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좌파 지식인 타리크 알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전쟁 약 3개월 전인 지난 해 11월, 독일 해군 참모총장 아킴 쇤바흐 제독은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군사 세미나에서 서방이 러시아를 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독일 정부에 의해 즉각 해직됐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푸틴에게 약간의 존중만 표시하면 된다! 여기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는다. 푸틴이 원하고 있고, 또 당연히 받아야 할 존중을 표시하는 건 별 대단한 일도 아니다. 러시아는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이며 중요한 나라다. 인도도 독일도 중국에 맞서기 위해 러시아가 필요하다.'
그의 해직 후 독일의 존경받는 군인이자 나토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하랄트 쿠야트 장군은 한 TV 인터뷰에서 '내가 아직 현직에 있었다면 쇤바흐 제독의 발언을 옹호하는 것은 물론 그의 해직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현 상황과 관련해 양식 있는 결과, 즉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고려하면서 러시아와의 긴장 상태를 해소하는 것이 우리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발언은 온라인에서 곧 삭제됐다고 한다. (<뉴 레프트 리뷰> 2월 16일 뉴스레터 'News from Natoland')
이 에피소드가 의미하는 것은 나토를 통해 미국에 군사적으로 예속된 유럽이, 내부 이견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대외정책을 추구하지 못하면서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을 심각하게 손상할 미국 주도의 러시아 제재 및 경제 관계 단절에 끌려들어갔다는 점이다. 1985년 미국의 강요로 달러 대비 엔화 가치를 일거에 두 배 상승시켰다가(플라자 합의) 5년 후 거품 붕괴로 경제적 활력을 상실한 일본의 사례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미국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은 앞으로 러시아와의 경제 관계를 단절한 유럽이 가스, 무기, 식량 등의 조달을 미국에 크게 의존하면서 국제 수지 적자가 늘어나고 유로 가치가 하락하는 등 커다란 경제적 곤경에 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물론 이러한 허드슨 교수의 미래 세계 경제 예측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전쟁을 깔끔하게 정리한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그 결과를 장담하기는 어렵다. 최근 바이든 행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늘리면서 전쟁의 장기화, 나아가 푸틴 정권의 교체나 러시아 자체의 붕괴까지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원문('The Dollar Devours the Euro')은 미국의 진보 매체 <카운터펀치> 4월 8일자에 실려 있다. 편집자
신냉전의 격화는 이미 1년 전부터 계획됐음이 분명해졌다. 미국이 계획한 전략 목표 중 하나는 노르트 스트림2의 개통을 저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유럽(나토)과 중국 및 러시아와의 상호 교역 및 투자를 통한 번영의 추구를 봉쇄하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과 미 국가안보 보고서들이 선언했듯이, 오늘날 미국의 주적은 중국이다. 중국이 제조업 생산을 도맡은 덕분에 탈산업화된 미국 경제의 임금 수준을 낮추는 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성장은 미국에게 궁극의 공포(Ultimate Terror), 즉 사회주의적 번영을 의미한다. 사회주의적 산업화는 언제나 지대 추구 경제(rentier economy)의 최대의 적이었다. 그런데 세계는 1차 대전 이후, 특히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1980년대 이후는 지대 추구 경제가 장악해왔다. 그 결과 오늘날 두 개의 경제 시스템, 즉 사회주의적 산업화와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가 대결을 벌이게 된 것이다.
