ 성원이 된 것에 대해서도 “정말로 한번 해보고 싶었다”면서 결기를 드러냈다.
이처럼 그는 삶의 계기마다 택한 직업, 노선, 투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 인간이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세 부분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삶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기에 그의 삶의 총체가 지금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현재화된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현역으로 민족문제연구소에 속해 있으면서 그 노선에 맞게 투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임헌영 소장과의 신년 인터뷰는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와 이승현 기자가 배석한 가운데 1월 17일 민족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편집자 주
“징역살이하면서 건강 비법 터득했다”
□ 이계환 기자 : 오늘 [통일뉴스] 신년 인터뷰에 문학평론가이자 사회활동가이신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 임헌영 소장 : 안녕하십니까. 임헌영입니다.
□ 지난해 말에 선생님께서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록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발간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책에 대해 ‘나는 문학으로 역사를 성찰하고 또 역사를 문학으로 조명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 책을 봤는데 제 소감은 뭐냐 하면은 문자 그대로 ‘문학의 길을 통해 갔더니 역사의 광경이 나섰다’고 쉽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 예. 멋집니다.
□ 저자의 그 문학적 삶을 제가 쫓아갔더니 갑자기 정치, 사회, 국제, 정세 등이 어우러진 역사의 광장, 역사의 현실과 마주친 기분이었습니다. 전자가 문학평론가로서의 삶이라면 후자는 사회활동가로서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인터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서, 하나는 선생님의 문학평론가로서의 부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사회활동가로서의 부분 이렇게 나눠볼까 합니다.
■ 예 좋습니다.
□ 먼저 문학평론가로서의 부분을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 연세가 80살이 넘은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 비교적 내 연배에서는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고 운전도 하고 그래요.
□ 그렇습니까.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이 책을 보니까 700쪽이 넘어요. 그런데 이 정도 두께의 책이라면 이제 대답은 하셨지만 어쨌든 그 과정이 지나가는 과정이었는데, 건강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아무튼 건강하시니까 썼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평소에 건강을 어떻게 유지하십니까?
■ 저는 징역살이하면서 건강 비법을 터득했습니다. 불교요가 입문을(인도요가가 아니라 불교요가에요), 그걸 쓴 분이 일본의 스님인데 그 스님이 굉장히 진보적인 사람이에요. 진보적인 사람이니까 역시 책을 잘 써요. 그래서 사진까지 다 넣어가지고 자세를 아주 자세히 설명했는데 그야말로 동양의 선과 같은 걸 한 겁니다. 그 몸 체조를, 내가 연구를 해보니까 우리 국민체조, 순서가 시작도 숨 쉬고 마지막도 숨 쉬기이거든요. 그 요가 원리를 가만히 보니까 국민보건체조가 보통이 아니에요. 요가 체조 그대로입니다. 그 순서 그대로예요.
□ 그때도 뭔가 아는 사람이 만들었을 수도 있겠네요.
■ 그런 것 같아요. 원래 이 국민보건체조라는 거는 미국에서 처음에 라디오 체조로 나왔답니다. 라디오에 나오는데 일본의 우체부 직원, 우리식으로 말하면 체신부 직원이라고 있잖아요. 그때 일본에서 체신부가 국민 보험을 취급했어요. 그 직원이 그걸 연구하러 미국에 갔다가 우연히 그 라디오 체조를 본 거예요. 그런데 미국은 뭐냐 하면 생명보험회사에서 그걸 보급하고 있었거든요.
그걸 일본에서 먼저 도입해가지고 우리나라로, 그때는 식민지 시대니까 우리나라로 와가지고 우리나라에서 자기들이 국민보건체조 이렇게 이름을 붙여가지고 한 것이거든요.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장에서 그걸 했잖아요. 그걸 더 깊고 더 철저히 하는 게 단전 요가 기본체조예요.
□ 그럼 아주 어렵지는 않겠네요.
■ 안 어렵죠. 국민보건체조 하고 요가 하고 거의 같은 순서예요. 사실 철학이라는 게 참 무서워요. 시원은 인도인데 결국은 중국을 거쳐서 온 건데 서양에서는 어떻게 그걸 알고 또 딱 맞춰 보니까 (체조랑) 똑같아요. 그래서 단전 요가를 했는데, 참 좋아요.
□ 그 체조의 효과는 선생님께서 직접 하셔서 건강하시니까 증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 그렇죠. 정말 좋아요.
□ 이 책이 대화록으로 되어 있거든요. 선생님께서 기록자였던 2005년 리영희 선생님의 『대화』 이것도 대화록이었거든요. 또 2020년에 나온 김정남 전 문민정부 교문수석의 『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도 대화록이었습니다. 본인이 직접 쓰는 자서전보다 상대방과 대화를 통한 자전적 기록에 어떤 장점이 있는지, 그쪽을 택하셨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리영희 선생 『대화』를 할 때 ‘아 나도 언젠가는 저 주인공이 돼 봐야 되겠다’는 생각. 리영희 선생을 제가 그리면서 나도 이제 주인공이 돼 봐야지 하는데 마침 또 이제 제가 쓸려고 보니까 너무 벅차요. 말로 하면 편하겠다 싶어, 그래서 해보니까 참 편하고. 또 이게 글로 쓰기보다는 더 쉬워요. 독자들에게 다가가기가.
□ 논리적으로 꽉 이어지지 않아도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 같아요.
■ 그래서 이제 『대화』를 하자고 그랬는데 마침 한길사에서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대담자인) 유성호 교수가 ‘좋다’고 의욕을 갖고 해주고 그래서 삼박자가 다 맞아진 거죠. 실제로 대담한 거는 한 서너 달이고 그 뒤에 정리하는데 2배 정도 해서 1년 걸렸어요.
□ 그래도 상당하네요. 선생님께서는 평론가로 등장하기 전부터 카프 문학에 대한 애정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석사논문에도 카프문학을 다루려고 그랬는데 빠진 것 같기도 하고, 또 해금되기 전부터 납북자, 월북자 작가에도 관심이 많았고 또 『문학과 이데올로기』라는 평론집도 쓰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젊었을 때부터 이념 문제에 관심이 꽤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 대구 ‘10월항쟁’부터 집안에 삼촌들 이런 분들이 계속 징역살이하고 나오고 그런데다가 6.25를 겪으면서 아버지와 삼촌은 희생되고 그 다음에 나머지 삼촌들 하고 우리 형님은 월북하고... 이렇게 되니까 그때 우리 집안은 참 울음바다였어요. 소년시절에 그런 걸 겪으니까 잊혀지지가 않아요.
이런 원인이 뭐냐. 그건 결국 이데올로기에요. 그래서 이대로 하다 보니까 정치적인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미국이 어떻게 했냐는 것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일찍부터 그냥 그게 본능이 돼버렸습니다.
문학을 하려고 보니까 그게 카프 문학이에요. 월북했으니까요. 일제 때 식민지에서 문학을 한 작가들, 내가 보기에는 훌륭한 문학자들이 다 가버렸어요. 그래서 자료를 다 모았죠. 지금도 우리 집에 가면 그때 우리나라에서 소개도 안 됐던 그런 걸 제가 손으로 다 찾아가지고 정리했던 파일이 다 있어요. 그만큼 저한텐 대학·대학원은 완전히 그런 거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 그런데 비슷한 처지라 하더라도 이문열 씨와 같은 작가의 경우는 부친이 월북했는데, 그 분은 또 선생님과는 다른 길로 가는 것 같은데요. 아무튼 사람마다 경험에서 느끼는 것이 다르지 않나하는 생각도 드네요.
