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순례’ 나선 길위의 신부 문정현
12년째 강정마을 지킴이 하다가 ‘봄바람 순례단’ 끌고 북상중
독재 횡포 보며 독실한 신부에서 민주와 평화운동가로 진화
성소수자·동물권에도 마음 열어…“길 위에서 늘 배우는 덕분”
‘길 위의 신부’가 다시 길에 섰다. 지난달 15일 제주 강정에서 출발한 문정현 신부(82·이하 호칭 생략)는 전국 방방곡곡의 아픈 사람과 상처받은 땅들을 찾아다니며 북상하고 있다. 이번에는 ‘다른 세상을 만나는 순례 ― 봄바람’이다. 2004년 ‘평화유랑단’을 이끌고 전국을 돌아봤던 이후 18년 만이다.
지난 6일과 7일 충남 아산과 천안에서 ‘봄바람’을 몰고 다니는 문정현을 만났다. 그는 힘없고 약한 사람들과 만나서는 조곤조곤 대화했지만, 억압하는 자들을 향한 투쟁을 말할 때는 여든둘 나이가 무색하게 포효했다. 충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아산)와 한빛장애인평생교육원(천안)에서의 문정현은 따스한 봄볕이었으나, 천안터미널 앞에서 열린 충남 민주노총 문화제에서 마이크를 쥔 문정현은 천지를 울리는 한여름 우레였다.
봄바람 순례단은 전북 군산과 제주 강정에서 문정현과 공동체 생활을 하는 오두희, 딸기, 구중서, 오이 등 ‘평화바람’ 식구와 문정현의 동지 친구인 한경아, 한상욱 등이 고정 멤버이며, 가는 곳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길동무들이 함께하고 있다. 순례단은 오는 30일 서울에서 ‘다른 세상을 만드는 4·30 대회’를 열어 장정을 마무리한다. 그날 용산에서부터 종로 보신각까지 행진도 예정하고 있다.“강정에서 생활한 지가 12년째인데 가끔 뭍으로 나오긴 해도 오랫동안 제주에만 있다 보니 외롭기도 하고 갑갑하잖아요. 맨날 패턴이 똑같으니까. 근데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는 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특히 비정규직 문제는 전국이 아우성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한번 나가서 아픈 곳을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오자고 해서 시작한 거예요.”
지금까지 순례단은 부산의 가덕도 신공항 반대 집회 현장, 울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서진이엔지의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투쟁 현장, 경북 성주 소성리 사드 기지 공사장, 전북 새만금 신공항 예정지 수라갯벌, 대전 골령골 한국전쟁 집단학살지, 경기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강원도 양양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투쟁 현장 등을 찾았다. (순례 일정과 길동무 신청 링크 bit.ly/3KLgwin)“대통령 선거와는 상관없이 선거일 훨씬 전에 순례를 결정했어요. 그런데 선거 결과가 나온 뒤에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더 지치고 힘든가 봐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찾아줘서 고맙다’고 반가워하면서 굉장히 큰 힘을 얻는 것 같아요. 이런 게 바로 봄바람이지 뭐.”
1970년대부터 ‘깡패 신부’로 유명했던 문정현은 2000년대 들어서는 아예 길 위에 진을 쳤다. 2004년 1년간의 평화유랑단 생활에 이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2년간은 평택 미군기지 반대 투쟁을 위해 싸움터인 대추리에 살았다.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철거민 등 5명이 숨진 용산에서도 2009년 1년 가까이 유가족들과 숙식을 함께 했다. 2011년 7월 제주 강정마을에 들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강정 해군기지 앞을 지키고 있다. 약자들 편에서 싸운 사제들은 많았어도 그처럼 수십년간 평화를 외치며 외롭고 힘든 사람들과 함께 사는 신부는 없었다.
“무조건 나는 탄압받는 사람 편, 고통받는 사람 편에 있었죠. 그러느라 길에서 살았는데 길 위의 신부라고 불러주니 감사하죠. 앞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으면 몰라도 이렇게 살다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길에서 쓰러지면 보람된 일 아니겠어요.