중국을 겨냥한 신냉전은 앞으로 오랜 기간 계속될 3차 대전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전략은 중국의 잠재적 경제적 동맹 세력, 특히 러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아시아 등을 중국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문제는 어디서부터 분리 및 고립 작전을 시행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가장 유망한 지역으로 꼽혔다. 러시아를 중국 및 유럽의 나토 동맹국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러시아와 나토의 교역을 막기 위해 일련의 가혹한-희망컨대 치명적인-제재 계획들이 마련됐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지정학적 대격변을 촉발시킬 수 있는 '교전 이유(casus belli)'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다. 신냉전의 격화는 중동지역이나 동아프리카에서 시작될 수도 있었다. 예컨대 미국의 이라크 석유 자원 탈취 시도나 이란 경제 제재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될 수도 있었고, 동아프리카 지역의 쿠데타 계획이나 색깔혁명, 또는 정권 교체 시도에서 시작될 수도 있었다. 지난 1,2년간 미국의 아프리카 군 병력은 급속하게 강화됐다. 그러나 2014년 마이단 쿠데타 이후 미국의 지원 아래 8년간 내전이 지속되고 있었던 우크라이나가 최적의 후보지로 꼽혔다.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최초의 커다란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전쟁이 벌어졌고, 전쟁은 미국 주도 러시아 제재의 빌미가 됐으며, 유럽은 미국의 방침을 충실히 따라 러시아산 가스와 석유, 그리고 곡물의 구매를 중단했다. 유럽은 향후 이것들을 미국에서 구매할 것이다. 미국산 무기와 함께.
달러 대비 유로 가치의 하락
그렇다면 앞으로 서유럽의 경상수지와 달러 대비 유로의 가치는 어떻게 될까? 이번 전쟁과 경제 제재 이전, 유럽의 교역 및 투자는 독일, 프랑스 등 나토 국가들과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상호 번영의 증대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는 유럽에 싼 가격의 에너지를 풍부하게 공급하고 있었고, 특히 노르트 스트림2의 완공은 에너지 공급의 획기적 증대를 이룰 것이 분명했다. 유럽은 러시아에 대한 제조업 수출과 자본 투자를(예컨대 독일 자동차 공장의 러시아 진출 등) 통해 러시아 경제를 발전시키는 한편 에너지 수입을 위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상호 교역과 투자는 이제 중단됐고, 앞으로 오랜 기간 재개되지 않을 것이다. 나토가 러시아의 유로 및 파운드 표시 외환준비금을 압수한 데다, 미국 선동매체의 영향으로 지금 유럽에는 러시아혐오(Russophobia)가 극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토는 미국에서 액화천연가스(LNG)를 살 것이다. 그런데 LNG 운반을 위한 항만 시설을 건설하려면 수십억 달러가 필요하며 2024년 말이나 돼야 건설이 끝날 것이다. 에너지 부족은 세계적으로 석유와 가스 가격을 크게 올릴 것이다. 나토 국가들은 또한 미국산 무기 구매를 한층 늘릴 것이다. 무기 구매 경쟁이 벌어지면서 무기 가격 역시 오를 것이다. 식량 가격 또한 오를 것이다. 전쟁 여파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곡물 수출을 중단한 데다, 가스 부족으로 비료 생산마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와 무기, 식량 확보에서 유럽은 불리한 위치에 있다. 미국의 수출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달러 대비 유로는 가치가 떨어질 것이며 미국과의 국제 수지 적자 폭도 커질 것이다. 유럽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미 국 내에서 보호주의가 강화되고 세계적으로도 자유무역이 죽어가는 지금, 유럽은 미국에 무엇을 팔아 국제 수지와 유로 가치를 방어할 수 있을까? 대답은 '별로 없다'이다. 그럼 유럽은 무엇을 해야 하나?