■ 다른 길로 간 분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분들하고는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연대감을 느껴요. 이문구라든가, 김성동이라든가,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이문열 씨 같은 경우는 그래도 만나면 뭔가 동질감을 느끼죠. 아마 이문열 씨도 저한테 그럴 거예요. 이념의 문제이기보다는 우선은 핏줄 문제고 그게 결국은 이 분단 사회에서 처한 입장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지겠죠.
“한류가 일어난 것은 민족문학과 참여문학 덕분”
□ 평론가로서 문학적으로 참여문학, 리얼리즘을 옹호하셨습니다. 한국사회의 현실 및 진로와 관련해서 아마 그렇게 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회 변화 및 사회 진보와 관련해서 참여문학과 리얼리즘의 긍정적인 역할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 참여문학과 리얼리즘 문학을 빼놓으면 민주화운동이 불완전해졌을 겁니다. 그러니까 문학이 그때는 오히려 제일 앞섰어요. 다른 모든 학문이 아직까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문학은 민족문학을 주장했죠. 일찍부터. 8.15직후부터 하다가 6.25 이후로 완전히 민족문학은 ‘빨갱이문학’이라고 금지 당했는데도 금방 몇 년 만에 살아났잖아요.
그게 이제 참여문학이 되고 리얼리즘이 되고 민족문학이 되고 민중문학, 노동자·농민문학이 됐지요. 그때 그 당시 지식인 중에서 비문학도라도 민주화운동 하던 사람들은 다 문학에서 눈을 떴습니다. 그만큼 문학이 앞섰죠. 그 점에서 난 참 좋은 노선을 선택했다고 봐요.
□ ‘문학의 시대’, ‘문학의 전성기’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였지 않나 싶네요. 문학을 통해 사람들이 각성됐지요.
■ 80년대까지는 문학이 아주 막강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습니까. 책에 보니까 구속되었다가 징역에서 일본 작가의 유미주의 소설에 푹 빠진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흥미 있게 봤는데, 참여문학과 리얼리즘 문학을 옹호하는 입장에 선 선생님께서 유미주의 소설 탐독을 하다니... 에피소드나 일탈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워낙 진지하게 말씀하셔요. 일탈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진지하게 삶의 일깨움을 받은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아직도 그렇습니까.
■ 저는 그 이전에는 사실 그런 작품을 좀 뭐라 그럴까, 많이 보려고 하지도 않고 멀리 하거나 아니면 보더라도 비판하려고 보는 거였어요. 그런데 겨울에 추운데 있으니까 말이죠. 읽을거리는 없는데 웬만한 책은 다 마음에 안 들어요. 위로가 안 돼요. 근데 그걸 보니까. 그 아름다움의 절대세계. 참 황홀한 경지였어요. 그래서 유미주의라는 게 거기에 빠진 사람들은 이래서 빠지는구나, 이해를 했죠.
그러나 제가 빠지진 않고, 다만 여기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논리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된 거죠. 그 뒤에는 유미주의에 대해서 저도 전혀 무시하지 않고 한 유파로 그냥 인정해 주는 계기가 됐죠.
□ 더욱 넓어진 계기가 되었던 것이군요.
■ 제 문학관을 좀 넓혔지요. 오히려 이런 기법을 리얼리즘 문학도 도입해서 배워야 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렇게 하면 오히려 리얼리즘 독자들이 훨씬 넓어지고 공감대도 좋아지고...
□ 징역에서도 그런 일탈 같은 데서 긍정적인 요소를 배운 것이 깊게 느껴졌습니다. 지금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으로 계십니다. 그 전신이 반민족문제연구소이고 그 반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문학론』을 쓴 임종국 선생의 유지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아직 우리 사회에서 친일 문제가 청산되지 않았고 또 친일문학도 잔재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친일파를 두고도 ‘공이 과보다 크다’고 하면서 넘기려고 하고 또 친일작가에 대해서도 ‘문학 작품과 삶은 별개의 영역이다’, 이렇게 치부하면서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친일문학을 한 김동인을 딴 ‘동인문학상’도 아직 건재합니다. 한국사회에 이런 현상이 많은데 어떻게 봐야 합니까?
■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계문학사에서 자기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은 그런 지식인이나 문학인이 막 이렇게 큰 소리 내는 것은 아주 희귀한 경우에요. 우리나라는 참 희귀해요. 그 얘기는 나중에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또 나오겠지만 어쨌거나 임종국 선생이 『친일문학론』을 내면서 상대적으로 출세도 못하고 고생을 하시다 돌아가셨죠.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만든 게 저희 연구소이죠. 임종국 선생은 파볼수록 더 위대해져요.
친일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말하자면, 때를 놓치면 다 이렇게 힘이 드는 것 같아요. 8.15때 했으면 깨끗이 끝나는 건데 그걸 놓치니까, 처음에는 친일파들이 가만히 있다가 한국전쟁 후부터는 자기들이 도로 애국자로 행세하고 독립운동가를 완전히 빨갱이로 몰아버려서, 이 분들이 다 고생을 했지 않습니까. 독립운동가가 감시받고 탄압받았어요. 그런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친일파들은 이제 그냥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큰 소리 치면서 도리어 감시자가 되었으니 일제 때와 똑같아요.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조문기 선생은 “해방된 거는 우리 민족이 아니라 친일파”라고 하셨는데, 너무 명언이에요.
친일파가 그전에는 일본의 지시를 받고 했는데, 8.15 이후에는 스스로 권력을 잡아가지고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을 감시하고 집어넣고 탄압하고 이랬단 말이에요.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고... 그러니까 지금까지 와버린 거죠. 그동안 진행된 국민운동으로 인해 친일파 청산이라는 게 압도적인 다수의 국민적 찬성을 받고 있지만, 집권층은 안 그래요. 집권층은 오히려 궁지에 몰리니까 악을 쓰는 거예요.
‘식민지시대에 우리나라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때 잘살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까지 나오고 그 비호를 받으면서 지금의 야당세력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치신조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엄정히 말하면 한국의 정치인이 아니죠. 그건 일본과 미국을 위한 정치인이지 우리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 아닙니다.
동인문학상 보세요. [조선일보]가 하거든요. 이제 다른 중앙언론사에서 하는 친일파 문인들의 이름을 딴 문학상은 다 없어지고 이거 하나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걸 우리 연구소가 앞장서서 없애기 위해 작년에도 시위를 했어요. 저는 염려하는 것이 지금 젊은 세대들과 대학생들이 아주 오랫동안 식민의식에 젖은 교수들 밑에서 배우고 미 제국주의 문화에 너무 빠져 있다는 거예요.
제국주의는 그냥 문화만이 아니라 노래부터 생활습관 음식문화까지 다 바꿉니다. 젊은이들 입맛까지 다 바꾸고... 우리나라 방송에서 미국노래가 더 많이 나오잖아요. 술을 바꾸고 노래를 바꾸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일본이 쳐들어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술을 바꾼 거래요. 그 다음에 유행가를 바꿨어요. 그러니까 술과 노래가 중요한 겁니다.