”문정현은 10살 때부터 신부가 되기를 꿈꿨다. 친가와 외가 모두 대대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 환경에서 성장한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4남3녀의 형제 중 수녀(문현옥)와 신부(문규현) 등 세 남매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문정현은 1966년 사제 서품을 받고 전주 전동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신학생 시절 5·16 군사쿠데타 소식에도 별 느낌이 없었을 정도로 정치 사회적 의식이 없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고, 병들고 아픈 신자들을 정성껏 돌보는 착한 신부였다. 평범한 사제가 열정적인 투사 신부로 변하기까지는 시간과 계기가 필요했다. 그가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눈뜬 것은 박정희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1974년 원주의 지학순 주교를 구속했을 때였다. 이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창립에 적극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2차 인혁당 조작사건 피해자의 구명운동에 앞장서는 등 ‘운동권 신부’가 됐다. 1976년 명동성당 3·1민주구국선언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함세웅 신부 등과 함께 구속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정권이 감히 가톨릭 주교를 불법 연행하고 구속하다니’라는 생각에서 분노했지 특별한 정치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인혁당 가족이나 민주화운동으로 핍박받는 사람들의 억울한 얘기를 직접 들으면서 차츰 생각이 넓어졌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한 사목헌장(1965년) 등이 이제 피부에 와닿고,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던 거죠.”
영혼이 맑았던 신부가 기층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985년 전북 장수의 장계성당에서는 소값 피해 보상 운동 등 농민들의 싸움에 동참했다. 1988년 그가 주임신부로 부임한 익산의 창인동성당은 노동운동의 메카로 불릴 정도로 지역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는 생존권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을 교회의 품으로 안는 것을 넘어 그들과 하나가 돼 투쟁했다.
“창인동성당의 숙소 바로 아래에 익산 노동자의 집이 있었어요. 화염병을 만드느라 밤늦게까지 병이 달그락거리고, 천을 쫙쫙 찢는 소리가 다 들려요. 안 되는데 싶어서 ‘야, 화염병 만들지 마! 사람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해’라고 고함을 치지.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안 들어요. 다음날 경찰이 성당 인근을 쫙 둘러싸고는 최루탄을 터뜨리면서 노동자들을 잡아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노동자들도 맞서 화염병을 던지고 싸우기 시작하고. 나는 좀 자유로우니까 경찰 뒤쪽으로 가서 최루탄 쏘는 경찰들을 잡아채고 하죠. 그러면 나를 자꾸 연행했다가 풀어놓고 해서 화가 나는데 노동자들을 막 끌고 가니까 어느새 나도 화염병을 던지고 있는 거야. 그러면서 ‘야, 화염병 더 없어?’라고 묻고 있더라고. 화염병을 만들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화염병을 왜 던지며, 그것밖에 안 만들었냐고 했으니 그런 모순이 없지. 하하.
”군의 정보기관인 보안사가 만든 문건(1990년)에는 문정현을 이렇게 표현했다. “개인 번호 169 문정현. 전북 지역의 대표적 문제 인물. 외고집에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별명은 ‘깡패 신부’. 3, 4공화국 당시 반정부 활동으로 수감.” 실제로 그는 불의와 싸우고 부당한 일에는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장계성당에 있을 때였다. 당시 경찰과 안기부(국가정보원의 전신)는 3·1절만 다가오면 그를 차에 태워 먼 곳으로 데려갔다. 한번은 경북 울진의 백암온천으로 차가 달려가고 있는데 그가 꾀를 냈다. 소변을 보겠다면서 차를 길가에 세우게 한 뒤 볼일을 보는 척하면서 돌덩이를 주워서 경찰차와 뒤따르던 안기부 차의 유리창을 깨는 등 거의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장계성당에 데려다줬다. 화가 난 문정현은 장계지서를 찾아가 현관 유리창을 박살낸 뒤 전주의 경찰청으로 이동해 그곳 정문 유리창도 깨고는 경찰청장실에 쳐들어가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그러고는 가톨릭 전주교구청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가 결국 열흘 뒤 경찰의 사과를 받아냈다.