나에겐 하나의 복안이 있다. 그냥 유로를 포기하고 달러를 공용 화폐로 쓰는 것이다. 이제 유럽은 정치적 독립을 사실상 포기했고 파나마, 라이베리아와 거의 비슷하게 보인다. 자신의 통화를 발행하지 않고 달러를 공용 화폐로 사용하며, 외국인 투자자들의 역외 금융 센터로 활용되는 '국가 아닌 국가' 말이다. 재정 적자가 GDP의 3%를 넘지 않는 선에서 통화(유로) 발행을 할 수 있는 유로존 국가들은 무한정 달러 발행이 가능한 미국에 적수가 되지 않는다. 즉 미국과의 금융전쟁은 불가능하며, 유로를 달러로 대체하는 수밖에 없다. 에콰도르, 소말리아와 같은 달러화 사용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 방법만이 유럽과의 교역에서 유로 가치 하락을 우려하는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대안은 미국과의 국제 수지 적자를 그냥 감수하는 것이다. 그 경우 달러 대비 유로 가치는 급격히 하락할 것이며, 금리는 오르고 투자는 위축돼 유럽의 더욱 수입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즉 유로존은 경제적 사망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적어도 극단적 수단을 통해 유럽에 대해서만은 달러 패권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유럽대륙은 푸에르토리코의 확대판이 되는 셈이다.(푸에르토리코는 1898년 미국에 합병됐으나 아직 참정권이 없다. 즉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다)
달러 대 남반구 국가들의 통화
우크라이나전쟁에 의해 촉발된 3차 대전은 앞으로 적어도 10년 내지 20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 전쟁을 전 세계에 걸친 신자유주의 대 사회주의 간의 대결로 몰아가고 있다. 유럽에 대한 경제적 정복과는 별도로 미국 전략가들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유럽에서와 비슷한 분리, 고립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에너지 및 식량 가격의 급격한 상승은 식량 및 석유 부족 국가들에 큰 타격을 줄 것이며, 동시에 달러화 표시 외채 상환 부담도 가중시킬 것이다. 자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가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 특히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굶든가, 석유 및 전력 사용을 줄이든가, 달러를 빌리든가(현 국제 무역체계에서 물자를 구입하려면 달러가 필요하므로)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국제 수지 적자 국가들을 돕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이 신규 특별인출권(SDR)을 발행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용 공여에는 언제나 조건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IMF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정책을 따르지 않는 국가들에는 제재를 부과해 왔다. 현재 미국의 최우선 요구는 중국, 러시아와는 교역도 하지 말고 이들이 추구하는 별도의 통화동맹에도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 미국 관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적이라고 선언한 러시아, 중국 및 여타 국가들에게 쓸 게 뻔한데, 우리가 왜 SDR이나 달러 차관을 제공해야 하는가?"
최소한 이것이 미국의 계획이다. 조만간 아프리카 어느 나라가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된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아프리카에는 극단적 이슬람주의자와 용병들이 넘쳐나며, 이들은 미국의 하수인으로서 러시아의 곡물과 에너지로 자립적 경제를 이루려는 국가들, 나아가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에 참여하려는 국가들을 상대로 대리전을 펼칠 것이다. 즉 미국은 세계를 상대로 신자유주의적 지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 세계 경제는 불타오르고 있다. 미국은 군사적 대응과 함께 자국산 석유와 식량 수출, 그리고 무기 수출의 무기화를 준비해 왔으며 이제 각 나라들에 대해 미국과 러시아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럽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 노동조합은 이미 러시아 제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반유럽연합, 반미 성향의 헝가리 총리 빅토 오르반은 최근 4선에 성공한 뒤 러시아산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지급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것인가?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가?
미국에게 선택을 강요당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남반구 국가들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 이들에게 닥친 식량 및 에너지 부족 및 가격 폭등은 단순히 강대국 간 갈등에 따른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미국의 세계 전략의 핵심이다. 미국은 세계를 두 개의 경제 진영으로 분열시켜 상대편을 파멸시키려 한다. 인도는 이미 (러시아 제재에 참여하라는) 미국 정부의 요구에 대해 인도 경제는 러시아 및 중국 경제와 자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대답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펼쳐지고 있는 3차 대전이 진정한 경제 체제 간의 대결임을 말해준다.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통합인가, 아니면 미국의 간섭에 따라 그저 미국의 대외정책을 추종하다 재앙을 맞을 것인가? (2014년 마이단 쿠데타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 빅토리아 눌란드는 우크라이나 민주화에 50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고 자랑했으나 그 결과는 내전과 러시아의 침공이었다)
정치적 간섭과 서방 매체의 선동 속에서,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세계는 이번 전쟁의 본질이 세계적 규모의 경제 전쟁임을 깨달을 수 있을까? 사태의 진상이 분명해질 때쯤 되면 러시아, 중국과 유라시아는 이미 신자유주의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수립했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나토 국가들은 이미 쓸모없는 존재가 돼있을 것이며, 중국/러시아/유라시아 경제블록의 신뢰를 잃는 것은 물론 상호 경제 교류의 혜택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군사적 전장 여기저기에는 경제전쟁에서 패배한 시체들이 나뒹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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