젊은 세대들이 여간 정신을 안 차려서는 안 됩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는 문화혁명이 일어나야 돼요. 이거 안 일어나면 정치개혁이 항상 실패합니다. 광화문에서 성조기 들고 시위를 할 정도로 세계에서 미 제국주의 문화가 가장 깊이 뿌리내린 나라가 우리나라 같아요. 참 큰일이에요. 젊은 세대의 교육을 위해 한국사 시간을 더 늘리고 모든 고시에도 포함시키고 해야 합니다.
□ 일본 제국주의와 미 제국주의 문화가 지난 100년 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그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앞으로 우리의 과제가 되겠지요.
■ 이거 엄청 큰 문제입니다. 굉장히 어려워요. 경제개혁은 정치를 잘하면 한 세대 만에도 많이 바꿔집니다. 미국도 부자나라가 된 게 얼마 안 됩니다. 정치개혁이나 경제개혁은 그렇게 되지만 문화혁명은 안 그래요. 적어도 3대까지는 가야 문화혁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인들이 식민지 시대와 6.25를 겪고 나서는 미 제국주의 문화에 완전히 세뇌 정도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들어있지 않습니까. 중간에 공부 좀 한 민주화 운동 세대들이 나오면서 이제 좀 고쳐지나 싶었는데, 그 뒷세대들이 또 노인들하고 똑같이 돼버리죠. 하도 제국주의 문화가 세게 나와 영향을 주니까 그렇게 된 거겠죠. 올바른 민주화 정착이 힘들고 남북통일도 지난한 과제라는 생각입니다.
□ 그래도 좀 긍정적인 것은 30년 전보다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 주체문화를 살리고, 또 젊은이들에 의해 세계적인 케이팝(K팝), 케이문화(K문화) 발전도 많이 되는 것 같아요.
■ 긍정적인 면으로 그런 한류가 일어난 원인이, 정부나 문화정책 입안자들이 그걸 알아야 되는데 사실은 그게 리얼리즘과 민족문학, 참여문학 덕분입니다. 거기에서 응용이 이뤄져서 영화, 그림, 드라마, 노래대로 다 발전이 된 거거든요.
사실 케이팝의 가사를 보면 완전히 우리가 주장하는 거예요. 리얼리즘 문학파들이 주장했던 사회비판적인 가사, 여기서 우리가 볼 때는 뭐냐 하면, 외국에는 그런 게 없어요. 맨 날 사랑타령만 하고... 그런데 케이팝을 들으니까 자기들이 스트레스 해소가 되는 거죠. 그걸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 현주소를. 그걸 알아야 학교에서 올바른 예술 교육을 시키게 되고, 올바른 예술교육을 받아야 만이 제국주의적 문화의식에서 탈피할 수 있는 것이죠.
“임화 같은 작가는 좀 복원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에 남북 문학인들 사이에서도 2005년인가로 기억합니다, 북한에서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남북 작가대회가 평양과 백두산, 묘향산 등에서 진행된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때 선생님도 참여하셨죠. 그때 갔을 때 느낀 북한의 문학과 문학인의 특징과 수준이라고 할까요. 어땠습니까? 북쪽 작가들은 그때 처음 뵌 거죠?
■ 북측 작가들은 처음 만난 거예요. 북은 그전에 갔다 와서 체험은 했지만 작가를 만난 거는 처음이었어요. 저는 북한문학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많이 봤기 때문에 아마 제일 많이 아는 편에 속했을 거예요. 사전 정보를 다 가지고 갔으니까요. 그랬는데 막상 대해보니까, 우선 문학이라는 게 우리 남한사회에서도 제일 앞서가고 다른 모든 분야보다는 좀 자유스러운 요소가 있는데, 북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내가 읽었던 어떤 소설에 어떤 작가라고 하면 다 아니까 너무나 좋아요. 그런데 이제 관이 개입하면 안 돼요. 그게 아쉬웠어요. 왜냐하면 북에 대해서 나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많이 보고 그렇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데 가면 좀 이렇게 풀어서 개인 대화를 해도 되는데, 그래도 이 분들은 공식 입장이 아니 아니면 자기의 견해를 말하지 않아요. (금강산) 삼일포 아시잖아요. 그쪽 회장하고 단 둘이 편하게 가면서 임화 이야기를 꺼냈어요. 당연히 그분도 나를 알고 나도 그 분을 알고 있었죠.
그래서 “정말로 이게 우리가 통일을 지향하고 민족문학을 하려면 임화 같은 작가는 좀 복원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랬더니, 그렇게 호의적으로 같이 얘기를 하다가 딱 정색을 하면서 “임 선생님 내 그래 안 봤는데 큰일 나겠네”라고 하는 거예요.
‘미제 간첩으로 처형된 그 문인을...’ 하는 반론이었겠지만, 내 뜻은 그게 아니고 ‘세월이 흘렀으니까 이제 복원해도 되지 않냐’ 그런 뜻이었죠. “이광수는 복권하면서 왜 하지 않느냐. 나 같으면 이광수는 영원히 복권 안 시키고 임화 같으면 복권시키겠다”고 했더니 딱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어떻게 보면 북이 먼저 그런 걸 다 해버린다면 얼마나 멋집니까. 거꾸로 더 많은 가능성이 열려서 남쪽에서 볼 때도 ‘야 참 북이 대단하다’ 이래야 하거든요. 임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남로당 전체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중에서 문학인만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인정하죠. 그렇게 이해는 하면서도 참 북이 남한의 문학 독자들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느냐 하는 아쉬움 같은 그런 건 좀 있었어요.
□ 북한 문학 작품을 볼 때 뛰어난 작품이랄까 기억에 남는 작가라든지, 평가할만한 작가를 소개하신다면?
■ 우리나라에 지금 나와 있는 남대현이라든가 몇몇 사람들이 있죠. 어쨌거나 제가 볼 때 북한 문학은 1980년대 들어서서 확 달라져요. 그 다음에 2000년대 들어서서 좀 더 당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가다가 다시 또 상당히 현실생활 속으로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주장했던 리얼리즘과 같은 주장이 북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문학이 방송에 못지않게 인민들 속으로 들어가는 문학으로 변해가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대개 ‘고전적 리얼리즘’에서 ‘비판적 리얼리즘’, 그 다음 단계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제가 보기에 북의 소설은 1960년대까지 한국전쟁을 다룬 거는 우리보다 앞섰어요. 여기 평론가나 독자들이 그렇지 않다고 반론할 수도 있지만 제가 볼 때는 확실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한국전쟁을 다루면서 갈등의 대상을 미국으로 잡아요. 나는 그걸 보고 참 대단히 깊이 생각한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사실 우리끼리 막 싸우는 걸 뭐 그렇게 부각시킵니까?
나중에 우리 민족끼리 갈등할 때는 남한사람을 반드시 미국 앞잡이로 만들어서 그렇게 하죠. 미국 앞잡이가 아니면 뭐 하러 미워합니까? 같은 동포들끼리 그렇잖아요. 물론 예술적인 형상화 문제 같은 거는 좀 조금 떨어지는 것도 있고 문제가 없지 않지만, 민족과 역사를 사랑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그 점에서는 상당히 깊이 고민한다고 생각했어요.
“민족이 밥 먹여 주냐?”, “그럼 민족이 밥 먹여 주지”
□ 방금 말씀드린 2005년 남북 작가대회 때 북측에서는 조선작가동맹이 나왔고 남측에서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나와서 공동 주관한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2007년인가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그동안 20년간 사용해오던 단체 명칭에서 ‘민족’을 빼고 ‘한국작가회의’로 개칭을 했습니다. 그때 그 이유가 ‘민족이라는 말이 좀 진부하다’라든지 또는 ‘서구에서는 민족을 보수로 인식한다’거나 ‘21세기인 지금 국제화 시대에 역행한다’ 이런 이유를 들었던 것 같아요. 민족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문학이 시대를 앞서가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그런 역할인가 어떤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궁금했었거든요.
