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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 겪는 청소년들에게…좌절 금지! 변화는 원래 오래 걸린다"

[프레시안books] <볼 영화 없는 날> 펴낸 교사 김수진·김시원·황고운씨 인터뷰

ⓒ프레시안(이상현)김효진 기자  |  기사입력 2022.01.31. 07:02:08 

"저희가 성인지 감수성을 가르쳐서 졸업시킨 학생들이 청소년이 된 뒤 더 노골적인 차별과 혐오를 경험할 수 있잖아요. 그 때 저희가 곁에 없어도 학생들이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을 읽으며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으면 해요."

26일 서울 강남구 한 모임공간에서 만난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 교사 김수진(32), 김시원(27), 황고운(35)씨는 최근 영화를 통해 젠더 감수성을 길러주는 책 <볼 영화 없는 날: 차별을 넘어 차이를 잇는 페미니즘 영화관>을 펴 내고 "청소년들에게 차별적인 세상을 넘어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하고 연대하는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저자들은 책의 소재로 영화를 택한 이유에 대해 "한 편의 잘 만든 영화가 미치는 영향력과 전달력이 크다고 봤다. 실제로 영화를 통해 수업을 진행해 보니 학생들과 더불어 저희도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저자들은 아웃박스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현직 초등학교 교사들이다. 2016년 고양시 일산 지역 한 초등학교에 첫 부임한 다섯 명의 교사들의 독서 모임으로 시작한 아웃박스는 일 년 만에 성별고정관념을 깨는 수업을 연구하고 새로운 성교육 교안을 고안해 다른 교사들과 공유하는 등 학교 현장에서 성평등 교육을 실천하는 연구회로 성장했다. 지금은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20명 가량의 교사들이 함께 활동한다. 황고운 교사는 "독서 모임 당시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82년생 김지영>이 출간되면서 이야기가 자연스레 젠더 문제로 흘러가는 일이 많았다. 토론에서 젠더 문제를 풀기 위해 교육이 중요하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우리가 바로 그 교육자였다. 젠더 교육을 현장에 도입하자는 취지로 연구회로 전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힘'으로 차별 너머에 있는 다양성의 세계 보여주고파" 

▲<볼 영화 없는 날: 차별을 넘어 차이를 잇는 페미니즘 영화관> (김수진·김시원·황고운) ⓒ서해문집

책 <볼 영화 없는 날>은 여성들이, 그리고 성인지 감수성이 있는 모든 이들이 관람했을 때 '불편한 점'이 없는 영화 17편을 통해 청소년들이 생각해 볼만한 젠더 이슈를 알기 쉽게 전달한다. 영화 줄거리 설명이나 평가 보다는 영화를 소재로 사용해 주목 받지 못하는 여성 서사, 여전히 존재부터 '인정'을 갈구해야 하는 성소수자 이야기, 대상화되는 여성의 몸, '차별을 당하는 사람이 차별을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차별의 다층적인 구조 등 차별적인 사회 구조와 이를 넘어서기 위한 페미니즘 관련 주제를 폭넓게 다뤘다.  

책은 영화 <벌새>(2019)를 통해 '평범하게 폭력적 상황에 처해 있는' 여성 청소년 자신의 이야기가 가치 있다는 점을 일깨우고 너무 평범해서, 혹은 너무 달라서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려워하는 청소년들에게 '일단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꺼내 보라'고 공감과 위로를 건내는 것으로 시작해 <아이 필 프리티>(2018)를 통해 어린이부터 성인 여성까지 모두을 옭아매는 외모 강박에 대해 다루고 <톰보이>(2011)를 통해 성별 이분법에 대해 질문한다.  <페르세폴리스>(2007)로 성차별과 이주민에 대한 차별을 함께 다루며 차별은 언제나 다층적이라는 점을 일깨우고 <옥자>(2017), <모노노케 히메>(1997)를 다룬 장에서는 억압과 착취의 구조가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동물과 자연에까지 걸쳐 있다고 설명하며 인간 중심성을 탈피해 보다 넓은 생명들과의 연대를 제안하는 것으로 시야의 확장을 도모하기도 한다. 각 장에는 이해를 돕기 위한 최근 시사 이슈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 팽배한, 사실이 아니거나 심각하게 왜곡된 해석으로 만들어진 '가짜뉴스'가 청소년들의 시야를 흐리는 것을 막는다.

책에서 다룬 영화는 모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골랐지만 가장 강조하고 싶은 영화에 대해 질문하자 김수진 교사는 "소수자를 존중하며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라며 <윤희에게>(2019)를 꼽았다. 그는 "지인에게 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의했을 때 '동성애 영화는 안 본다'며 거절당한 적이 있다. 다른 영화와 다르지 않게 인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금지된 영화"라며 성소수자가 더 많이 '용기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김시원 교사는 가장 추천하는 영화로 <모노노케 히메>를 꼽았다. 그는 "성차별을 유발하는 권력 구조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구조로 사고가 확장된다. 책에서 에코페미니즘을 소개하고자 했던 이유"라고 말했다. 황고운 교사는 "동물을 과도하게 착취하는 일과 약자에 대한 폭력은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황고운 교사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2019)를 추천했다. 이 영화는 1993년 미국에서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연방대법관 자리에 올라 2020년 타계할 때까지 여성과 소수자 차별을 막는 수많은 판례를 남긴 긴즈버그의 삶을 조망한 다큐멘터리다. 황 교사는 1933년생인 긴즈버그가 무언가를 성취할 때마다 '남성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식의 백래시에 맞닥뜨렸던 현실과 재판 하나하나를 공들여 준비하며 긴 호흡으로 차별적인 구조를 바꿔나가려 했던 모습에 주목했다. 그는 책에서 "세상이 진보하려 할 때마다 지금의 통념이 편하고 이득인 사람들은 반발하고 있다. 백래시에 움츠러들어 차별과 폭력의 해소를 미룬다면 앞으로의 역사는 다르게 쓰일 것"이라며 "차별과 폭력에 저항하려는 일상의 작은 노력은 어쩌면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게 될 씨앗인지도 모른다"고 썼다. 황 교사는 "페미니즘이나 젠더 이슈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은 백래시로 인해 잦은 좌절을 겪을 것이다. 이들에게 원래 변화는 오래 걸리는 것이고 그렇게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근 책 <볼 영화 없는 날: 차별을 넘어 차이를 잇는 페미니즘 영화관>을 펴낸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 교사 김시원·김수진·황고운씨(왼쪽 위부터 시계방향)가 26일 서울 강남구 한 모임 공간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프레시안(이상현)