“그때 경찰이 요주의 인물들을 차 태워서 여기저기로 끌고 갔는데 대부분은 포기하고 며칠 지내다가 돌아오곤 했지만, 나는 용납할 수가 없더라고요. 돌아보면 항상 직선이었지 타협은 안 했어요 나는. 아침에 차를 몰고 나설 때는 오늘은 조심하면서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라고 항상 다짐하는데 막상 현장에 도착하면 그게 안 돼요. 경찰이 내 차를 둘러싸고 문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하거든. 그러면 창문으로 빠져나와서 내 차 위에 올라가서는 막 발산을 하면서 육박전을 하고 난리를 치죠. 그렇게 해서 경계를 뚫고 들어가면 현장에서 며칠이고 버티곤 했어요.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행동했죠. 하하
.”그는 어릴 때부터 외고집이었다. 초등학교 4~5학년 무렵 자신을 함부로 대하던 동급생 덩치 큰 아이를 참다못한 그는 어느 날 하굣길에 기다리다가 싸움을 걸었다. 당연히 두들겨 맞았지만, 그는 한달 내내 같은 장소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싸웠다. 마침내 그 아이가 잘못했다며 두 손 들었다.
“전혀 의식을 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글쎄 그런 기질이 있었던 것도 같네. 부당한 것을 보면 못 참고, 어떤 일을 하면 끝까지 가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거든요. 대추리와 용산에서도 싸움의 주체인 당사자들이 그만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마지막에 나왔지 내가 중간에 끝낸 적은 없었어요.”
그러나 문정현은 치열한 삶 가운데서도 사랑과 긍휼을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장계성당에 있을 때, 한 마을을 방문했을 때 부모가 들판으로 일하러 가면서 지적 장애가 있는 여자아이를 감나무에 묶어놓고 밥그릇을 근처에 두고 간 것을 봤다. 왈칵 눈물을 쏟은 그는 곧바로 사제관 옆의 창고를 방으로 만든 뒤 부모 허락을 얻어 그 아이를 데려왔다. 그런 아이들이 금방 13명으로 불어나서 1986년 익산에 ‘작은 자매의 집’을 열었다. 2008년 자매의 집 원장을 은퇴할 때까지 아이들과 지내는 일이 문정현에게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투쟁하면서도 성당 생활에 소홀하지는 않았지. 예를 들면 병자 방문을 그렇게 많이 했어요. 일주일에 한번씩 아픈 사람을 방문하는 건 기본이고, 사고를 당한 신자가 있다든가 하면 수시로 쫓아가서 기도하고 그랬어요. 자매의 집 아이들과 헤어질 때는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어요.
”1989년 대학생 임수경이 전대협 대표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갔을 때였다.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방북한 것이어서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문정현은 천주교 신자인 임수경을 데리러 신부를 파견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이에 정의구현사제단은 미국에 머물고 있던 문정현의 동생 문규현을 파견했다. 문정현은 동생에게 “군사분계선을 넘다가 유엔군에게 총을 맞아 죽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판문점으로 돌아오라. 제3국으로 오는 것은 의미 없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동생이 다른 사람을 시켜서 나한테 전화해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더라고요. ‘죽더라도 군사분계선을 넘어라’라고 했지만 내가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지금도 그 생각 하면 마음이 아파요. 그러나 설령 순교를 하더라도 남북 분단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죠.
”문정현의 순교자적인 정신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 모른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돼 있을 때 첫 면회를 온 어머니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우리 아들 김대건 신부 돼야 돼”라고 말했다.“감옥에서 어머니를 보는 것이 두려웠어요. 나를 만나면 오열하면서 실신할까 봐 굉장히 걱정했는데, 순교자가 되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더라고요. 참 당당하셨지, 우리 어머니.”