■ 그때 저는 반대했어요. 근데 소수였어요. 아주 그냥 밀려가지고... 민족에 대한 비판에도 일리가 있어요. 그러나 너무 외국사람 눈으로 본 거예요. 제국주의 눈으로 보면 민족이라는 게 나치라든가 뭐 이런 침략주의적인...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입니다. 항상 당했기 때문에 민족을 내세워야 일체감이, 딱 그냥 민족 그렇죠. 민족문학하면 딱 모이는데 수가 있어요. 그럼 뭐라 그래요. 한국문학, 남북한문학, 겨레문학 이런 걸로 안 되는 거예요. 딱 그냥 민족문학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한국적인 특수성을 살리고 거기에 초점을 둬야 되느냐, 아니면 유럽적 입장에 서야 되느냐 하는 건데, 왜 우리가 유럽적 입장에 섭니까. 민족주체성을 살려야겠어요. 우리 연구소도 민족문제연구소이고, 저는 지금도 그냥 민족을 그대로 주장하는 쪽입니다.
이게 문학만이 아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민족이라고 말하면, ‘민족이 밥 먹여 주냐. 요새 누가 그런 말을 쓰냐’고 하는데, 아니 그럼 민족이 밥 먹여 주지, 누가 밥 먹여 줍니까. 일본이 먹여줘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민족을 안 하면 누가 밥 먹여 주나요?
심지어 지금 유럽 학자들은 뭐까지 하느냐 하면 ‘식민지 시대’ 그런 말 쓰지 말자고 합니다. 식민지 시대에 있다는 걸 자랑도 아니고 굳이 밝힐 필요가 뭐 있느냐는 것인데요, 침략국 입장에서 우리가 ‘일제 식민지시대’라고 하면 듣기 안 좋겠으니까 그들의 눈으로 우리의 학술적인 술어까지 바꾸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일부 역사학계나 학계에서 통하고 있어요. 마치 식민시대라는 술어를 피하는 것이 학술적으로 앞서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죠. 그건 앞서갈 필요도 없는 것이고, 진리는 영원한 건데 말이죠.
□ 평론가로서 현대 한국 최대의 작가와 작품을 꼽는다면?
■ 한 사람 뽑기는 참 어렵구요. 분단 이후 남한에서는 범민족적인 그런 감각을 가진 게 그래도 박경리, 그 다음에 조정래, 황석영 같은 분들이 남북이 모두 다 좋아할 만한 작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북에서는 이기영이나 최근 복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설야도 있고, 좋은 작가들이 많아요. 특히 카프 작가들의 소설이 참 좋아요. 그 작가들이 다 일찍 돌아가셔서 좀 아쉽긴 한데 어쨌거나 그 계열은 그래도 다 괜찮았어요.
□ 선생님은 출판사나 잡지사에 있으면서 좋은 책들을 많이 만드셨는데, 남북이 함께 하는 책에 대한 구상도 하셨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연세는 많으시지만 한반도 현실에 맞게 꾸려보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남북 작가들의 문학 작품들을 보았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워낙 디테일하게 또 의미 있게 책들을 잘 선정하시는 것 같아요.
■ 그런 편이에요. 제가 기자도 했고 잡지도 만들어 봤고 출판사 편집해 봤기 때문에... 비교적 그런 것 같아요. 디제이(DJ, 김대중 정부) 때인지 노무현 정부 때인지 모르겠는데, 문화예술진흥위원회에서 북한문학 전집을 우리가 내자하는데 허락을 다 받았어요.
편찬위원회를 만들어가지고 저도 그 편찬위원회에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재정문제도 부담이 없는 상태였는데 목록작품까지 해 가지고 마지막에 책을 낼 단계에서 안 된다고 해서 못한 적이 있어요. 그때 씨디(CD)를 만들어서 나눠줬는데, 그것도 잘 나오지 않았어요. 어쨌거나 여기서도 시도를 많이 했어요.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한일 국교정상화와 일본의 저속한 대중문화를 개방할 때에는 반드시 북한문화도 개방하라는 게 제 주장이거든요. 쉽잖아요. 어떻게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나라의 문화는 다 받아들이면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안 받아들이냐는 것이에요.
우리나라에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라는 건 뭐냐 하면 북한 문화 100% 개방하는 그거에요. 김일성 주석의 『세기와 더불어』를 출판했다고 출판사 사장을 고발하는 이게 무슨 민주주의에요. 서독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통일이 된 거지. 서독만큼 하지도 못하면서 욕심만 많아가지고 말이죠.
지금은 남한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인 『태백산맥』을 드라마로, 영화로도 못 만들잖아요. 박경리 『토지』처럼 1년 내내 어느 방송에서 계속 드라마가 나오게 되면 엄청나게 많이 볼 거예요. 조정래 작가한테 물어보니까 몇 군데에서 계약은 해갔는데, 결국 못하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뭐냐 이거예요. 허울이지. 민주주의라는 게 반민족주의자들이 있으면 그 생각을 고쳐야지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영화도 못 만드는 게 무슨 민주주의냐 이거에요. 이게 내 불만이에요. 사실 이런 게 다 돼야 민주주의입니다.
□ 선생님께서는 이미 1978년에 평론집 『문학의 시대는 갔는가』라는 책을 내셨어요. 지금에 비하면 그래도 그때 1970년대나 80년대가 문학의 전성기였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그때는 젊은 세대가 시집을 갖고 다니고 전철에서 책도 읽고 말이죠. 그럴 정도로 문학에 대한 갈증, 열정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진짜 문학의 시대는 간 것 같아요. 책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나타나고 있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젊은 세대를 독서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1978년에 제가 쓴 거는 유신 말기이지 않습니까. 1979년에 박정희를 그야말로 부하가 총을 쏴서 죽인 건데, 암살도 아니고 그냥 딱 죽여 버린 거거든요. 신념으로. 그러니까 서거도 아니고... 난 항상 박정희의 ‘죽음’이라고 표현하는데... 역사적인 술어로. 그 바로 한 해 전이 1978년 아닙니까. 그때는 유신문화가 너무나 팽배하고 새마을문화가 성행하고 그랬어요. 정부에서 돈 다대주고 그랬거든요.
그런 거만 정부가 장려하고 진짜 문학은 탄압하고 그랬죠. 그런 아이러니를 ‘문학의 시대는 갔는가’라고 표현한 거죠. 지금은 산업화 사회가 돼가지고 멀쩡히 잘 살게 되니까 그 문학인들은 사회를 파악할 능력이 없어져 버렸어요. 적어도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소설가, 평론가라고 하면 사회와 역사, 정치 평론을 겸할 수 있을 정도로 안목은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워낙 정치가 혼잡하게 되어 버리니까 문학인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봐도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자기 스스로 혼란에 빠져버려요. 지식인의 자격을 잃은 거죠. 그래서 이제 지식인으로서 문학인이기보다는 그야 말로 그냥 문학인이야, 문학인이라는 말보다는 문예, 예기로서 즉 기술로서 문예인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소설이 없잖아요. 대작가가 안 나와요. 교육이 잘못된 거죠. 식민지문화 때문에 훌륭한 문학가 교육을 안 시킨 거죠.