"학교 체육의 역할은 차이가 있어도 함께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 

저자들이 펴낸 내용은 교실에서 마주친 현실과 연결돼 있다. 책은 <아이 필 프리티>를 통해 외모 강박을 다뤘다. 저자들은 어른 여성들뿐 아니라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외모에 대한 강박을 흔히 목격한다고 했다. 마른 여자 연예인들을 영상으로 계속 접하며 자기 몸을 대상화하는 과정을 초등학교 여학생들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김시원 교사는 "어른들 시각에서 보면 다른 능력이 뛰어나서 외모에 신경 안 쓸 것 같은 아이들도 외모 강박에 사로 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밥도 적게 먹고 사진이 자동으로 보정되는 휴대폰 카메라앱을 사용해 실제 자신의 얼굴과 대조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저자들은 어른들도 벗어나지 못하는 외모 강박을 아이들이 완전히 벗어버리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외모 평가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교실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황고운 교사는 "서로 외모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무례한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면 관련 대화가 적어진다. 그 빈 공간에 다른 이야기가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학생들이 몸의 모양에 너무 집중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교실에서 거울을 없애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책은 또 <당갈>(2016), <야구소녀>(2020)를 통해 여성이 스포츠에서 배제되는 모습, 그리고 이를 이겨내는 모습을 여성 운동선수들의 풍부한 예시를 통해 다뤘는데 이 역시 저자들이 실제 체육 수업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다. 저자들은 체육 교육을 할 때 관성적으로 성별로 종목을 나누거나 역할을 나누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또 운동 능력 등 개인 별로 기량이 다르다고 해도 "차이가 있어도 같이 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게 학교 체육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황고운 교사는 "경험적으로 보면 여학생들은 운동을 싫어하고 특히 축구 등 구기 종목을 싫어한다는 통념은 현실과 거리가 있다. 단지 늘 축구만 하면서 노는 아이들과 아닌 아이들의 기량 차이가 나고 이에 따른 성취감 차이도 나는 것"이라며 "모든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단계까지 훈련할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수진 교사는 "아이들 간 기량 차이가 크게 나는 경우는 모두 즐길 수 있는 새로운 규칙을 고안하는 방법도 있다"고 덧붙였다.

"제대로 된 성교육이 젠더 폭력 예방의 출발점" 

책은 영화 <피의 연대기>(2018)를 소개하며 월경을 감춰야 할 것으로 여기는 관습은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실제 수업 때 이뤄지는 월경 교육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저자들은 월경 관련한 수업이 학생과 학부모들의 호응이 높은 편이며 직접 월경 용품을 만져 보는 것을 학생들이 무척 재미있어 하고 남학생들의 경우 월경을 겪는 여자형제를 이해할 수 있어 유익했다는 반응도 나온다고 했다.  

저자들은 지난해 월경 관련 내용을 포함해 성폭력 예방교육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성교육 교안을 고안하기도 했다. 계기는 'n번방 사건'이었다. 김수진 교사는 "n번방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청소년이었다. 초등학생 대상의 디지털 성범죄 예방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며 "젠더 폭력은 잘못된 성인식에서 비롯된다. 제대로 된 성교육이 예방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성폭력 교육은 '피해 예방'이 아닌 '가해 예방'에 초점을 둔다. 황고운 교사는 "가해 예방 교육을 해 보면 학생들이 대체로 피해자에 이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육 진행 때 '가해 하지 말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저자들은 새로 연구한 성교육 교안에 대한 동료 교사들의 수요가 높고 학부모들이 성교육 관련 서적 등에 대한 문의를 해 오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그만큼 제대로 된 성교육에 모두가 목말랐다는 이야기다. 황고운 교사는 "학생들의 경우 스스로의 신체가 변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이미 온라인으로 자극적인 정보를 많이 접한 상태여서 궁금증이 크다. 안전한 공간에서 교사들과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자들은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현장에서 젠더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김수진 교사는 "학생들이 계속 자라고 있으니 일 년 동안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특정한 모습으로 변화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평등한 공간'에 대한 인식이 생긴 학생들이 중등학교에 가서 차별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실제로 졸업생이 성평등 인권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온 적도 있다"고 했다. 김시원 교사도 "싹이 날 지 안 날 지는 몰라도 씨앗을 심는 마음"이라며 "학생들이 불평등을 감지했을 때 '내가 예민해서'라는 식으로 자책하지 않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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