1997년 군산 미군기지의 활주로 사용료 투쟁은 문정현의 삶에서 또 하나의 변곡점이었다. 군산 오룡동성당 주임신부 시절 미군이 군산기지를 이용하는 민간 항공기에 대한 사용료를 올린 데 대해 처음에는 미군의 처사가 부당하다는 생각에서 시민들과 함께 반대운동에 나섰지만, 차츰 미군 부대의 오·폐수 유출로 인한 환경오염과 범죄, 자주권 침해 등 한·미의 불평등 관계와 한반도 평화라는 본질적 문제를 깨달았다. 그는 2000년대 초 소파(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운동을 거쳐 화성 매향리 사격장 폐쇄, 부안 핵폐기장 반대, 평택 미군기지 이전과 제주 강정 해군기지 반대 등 평화운동가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2016년 해군기지가 완공된 이후에도 강정마을에 머물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기지 정문 앞에서 100배를 하고는 아침 먹고 미사를 드리지. 미사 끝나면 인간띠 잇기를 하고. 함께했던 사람들도 거의 다 떠났는데 왜 나는 계속 있느냐고 사람들이 물어요. 평화의 섬 제주도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죠. 강정기지는 그걸로 끝나는 게 아녜요. 군사기지로 쓰려고 하는 무안공항과 군산기지 등 서해안의 군사벨트로 연결되거든요. 강정기지도 다 끝난 게 아니라 주변 레이더 시설 등을 더 갖추려고 하고 있고요. 그러니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어야 해요. 내가 별거는 아니겠지만, 나마저 떠나면 영향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힘이 닿는 한 강정을 지키려고요.”
문정현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늘 진화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그동안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혐오나 반대는 아니지만 대개의 사제들처럼 외면했다. 용산 참사 다큐멘터리인 <두 개의 문>을 만들었던 ‘연분홍치마’ 감독들과 친하게 지냈던 그였지만, 연분홍치마가 성소수자 영화 단체라는 것을 안 뒤에는 거리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문정현은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을 지낸 김기홍씨의 사망 직후인 지난해 3월 페이스북에 “세상을 떠난 김기홍님이 드문드문 생각납니다. 여기저기 집회 장소에서 자주 보았지만 다가가 인사를 나눈 일이 없습니다. 왜 내가 먼저 다가가지 못했을까? 김기홍님도 그러지 못했나 봅니다. 제 잘못이었습니다. 저 자신이 이 사람을 죽게 하였나 봅니다. 요즘 미사 중에 이름을 호명하며 기도합니다. 용서하세요”라고 적었다. 지난 8일에는 봄바람 순례단과 함께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 하사가 잠들어 있는 청주의 한 추모공원을 찾았다.
“젠더 문제 등에서는 내 정서와 아직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함께 사는 평화바람 식구들과 얘기하면서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길 위에서 만나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많이 듣고요. 또 김기홍씨 등의 죽음을 보면서 동정심이랄까 이해심이 생긴 것 같아요.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성소수자 문제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씀도 내 가슴에 꽂혔고요. 요즘은 그런 사람들도 목자로서 품어야 하지 않나, 그렇게 회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루에 담배 한갑을 피울 정도로 골초인 문정현은 인터뷰 도중 여러차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 피운 다음에는 꽁초를 담뱃갑에 도로 집어넣었다. 공중도덕도 뛰어난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아는 어부가 있는데 몇년 전 그가 잡은 물고기의 배에서 담배꽁초가 나왔어요. 그 물고기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싶어 그때부터 절대로 꽁초를 버리지 않아요.” 문정현의 생각은 벌써 저만치 동물권에 가 있다.
※문정현 신부의 일화는 2010년 <한겨레>의 연재물 ‘길을 찾아서’에서 그가 회고한 내용입니다.
아산 천안/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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