“이재문은 기록만 남기지 않았다면 완벽한 투사”
□ 아쉽긴 하지만 선생님의 문학평론가로서의 부분은 일단 이걸 마무리하고 이제 사회활동가로서 부분으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이 책을 보니까 선생님께서 혁명가들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작가들 사이에서 그런 별명이 나오는데. 구중서는 구중서와 레닌의 합성어인 ‘구닌’, 백승철은 ‘백게바라’, 그리고 선생님은 ‘임스트로’. 아마 카스트로를 연상시키는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카스트로라고 불릴 만한 그런 이유 같은 게 있었나요.
■ 뭐 그렇지는 않은데, 좋아했죠. 왜냐하면 바로 미국의 턱 밑에서 혁명을 일으킨다는 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걸 성공했잖아요. 아 그건 놀라운 세계사적인 사건입니다. 그 혁명이 일어난 게 1959년 아닙니까. 우리는 1960년대 4.19 뒤에 대학을 다니면서 제3세계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낫세르 같은 혁명도 있고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카스트로의 경우에는 그중 호지명과 쌍벽을 이루는... 우리 같은 사회에서는 선망의 지도자이죠. 그런 뜻에서 그랬던 거 같아요.
□ 이 책에서 선생님의 의식과 삶 이런 걸 보게 되는데, 문학적으로 한정한다면 문학평론가보다는 소설가나 시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또 어느 한편으로는 그걸 넘어서 사회활동가, 실천가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자신의 직업이랄까 이것을 문학평론가로 일단 중심을 잡았거든요. 막 팽개치고 실천을 하러 나가는 그런 마음이 일지는 않으셨습니까?
■ 체질에 안 맞고 제 능력 밖입니다. 저는 이미 청소년 시절에 그렇게 정했어요. 나는 집안 신원조회로 인해서 정치가나 관료가 안 되니까 그런 건 아예 포기하고 그냥 자유롭게 글이나 쓰는 게 제일이다. 재밌고... 그러다 보니까 정치나 관료 되는 건 아예 선을 그어놓고 안 들어갔고. 들어갔으면 훨씬 더 위험해졌겠죠. 그건 저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커서 보니까 우리 시대에 훌륭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탁월한 정치 지망생들이. 그래서 저는 그 보좌역. 쉽게 말하면 훌륭한 정치가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 내 생각을 많이 이야기해줘서 우리나라를 바로잡는 데 내가 기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다리』지에 들어갔잖아요. 그런 게 포부였습니다.
□ 그 당시 상황으로 보면 핵심인 김상현 의원을 『다리』지에서 만나 굉장한 역할을 한 거에요.
■ 그럼요 저 나름대로는 상당히 잘했다고 봅니다. 다만 김상현 의원이 나중에 디제이하고 좀 거리가 생기면서 개인으로 볼 땐 불행해졌죠. 불행한 말년이었는데 아쉬운 대로 할 수 없죠.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고.
□ 선생님께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활동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시 박정희 유신체제 시대이고 비합법 활동, 반체제 활동을 하다 잡히면 그냥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남민전 활동을 했거든요. 뭔가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신념이라고 할까요.
■ 제가 1974년에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나오니까 대학 강사도 못해요. 교수는 당연히 못하는 거고 강사도 못하고 공직에 완전히 문이 닫혀버렸어요. 신원조회 때문에도 안 되지만 이게 추가되니까 더 안 돼요. 참 할 일이 없어요. 출판사 직원도 하고 번역도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데 민주화 운동이 앞이 캄캄해요. 지금 박정희가 죽고 나니까 ‘그때 죽을 줄 알았다’, ‘그때는 유신말기였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다 거짓말입니다. 내가 그냥 논쟁도 할 수 있어요, 누가 그 얘기하면. 그때는 아무도 못 나섰어요.
3.1일 명동구국선언이 있었고, 노동자들이 나왔지, 지식인들은 그냥 다 숙이고 있었죠. 그때 송건호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일제 때와 지금이 뭐가 다르고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과 지금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이 누가 더 훌륭하냐”고 물었더니 “독립운동이 더 훌륭하다”고 그래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송건호 선생님 대답이 “일제 때는 일본이 영원히 갈 줄 알았다. 그런데도 생명 버리고 했다. 그게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거죠.
유신 독재는 박정희가 죽으면 끝난다. 아무리 건강해도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그건 죽을 거다. 죽으면 끝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그때 우리는 모이면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정말로 그랬어요. 그 당시 엘리트들도 ‘우리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다’. 워낙 감시가 심하니까. 그 당시 우리가 셋만 모여도 전부 요시찰 인물인데. 그래서 ‘이제는 민주화운동도 지하조직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 때 누가 ‘민주투쟁국민위원회’(남민전 산하 조직)를 지하로 한다고 하니까 그래서 한 거죠.
□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또 매우 흔쾌히 받아들인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정말로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 남조선해방전략당의 권재혁, 통일혁명당의 김종태, 남민전의 이재문 등 비밀 혁명조직의 최고책임자가 모두 잡혔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옥중에서 병사하셨는데요. 이재문 선생은 직접 만난 걸로 알고 있는데, 이재문 선생은 어떤 사람이고 또 권재혁, 김종태 등 최고책임자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서로 비교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두 분(권재혁, 김종태)은 제가 만나본 적은 없지만 얘기는 다 들었죠. 이재문 선생이 우리나라의 혁명사를 꿰고 있었어요. 저와 같은 고향인 의성 사람이에요. 그래서 더 친하죠. 나중에는 조직을 떠나서 궁금한 걸 묻기도 했어요. 어떤 사건은 어떻게 터졌고 어떤 사건은 잡혀가지고 취조 받을 때 누가 밀고를 했고 그런 것까지 자세히 다 알아요. 그랬는데 그런 건 저도 지금 기억도 다 못하겠고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도 없지요.
다만 이재문 선생 개인에 대해서 말한다면 대단히 신중하고 훌륭했어요. 조심하고. 정말 그 당시의 투사였습니다. 그리고 큰일을 낼 사람이었어요. 그만큼 신뢰가 갔어요. 그랬는데 남민전 이야기가 나와서 말하자면, 딱 한 가지 잘못한 게 기록을 남긴 거예요. 그것만 없었으면 완벽한 투사였습니다.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사건이 그렇게 커지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점조직이라는 걸 다 아시잖아요. 그건 상식적으로 우리가 안 해 봐도 반공교육 받으면서 그런 교육 다 받았으니까요. 저도 그거 다 몰랐거든요. 그러면 전혀 안 터져요. 번지지 않아요. 근데 철석같이 그런 얘기를 다 하고 지하비밀조직이라는 것도 다 했는데 터지고 나니까 (이재문 선생 기록이 압수당했던 거죠).
저는 먼저 알았어요. 그 기록이 있다는 걸. 임기묵 선생이라는 분이 그때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그 집에 이재문 선생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죠. 그때 맨날 기록한다고 해서 기록하고는 베개에 넣어가지고 배고 자요. 자기 혼자. “왜 기록하냐”고 하면 “이건 역사에 남겨야 한다”고 해요. 그 말은 맞죠. 그 보따리가 나오니까 저는 도망 다니다가 기자회견 보고 ‘아이고 틀렸구나’ 했어요. 경찰에서 볼 때는 (이재문을) 잡자마자 대단한 걸 잡은 거야.
