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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나무 리포트] 무속교회 무당 목사를 보게 된 대선판

그래서 할아버지가 제사상 앞에 지방을 붙여두면 거기에 십자가를 그리고, 빨랫줄을 걷어 놓으면 다시 걸어 놓고 문을 열어 놓으면 닫는 등 방해 공작을 펼쳤다.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손녀의 철없는 행동이니 할아버지도 크게 혼내진 못하시고 난처해하셨던 기억이 있다. 내 경험은 아주 소소한 일화다. 내 경우는 잠시의 경험이었고, 이후론 추도예배로 바뀌어 서로 신경전을 벌일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제사도 우상숭배고 타 종교와 화합하는 것도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던 목사들.
나라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동성애와 이슬람을 막기 위해
순교할 각오라던 목사들. 코로나19가 창궐한 상황에서도
대면 예배를 고집하면서 방역에 훼방을 놓던 목사들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무속 논란에 대해 입을 꾹 다 가운데 명절만 되면 제사가 큰 고민인 집들을 적잖게 봐왔다. 게다가 명절에 친인척을 만나면 제사 문제로 싸우게 되니 차라리 가지 말라고 하는 교회들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그래서 교인들을 교회에만 묶어 두고, 친구는 물론 친인척이나 가족과도 단절하게 만드는 교회들의 이야기를 지난 해에만도 여러 건 들었다. 그 가운데는 교회 규모가 꽤 크고 개신교계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목사도 있다.

 

동성애기독시민연대, 한국교회수호결사대 등 단체 회원들이 2020년 6월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반대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평등기본법)은 동성애 독재법"이라 주장하고 있다. ⓒ뉴시스


그뿐인가. 타 종교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만 보여도 몹쓸 말들을 듣게 되는 게 한국 교회 현실이다. 수년 전 개신교인이 훼손한 불상을 복원해 주기 위해 모금 운동을 펼쳤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파면당하고 복직되기까지 5년간 눈물겨운 투쟁을 벌인 손원영 교수(서울기독대학교)의 사례만 봐도, 보수개신교의 배타성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차별금지법이 통과하면 동성애가 창궐해 한국의 성 윤리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질 것이라는 목사들, 이슬람과 신천지 등에 장악돼 교회가 위기를 맞을 것이라며 거품을 물고 반대하던 목사들의 행동력은 매우 과감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제사도 우상숭배고 타 종교와 화합하는 것도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던 목사들. 나라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동성애와 이슬람을 막기 위해 순교할 각오라던 목사들. 코로나19가 창궐한 상황에서도 대면 예배를 고집하면서 방역에 훼방을 놓던 목사들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무속 논란에 대해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무속도 상관없다. 정권교체만 이루만 된다”?


2년 전 법무부의 신천지 압수수색 지시를 거부한 게 건진법사 전 모 씨의 조언을 들은 탓이라는 보도가 나와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신천지는 보수개신교가 얼마나 경계하는 대상인가. 그래도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면, 신앙적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하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보수 목사 10여 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봤더니 한결같이 “어떤 사안인지 모른다”, “관여하지 않겠다”며 부담스러워했다. 그동안 본인들이 내 건 후보로 개신교가 혐오의 종교가 됐다고 비난을 받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던 기백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 “무속도 상관없다. 정권교체만 이루만 된다”는 답변을 낸 목사도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가 지난해 10월 10일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다. ⓒ뉴시스


아예 이런 와중에도 노골적으로 서울의 모 호텔에서 국민의힘 관계자들과 윤석열 후보를 만나 힘을 모아주는 극우 목사들도 있다.(호텔에서 비싼 밥도 드셨을 텐데, 그 또한 교인들의 헌금일 것을 생각하면······.) 29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날 김건희 씨가 윤 후보의 권유로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을 만났다고 한다. 김 씨의 주술적 사고와 정치적 욕망을 꾸짖기는커녕 “인내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기도로 위로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평화나무 기사에 달린 어떤 이의 댓글이 떠오른다. ‘동업자라서 서로 이해하고 넘어간다’는 뼈 때리는 비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개개인이 선거철에 누구를 지지하는지는 자유겠지만, ‘무속 정치’ 우려가 나오는 마당에 나라 사랑을 그처럼 외쳐온 목사들이 비판 한마디 하지 않는 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들에게서 기독교 신앙의 양심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던 게다. 최순실 사태를 겪고도 깨닫는 게 없다니, 역사를 통해 배운 게 없는 이들이고, 그간 교인들에게 자신들이 해 온 말들이 있는데 이중성을 시시때때로 드러내는 자들이다.

