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의 경제철학
성장가도에 있는 북경제
4월 12일 평양 송화거리 1만세대 살림집 준공식이 있었다. 80층 고층 아파트를 포함하여 거대주택단지가 1년 만에 들어선 것이다. 14일에는 보통강강변 다락식주택구 준공식이 진행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고급빌라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입주는 공짜이다. 김일성 주석 탄생 110주년을 앞두고 진행된 행사이다.
북의 경제는 제재와 고립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내수주도의 성장일로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세계경제가 국제 공급망의 붕괴, 인플레이션, 자산폭락과 부채 위기속에 빠져들고 있는 조건에서 북 경제가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지속가능한 성장가도에 들어선 것은 김일성 주석이 창시한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곧 붕괴하리라던 북한 전문가들의 시각에서 보면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김일성 주석의 경제사상과 경제노선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김일성 주석의 경제철학
김일성 주석의 경제철학을 알려주는 몇 가지 사례가 있다.
해방 직후 지금의 성진제강소 전기로 원철로 5기가 폭파되었다. 이 원철로들은 일제강점기 절연시설을 하지 않아 무수한 노동자들의 인명을 앗아간 악명 높은 작업장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아무리 강철이 귀중해도 우리 노동자들의 생명과는 절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강철을 적게 생산해도 좋으니 우리 노동자들의 원한이 서린 원철직장을 없애버려야겠습니다.” 돈보다 생명이라는 노동존중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북은 철강생산에 필요한 코크스가 나지 않기 때문에 무연탄을 가지고 철을 생산할 수 있는 주체철을 꾸준히 개발하여 마침내 2000년대에 100% 주체철공법을 완성하였다. 그 시작점에서 김일성 주석은 ‘우리 연료로 철을 만들자‘고 발의하고, “우리나라에는 코크스탄이 없고, 다른 나라에 있는 코크스탄을 탐내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좋든 나쁘든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며 주체철 개발을 적극 내밀었다. 김일성 주석의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의 핵심이 잘 담겨있는 사례이다.
1946년 2월 20일 평양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가 소집되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첫 중앙정부의 회의였다. 그 첫 회의 1호 안건은 연필생산에 관한 것이어서 참가자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김일성 주석은 인민들의 문맹퇴치와 어린이들 교육이 가장 중요한 사업이며, 인민들 가슴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는 소원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고 한다. 인민대중의 문명한 생활향상이 정부의 기본사업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잘 드러난 사례이다.
전후복구를 끝낸 1957년 북은 5개년계획을 수행해야 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철 생산문제가 걸려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56년 12월 28일 강선제강소에서 노동계급을 만났다. 그리고 “동무들이 강재 1만톤만 더 생산하면 나라가 허리를 펼 수 있다”고 호소했다. 여기에 호응한 강선 노동계급 사이에서는 새로운 혁신이 일어나고 천리마운동의 첫 봉화가 타올랐다. 그리고 6만톤 생산능력을 가진 압연기에서 12만톤을 생산해 내었다. 경제건설문제도 인민대중을 믿고 인민대중의 힘에 의거하면 얼마든지 풀 수 있다는 김일성 주석의 지론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북은 경제건설도 지도자와 인민대중의 일심단결이라는 힘으로 돌파해나가는 북의 경제건설방식을 알 수 있다.
계획경제인 사회주의 경제에서 공장의 노동자들을 공장운영의 주인, 생산의 주인으로 만드는 문제는 사회주의 경영학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김일성 주석은 1961년 남포시 대안 전기공장에서 현지지도를 통해 “공장, 기업소들이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 밑에 모든 경영활동을 진행”하는 대안의 사업체계를 창안하였다. 이것은 지배인 단독책임방식을 뛰어넘어 당과 지배인, 과학기술기사들이 참가한 위원회체계의 책임하에 정치사업을 앞세우고, 위가 아래를 실속있게 도와주는 방식의 사회주의 경영방식이다. 김일성 주석이 제기한 대안의 사업체계의 본질에는 어떻게 해야 노동자들이 공장, 기업소의 주인으로 될 수 있는가 하는 정신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의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
김일성 주석의 경제철학은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에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은 “자기 나라의 자원과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자기인민에게 복무하는 경제”를 의미한다.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제발로 걸어가는 경제로서 예속경제에 대치되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다방면적인 균형경제구조를 완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라고 해서 이러한 노선을 관철하는데 난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은 1950년 후반 흐루쇼프 집권 이후 노골적으로 ’사회주의 국제분업‘을 주장하며, 북에게 농업국가로의 발전전략을 강요하고, 동유럽처럼 ’세브‘(사회주의 국제분업체계)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압박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은 북에 대한 중공업창설과 관련한 지원을 대폭 축소하였다.
내부에서는 소련을 추종하던 세력들의 반대해 나섰다. 먼저 경공업, 농업부터 발전시켜야지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능력도 없는 중공업을 어떻게 발전시키냐는 것이었다. “중공업에서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는 식의 반발이 나왔다.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은 ’코콤‘을 만들어 대사회주의 봉쇄정책으로 경제예속화를 강요하고 있던 형국이었다. 당시 북은 일제강점기의 기형적, 편파적인 경제에다 그마저도 전쟁기 미국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사회주의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을 밀고 나갔다. 북은 1956년부터 인민경제발전 5개년 계획, 7개년 계획을 통하여 평균 19.1% 속도로 성장하여 1970년 사회주의 공업국가에 도달했다. 공업생산은 56년에 비해 11.6배로 높아졌고, 생산수단생산은 13.3배, 소비재생산은 9.3배로 늘어났다. 이른 바 천리마 대고조의 시기이다. 북의 표현에 의하면, “지난날 현대기술문명에서 뒤떨어진 식민지농업국가였던 우리나라는 현대적인 공업과 발전된 농촌경리를 가진 사회주의 공업국가로 전변”된 것이다.
과학기술로 무장한 자력갱생 경제
흔히 북이 자력갱생, 자립경제노선 때문에 못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북이 자립적 민족경제노선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을 추종했던 동구사회주의국가들은 소련이 망하자 함께 망하였다. 자립경제를 추구했던 식민지 독립국가들은 모두 미국의 전복전략에 의해 모두 붕괴하거나 신식민지로 전락했다. 북 역시 고난의 행군이라는 심각한 위기를 넘겼다.
최근 북은 새세기 산업혁명, 자립적 민족경제의 현대화, 정보화전략을 채택하고 과학기술로 무장한 사회주의경제강국의 길로 매진하고 있다. 제재와 고립속에서도 플러스 성장을 지속하고 경제전반이 국방공업, 중공업, 경공업, 농업, 물류와 유통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구조를 가지고 첨단수준의 과학기술력으로 발전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북은 현재 김일성 주석의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을 현대적 기술과 정보산업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중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세계적인 지경학적 조건이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달러제국에 편입되어 국제분업과 지경학적 이득을 얻는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경제가 대공황기에 버금가는 위기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적 4차산업혁명은 절대실업이라는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대전환기에 북의 경제를 깊이 알고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새로운 통일경제전략을 국가전략으로 채택해야 할 때 아닐까.
2022년 4월 15일은 김일성 주석 탄생 110돌을 맞는 날이다. 북에서는 이날을 태양절로 명명하고 최대의 명절로 경축한다. 김일성 주석이 이룩한 업적을 정치, 경제, 군사 분야로 나누어 그 일부분을 소개한다. [편집자]
(1) 정치이념-이민위천
(2) 경제건설-자력갱생
(3) 국방강화-군민일치
출처 : 현장언론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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