□ 오죽했으면 그때 들리는 말에는 이재문 선생이 검거될 때 “내 보따리 내 보따리” 했다는 얘기가 돌았거든요. 그 정도로 갖고 있었던 건데 털렸으니까 진짜 억장이 무너졌겠죠.
■ 제가 며칠 뒤에 남영동 대공분실에 가니까 이재문 선생이 말한 노트를 줘요. “기억도 안 난다” 이러니까 노트 주면서 “이거 보고 다 베끼라”고, “회상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노트를 보니 몇 월, 며칠 어디에서 누구를 만난 이야기가 다 나오죠. 제 가명이 한민성이거든. 민성(民聲). ‘백성의 소리’. 글을 쓰니까 백성의 소리, 민족의 소리를 대변하라는 뜻이었죠. 본명은 안 나오는데, 이미 들어가니까 그 사람들이 가명과 본명을 다 알고 있어. 참 그게 아쉬웠어요.
□ 흔히들 혁명운동에서 보위투쟁이라고 그러죠.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좀 잘못된 경우인 것 같습니다. 사실 남민전 사건 이후에 그 공소장이 공안사건기록으로 해서 외부에 돌았어요. 사람들이 많이 봤거든요. 거기서 눈여겨 볼 게 많이 있는데요. 특히 보위와 관련된 지침들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걸 많은 그 운동가들이 활용한 기억이 나는데, 그걸 누가 썼습니까?
■ 제가 거기까지는 자세히 모르는데, 그거는 다 위에 중앙위원회에서 한 거죠. 이재문, 안재구, 김병권, 신향식 네 분이죠. 그분들이 다 했다고 봅니다.
“진짜 독립운동은 반제민족해방투쟁”
□ 선생님 책을 보면 각 장마다 다 의미가 있지만 특히 12장에서 ‘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을 다룬 부분이 독특하고 인상적입니다. 선생님은 이 책에서 “독립운동이란 뭐냐.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이렇게 쉽게 말씀하셨어요.
지금 한반도는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일본 제국주의 또 미국 제국주의 이런 흐름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현실로 와서 제국주의 최고 우두머리인 미 제국주의의 특징이랄까, 행태 이런 것들을 한번 설명해줬으면 합니다.
■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평가하는 기준이나 이런 게 학자들마다 다 일리가 있고 연구도 많이 하고 참 고맙고 저도 참고를 많이 하는데, 독립운동이라는 개념 설정이 안 돼 있어요. 이건 아마 제가 처음 제기하는 것 같은데, 여러분들이 보고 앞으로 참고삼았으면 좋겠어요.
원래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민족해방운동입니다. ‘내셔널 리버레이션 스트러글’(National Liberation Struggle). 그리고 모든 나라의 독립운동은 처음에 한 건 반제국주의 그렇죠.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 혹은 운동이에요. 반제민족해방운동이거든요.
‘반제’가 제일 먼저 들어가요. 그런데 우리나라 독립운동 평가에서 반제는 떨어져 나가버렸어요. 그냥 독립운동, 항일독립운동이 된 거죠. 반제라는 술어 대신에 항일을 갖다 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훈처에서 그 심사 기준이 ‘사회주의자는 안 돼’라고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독립운동의 개념도 모르고 하는 정의에요.
그건 친일파 대통령 박정희가 만든 독립운동의 개념이지. 그 개념을 학자들이 물론 반대해요, 비판도 하고. 민주화 이후에 ‘사회주의도 독립운동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민주화 됐다고 많이 바뀌어졌어요. 사회주의자도 들어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주를 달기를 북에 고위 관리를 지낸 사람은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아무리 북의 고위 관리라도 이거는 반제민족해방운동이거든. 그건 평가해 줘야죠. 그게 제 주장이에요. 어쨌거나 독립운동 개념 고쳐라. 보훈도 그렇게 해라. 이 개념으로 다시 평가해라. 그리고 반제국주의를 못하고 일본 학생하고 뭐 싸움했다고 하는 그런 거는 독립운동 중에서도 가장 말단입니다.
진짜 독립운동 한 사람은 반제민족해방투쟁이어야 돼요. 그것도 무장투쟁이 일등이죠. 그 다음에 일반 투쟁이 2등이고 그 다음에 문화운동이 3등.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같은 게 그 다음. 이렇게 순서가 되어야 하는데. 그냥 제일 중요한 걸 떼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복원이 잘못됐다고 보는 거죠. 내 의견을 얼마나 들어줘서 누가 고쳐줄지 모르지만 결국은 우리가 제대로 된 민족, 제대로 된 민중이라면 이런 가치관을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독립된 나라에서 민중이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따라서 살 것 아닙니까. 우리가 반제라고 하면 일본 제국주의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국주의로부터도 간섭을 안 받는다는 것이 그게 독립운동가 아닙니까? ‘일본만 물리치면 우리는 미국 식민지가 돼도 좋아’라고 하면서 독립운동 한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되는데 독립운동 정신은 간 곳이 없고 분단 체제 하에서 나눠먹기식으로 훈장을 주는 병폐를 얘기한 거죠.
□ 선생님의 ‘독립운동은 반제국주의 운동’이라는 논리가 통용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많이 여론화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기준이 그래야 해요. 이제 제국주의 얘기를 했는데, 서양사나 우리나라 역사교육에 나는 참 별로 만족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있고 하는 것만 나열하는 것은 골치만 아파요. 근대 세계사는 제국주의 역사를 딱 보면 너무나 쉬워요. 아주 간단해요.
정리한다면 이런 거예요. 힘이 센 나라는 다 제국주의가 돼요. 근대 이전부터 포르투갈, 스페인. 이 나라들이 배를 제일 먼저 만들어 가지고 중남미까지 갔지 않습니까. 포르투갈, 스페인이 막 설치다가 이제 프랑스가 식민지를 많이 했죠. 그 다음이 영국이야. 영국이 압도적이죠.
세계 지도를 보면 유럽 강대국들이 자기 지역에서 가까운 나라부터 먼저 식민지를 만들어요. 중동, 동남아로 쭉 오거든. 그러니까 다 식민지가 되잖아요. 식민지 안 된 나라가 중국, 한국, 태국, 일본뿐이에요. 그 외에는 전부 식민지로 다 떨어졌어요. 사실 중국에 막혀서 우리도 서양 식민지가 안 되고 일본 식민지가 되어버렸죠. 중국이 워낙 크니까 거기서 더 못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틈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먹은 거거든요. 이렇게 가르치면 너무나 간단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먹을 때도 그냥 안 먹었습니다. 자기 선배 제국주의들의 허가를 다 받았어요. 허가 받는 마지막 결제자가 바로 미국이었어요.
태극기 부대들이 광화문에서 성조기 들고 아무리 해봤자 미국은 단 한 번도 정부 차원에서 우리나라 독립에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아주 잘못된 인식이에요. 미국은 정부차원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먹으려 할 때 소위 말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건 너무 유명하잖아요. 쉽게 말하면 필리핀은 미국이 먹고, 조선은 일본이 먹으라는 거 아니에요? 표현은 미사여구를 썼지만 그냥 서로 나눠 먹게 했단 말이에요. 만약에 미국이 그 허가를 안 했으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못 쳐들어옵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이 러일전쟁이거든요. 러시아가 우리나라 탐을 냈잖아요.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했단 말이에요. 제일 처음에는 청일전쟁 그 다음에 영국하고 영일동맹 그 다음에 가쓰라-태프트 밀약. 그리고 마지막에 러일전쟁을 합니다.