최성해 전 동양대 총장은 ‘무속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정치인 치고 점 한 번 안 본 사람이 있겠냐”는 식으로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특히 지금처럼 눈만 돌려도 사주까페나 타로 점집들을 가까이서 보고 무속인 유튜버까지 등장하는 시대다. 힘들고 어렵고 억압받던 시대 민중의 한을 풀어주던 무속의 역할도 분명 존재할 터다.
 

손바닥에 왕(王)자 대신 십자가를 그리고 나와 토론을 한다 한들,
교인들을 길들이며 자신의 세를 키우고 배를 불려온 목사들의 말에
휘둘린다면 그게 주술에 휘둘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러나 무속이 정치에 개입해 누군가의 사리사욕을 위해 활용됐다면 그건 매우 다른 얘기지 않나. 나라의 중요한 수사 상황이 누군가의 출세를 위해 무속인의 조언에 의해 좌지우지됐다면, 과연 ‘그럴 수도 있지’라고 가볍게 넘길 일인가. 향후 국정 운영이 무속인의 말을 따라 합리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결정되고, 국정이 파행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목사들을 보면서 그동안 외쳤던 ‘애국’, ‘교회사랑’은 무엇이었나 싶은 게다.
 

그래서 또 우려하는 것이다. 윤 후보 주변 이런 무속적 목사들의 연대를 말이다. 기독교 은행을 설립하겠다며 교인들로부터 23억 원을 갈취한 혐의로 7년간 옥살이한 강보영 목사, 뉴라이트의 대부 김진홍 원로목사, 2011년 불거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금권선거의 주역이자 길자연 원로목사, 그런 길자연 원로목사 등의 지지를 받으며 막말에 사회 혼란을 일으키고도 자칭 선지자 행세를 하는 전광훈 목사 등, 사실상 뒤에 목사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이들이 모두 한결같이 직·간접적으로 윤석열 후보를 지지한단다. 더구나 전광훈은 설교 시간 김건희 씨를 향해 ‘X같은 X’라고 욕설을 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는 ‘다루기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게 전광훈 측근 조나단 목사의 설명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해 10월 1일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 정책 토론회에 출연해 손바닥을 펼치며 상대 후보의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 손바닥에는 임금 왕(王) 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다. ⓒ출처 :화면캡쳐


윤 후보가 이런 목사들을 향해 선을 긋지 않는 것도 무속논란 못지않게 더 안타까운 일이다. 아니, 이 역시 주술적 무속 논란의 연장성장으로 보이는 건 나뿐인가. 유력 대선 후보의 행보에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까지 든다. 만약, 손바닥에 왕(王)자 대신 십자가를 그리고 나와 토론을 한다 한들, 교인들을 길들이며 자신의 세를 키우고 배를 불려온 목사들의 말에 휘둘린다면 그게 주술에 휘둘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냐는 말이다.
 

‘복채’를 내듯 헌금을 내고, 못 살던 사람이 잘살게 된
누군가의 이야기를 간증이랍시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면서
본받자고 기도하고, 그 이면에 어떤 불의한 일이 있었는지에는
눈 감았던 신앙과 결별하고 기복이란 고질병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 최근 윤석열 후보의 무속 논란에 무교인들이 꽤나 많이 속상했다고 한다. 윤석열 후보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건진법사 등의 무속인들과 같이 싸잡혀지는 것에 대한 속상함이라고 한다. 그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무교인 중에서도 종교로서 인정받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무속보다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를 고등종교로 여기는 이유는 그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가 개인의 길흉화복에 머물지 않고 공공성과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봤을 때, ‘다루기 좋은 후보라서 윤석열을 지지한다’는 전광훈류 목사들의 사고는 가장 주술적 형태의 정치 개입을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

교인이라도 깨어날 때다. ‘대형화’와 ‘성공’, ‘성장’ ‘높은 자리’를 쫓다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사회 정의에도 눈이 멀어버린 무늬만 아니, 이름만 목사인 자들의 상술에서 더는 놀아나기를 거부해야 한다. ‘복채’를 내듯 헌금을 내고, 못 살던 사람이 잘살게 된 누군가의 이야기를 간증이랍시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면서 본받자고 기도하고, 그 이면에 어떤 불의한 일이 있었는지에는 눈 감았던 신앙과 결별하고 기복이란 고질병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음’으로 위장해 세속적 복을 미끼로 교인들을 현혹하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아멘 할렐루야’를 동시에 외치며 성장해 온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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