러일전쟁을 할 때 오래 가면 러시아가 이기는 거예요. 일본이 그때 도저히 전쟁을 진행할 수 없는 거야. 러일전쟁 할 때 전 유럽이 다 일본 편을 들어줍니다. 심지어는 발틱함대가 아프리카를 건널 때 수에즈운하를 안 열어줬잖아요.
그래서 희망봉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이미 맥이 빠진 거야. 음식은 다 썩어 빠지고 빵에서는 구더기가 새어나오고 말이죠. 그래도 러시아가 전쟁을 더 끌었으면, 그때 이미 일본은 전 국민이 패퇴해가지고 먹을 것도 없고 거의 항복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매를 누가 섰느냐. 그게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입니다. 이 대통령이 나와서는 러시아를 꼬드겨서 미국 포츠머스에서 회담을 중재하죠. 그 중요한 내용이 뭐냐 하면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손 떼고 한반도 감독권을 일본으로 넘긴다는 거예요.
러일전쟁의 유전조약은 루즈벨트가 거기서 중재해서 맺은 거예요. 러일전쟁을 종식시켰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아요.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루즈벨트가 받은 상금은 우리한테 줘야 된다. 우리나라 팔아먹고 받은 평화상이 무슨 평화입니까. 우리는 식민지가 되는 길인데.
그리고 바로 일본은 제1차 합방을 맺어버렸잖아요. 그 다음 5년 뒤에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주인공이었던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거든. 그러니까 일본은 1910년에 우리나라를 마음 놓고 합방해버린 거죠. 이미 조약을 맺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역사책에 하나도 안 나오죠. 마치 선교사들이 와서 막 독립운동을 도와주었다고 써 놓는데 선교사들은 개인적인 차원이고, 미국 정부는 이미 우리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거죠.
우리가 미국에 무슨 은혜를 입었는지 얘기해 봐요. 현대사에서 없어요. 8.15때 들어와서는 분단시켜 가지고 점용하고 있고... 제가 말하는 세계사나 한국사, 이런 걸 가르치면 학생들이 금방 역사의식을 가질 텐데 엉뚱하게 뭐 복잡하게 가르쳐요. 3.1운동만 위대한 것처럼. 독립도 못했는데.
□ 제국주의에 대해서 관심이 굉장히 많은 것 같고 또 연구도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욕심을 낸다면 그쪽으로 글을 쓰신다든지 하면 좋지 않을까요.
■ 그럴 능력은 없고 다만 저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공부한 거예요.
“북미관계가 풀리지 않는 근본 이유는 미국 때문”
□ 선생님은 국제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걸로 알고 있거든요. 잠깐 중국 얘기를 해보면 중국이 사회주의를 계속 유지하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그러는데, 중국 사회주의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 저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봐요. 왜냐하면 만약 마오 혁명이 없었다면 중국은 갈기갈기 찢겼을 겁니다. 그 많은 소수민족이 각각 다른 나라를 만들어서 나라마다 아마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식민지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통일했잖아요. 한 나라, 한 민족을 만들었어요. 일단은 그런데서 긍정적이고 다음으로는 어떤 외세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그야말로 중국 인민의 힘으로 성공한 혁명이었단 말이죠. 그리고 그 상대인 부패한 장개석 정권을 대만으로 가도록 만든 게 마오 혁명이기 때문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봅니다. 그 뒤에 많은 부작용 같은 게 있긴 있었죠.
그러나 그런 부작용은 부르주아 정권에서도 다 있었어요. 그렇잖아요. 옛날에 다 굶어 죽고 하던 걸 다 잊어버리고 그냥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굶어 죽은 것만 가지고 따지면 안돼요. 옛날에 왕들이 정치할 때는 백성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기록도 안 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긍정적으로 보고. 어쨌거나 중국이 제3세계의 그야말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왔잖아요. 미국과 괄목상대할 만한 위치에 간 것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봅니다.
□ 중국 사회주의를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 것 같아서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 제가 꼭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을 보는 관점은 미 제국주의 문화에 세뇌된 관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중국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가 싫어하는 지수가 상당히 퍼센트가 올라가거든요. 특히 좀 젊은 세대가 많이. 그건 말이 안 돼요. 그거는 우리나라 매스컴들이 미국이 한 그대로 따라 하는 거거든요. 이건 정말 큰 문제다. 어떻게 우리가 지금 우리나라 경제에 가장 도움을 주는 나라를 그렇게 야유조로, 무슨 멸시의 대상으로 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봅니다.
□ 국제 문제에 이어서 이번에 한반도 문제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데요. 북미관계가 한국전쟁 이후에 70년이 넘었거든요. 아직도 해결이 안 되고 있어요. 과정들은 다 아실 테니까요. 근데 이게 진짜 안 되는 건지. 역사상 이런 관계가 없지 않습니까. 전쟁을 겪었어도 평화조약을 맺고 어떻게든 나가는데 북은 안 되고 있습니다. 또 거기에 한국이라는 남쪽도 있어 가지고 간혹 북쪽과 민족화해적인 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있는데 어쨌든 북미관계가 근본적으로 안 풀리고 있거든요. 왜 그럽니까?
■ 미국의 책임이 있죠. 저는 전적으로 미국의 책임이라고 보거든요.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미국을 잘 몰라요. 저도 미국을 잘 모릅니다. 나라도 크고 세계의 온갖 머리 좋은 사람들이 다 모여가지고 어떻게든지 세계를 지배할 전략을 꾸미니까, 그런 것은 나 같은 머리로는 감히 간파할 수가 없어요.
저도 미국이 이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다만 내가 본 책이나 기록으로 볼 때는 우리가 미국을 참 모르고 있다, 아직도 그 전체를. 제국주의가 얼마나 심오하고 침략의 기교가 발달했는지 모르고 있다. 더 연구해야 한다. 본심을 알고 미국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 한가지입니다.
그 다음에는 한국전쟁 때 미군이 고문단을 놔두고 철수했다가 다시 왔잖습니까. 그때 중국어 기록을 보니까 마오 주석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요. ‘미국은 앞으로 영원히 한반도에서 안 물러갈 거다’라는 거죠. 난 그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마오는 미 제국주의의 본성을 너무 잘 알아요. 그러니까 미국은 그냥 영원히 안 물러간다고 보고 한반도는 아예 통일이 안 되는 걸 전제해서 인민지원군을 보냈다고 해요.
제가 본 미국은 그런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갈 사람들이고 자기들이 볼 일 없으면 우리가 바지를 잡고 ‘가시리 가시리잇고’ 노래를 불러도 갈 사람들이다.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기지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는 처지다. 그런 전제 없이 망상을 하면 안 된다고 봐요.
□ 시간이 갈수록 더 공고화될 우려가 있지 않습니까?
■ 미국이 그러면 영원히 있느냐. 방법은 하나 있어요. 남북한 우리 민족이, 적어도 남한 우리 국민들이 80% 이상만 다 반미하고, 그렇게 하려면 우선 정치지도자 대통령부터 80% 이상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보죠.
대통령이 80% 이상 지지를 받으면 바람이 세죠.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회담 같은데서 그렇게 성공한 것도 그때 대통령 지지가 올라서 그렇다고 보거든요. 실패한 것도 지지가 내려가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봐요.
외교는 내치의 연장선이란 말이에요. 우리 국민 전체가 반대하면 미국도 따라와요. 우리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나 그 나라 국민 전체가 반대하면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외세가 개입하고 싶어도 어렵죠.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될 날이 언제 올까. 참 요원해요. 남한이 좀 그러더라도 북과 남이 딱 손잡는 그런 망상을 해요. 북한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제가 망상을 한다면 ‘미국이 아무리 싸움을 붙여도 남북이 그냥 우린 전쟁 안하겠다’고 선언해버리면 평화협정은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 할 이유가 뭐 있어요. 우리가 전쟁 안하겠다는데.
그런데 남한의 영향력도 부족하고 북도 남한과 그렇게 하기보다는 반드시 미국의 보장을 받고 싶어 하잖아요. 미국의 보장을 받는다는 거는 어떤 면에서는 미국이 굉장한 반대급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인데. 미국이 회담하기 전에 핵 문제 뭐 어째라 하는 건 그건 안 한다는 뜻입니다. 만날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까 북이 안 만나는 거예요.
아니 세상에 무슨 회담이든지 만나서 토의하는 것이지, 만나기 전에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그런 회담이 어딨어요. 그런 건 외교관례상 아주 후레자식이나 하는 소립니다. 그게 무슨 외교입니까. 그래서 저는 미국이 저렇게 나오는 한 회담은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대선 “정당들의 과거가 어땠느냐는 걸 봐야지, 인물 하나만 보면 안 돼”
□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입니다. 그걸 4~5년간 해오면서 최근에 특히 종전선언 문제를 유엔에서도 얘기하고 또 미국과 문안 절충을 진행해서 많이 됐다는 얘기도 있거든요. 문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계속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도움이 될까요.
■ 중요성은 다 제고됐죠. 그리고 그동안에 문재인 대통령이 북과 맺었던 판문점에서 만났던 성과라든가, 평양 방문에서 선언했던 거라든가 그건 엄청난 성과입니다. 그 이전 대통령이 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큰 성과라고 인정해 줘야 됩니다.
그때는 저도 정말 뭐가 좀 될까 하는 희망을 가졌어요. 근데 결국 최종 결정은 다 미국이 한단 말이에요. 그럼 뭐 숨길 필요도 없어요. 미국 때문에 힘들다. 그럼 우리가 말해버려야 돼요. 그래야지. 뭐 ‘왜 이렇게 못하느냐’고 말하면 안 됩니다. 미국 때문에 못하는 거거든요. 지금 대통령은 충분히 의지가 있단 말이죠.
미국이 말 안 들으면 북이라도 문재인 정권을 인정해가지고 멋지게 이렇게 비밀 통로를 하든지 해야 되는데, 대통령도 참 안 됐어요. 북은 북대로 안 되지. 미국은 미국대로 허락 안 해주지. 글로벌 종전선언 한다고 하지만 미국 허가 맡고 와서도 안 되잖아요.
제가 볼 때는 허가 맡고 왔는데 (미국이) 뒤에서 틀어가지고 북쪽과 거래하는 은행에 대해서는 통제하고 군사 훈련은 하자고 하고. 쉽게 말하면 한국정부가 하도 조르니까 ‘그래 해봐’ 했는데, 간 뒤에는 ‘웃기네’ 하며 훼방 놓는 거예요.
웃기는 게 우리는 그렇게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다 하면서 일본도 참가시킬 기회가 있을 정도인데, 북은 외국인 하나도 없이 자기들만 무슨 무기 실험한다고 하는데 온 세계가 북만 욕을 하거든요. 거꾸로 생각해 봐요. 우리가 북한처럼 처해 있어서 거기에 소련군이 있고 우리는 미군도 없다. 그러면 우린들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국가 자위 차원에서 해야죠. 그거 안 하면 그건 바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북이 저렇게 하는데 대해서 너무 언론이 호들갑떤다고 봅니다.
□ 한두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올해 3월 9일에 대통령 선거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선거전이 치열합니다. 그런데 비호감 선거라는 말도 나오고 말이죠. 네거티브나 폭로전이 난무하고 있는데 정작 정책선거, 특히 남북관계라든지 친일 문제 이런 것들이 안 나오고 있습니다.
■ 나와야 되는 게 아니라 나는 국민들이 좀 빨리 각성을 해서 아파트 몇 채 짓는다, 돈을 얼마 준다, 그런 것보다는 우선 그 세력을 봐야 된다고 말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재명이 소속돼 있는 당과 윤석열이 속해 있는 그 당, 그리고 안철수의 정당을 봐가지고 그 정당들의 과거가 어땠느냐는 걸 봐야 된다고 말이죠. 그걸 안 보고 인물 하나만 보면 안 돼요.
왜냐하면 윤석열이 속해 있는 정당은 이승만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까지 다 대통령 임기도 못 채우고 쫓겨났거나 투옥되어 있거나 100% 다 그래요. 그 정당 출신으로 대통령 지냈던 청와대 주인들이 다 유고잖아요. 그런데 윤석열은 그 사람들을 숭배하고 받들고 있죠. 실제로 윤석열이 나중에 만약에 대통령이 된다면 각료로서 국무회의에 들어갈 사람들이 이승만,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를 존경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럼 한번 생각해 봐요. 국민들이 그런 사람들을 또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제쳐놓고 정권교체를 말하는데, 정권교체 했다가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더 나빠지면’이라는 가정이 아니라 나는 100% 더 나빠진다고 보거든요. 민주주의도 후퇴하고 뻔하게 독재 할 수밖에 없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보복을 할 거고 민주주의, 사회복지 이런 거 외면할 거고. 아파트 문제는 잘못한 것이니까 사과해야하지만 그것 하나 때문에 이런 엄청난 큰 불행을 감수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진보도 타락하면 꼴통이 되고 보수도 개혁하면 진보가 된다”
□ 하나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몇 년 전과 달리 최근에 청년세대-엠지(MZ)세대라고 그러죠. 이 세대가 정치의 주요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거든요. 또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 이런 말도 있듯이 어차피 젊은 세대가 이제 우리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엠지세대에게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해 주고 싶은 말들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 젊다고 다 올바르지는 않거든요. 젊은 사람이 더 나쁜 사람도 많아요. 그거는 지금만 그런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항상 그랬어요. 영감 세대라고 다 보수적인 것도 아니에요. 더 진보적이고, 더 전위적인 걸 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저는 전부 다 그렇게 너무 강조하지 말고 노장청 이게 비례가 돼야지, 젊은 사람들만의 나라도 아닙니다. 젊은 사람만 사는 나라입니까. 우리 같은 노인도 살아야죠. 그렇기 때문에 노장청 비례가 돼야 되고 다만 정책이 올바르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단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이제 우리나라 진보 세력도 젊었을 때 진보였다고 영원히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죠. 진보도 타락하면 꼴통이 되는 겁니다. 책에도 그렇게 썼죠. ‘진보도 타락하면 꼴통이 되고 보수도 개혁하면 진보가 된다.’ 그렇게 바뀌는 건데 지금은 아쉽게도 우리나라 진보 세력들이 너무나 꼴통화되고 있어요. 오히려 민주화의 장애가 되는 세력이 되고 있다는 걸 충고하고 싶어요.
□ 뒷말씀이 아주 여운으로 남네요. 오랜 시간 고맙습니다. 이것으로 임헌영 선생님과의 통일뉴스 신년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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