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진 외교장관 후보자의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발언을 보도하는 일본 NHK 갈무리. ⓒ NHK
윤석열 차기 정부와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가운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두 정부의 입장이 동해와 독도를 넘어 교환되고 있다. 박진 외교부 장관 후보자와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의 발언이 그것이다.
박진 후보자는 지난 20일 "위안부 합의는 한·일 간의 공식 합의"라며 2015년 12월 28일 합의를 상기시켰고, 같은 날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장관은 "2015년 12월 일·한 외교장관 회담에서의 합의에 의해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했다고 발언했다. 박진 후보자는 그 합의의 유효성을 강조하고 마쓰노 장관은 그 합의로 인해 문제가 끝났음을 강조했다.
한국 외교부 장관 후보자와 일본 정부 대변인이 위안부 합의의 유효성을 강조한 직후에 미국 국무부도 입장을 표명하고 나섰다. 워싱턴 시각 21일 오후(한국 시각 22일 오전)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의 브리핑에서였다.
현장의 기자가 "일본과 대한민국 간의 역사적 관계와 관련하여 남한의 신임 외교부 장관 박(朴)이 2015년에 위안부에 관해 체결된 양국 합의를 어제 인정했습니다"라며 국무부의 입장을 묻자, 프라이스 대변인은 박진 후보자의 발언을 알고 있다면서 이렇게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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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본과 대한민국이 치유와 화해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역사 관련 쟁점에서 협력하도록 오랫동안 격려해왔습니다. 그들이 민감한 역사적 쟁점을 다루는 동안에도 우리는 우리의 공통적인 지역적·국제적 우선순위를 발전시킬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위안부 문제가 치유와 화해의 원칙에 따라 해결되도록 노력해왔다고 했다. 또 피해자와 유족의 상처를 해소하는 치유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의 반목을 해소하는 화해의 원칙에 따라 문제가 해결되도록 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다 상위에 있는 또 다른 입장을 두 번째 문장에서 언급했다. 위안부 문제 같은 민감한 현안을 다루는 동안에도 미국이 포함된 '우리'의 우선순위를 위해 미국은 나아가고 있다는 부분이다. 이 문제로 인해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역사 문제로 인해 한미일 동맹이 약해지도록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조한 셈이다.
국무부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상당히 정제되고 압축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한국의 정권교체를 계기로 재차 주목받게 될 위안부 문제에 자국의 입장이 반영되도록 하겠다는 메시지를 표명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윤 정부와 기시다 내각 사이의 관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치유와 화해 촉진했다는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이 치유와 화해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개입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벌어진 일들을 보면 그 발언이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1945년 이래 지금까지 77년간 전개된 미국의 개입이 정말로 그런 방식이었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식민지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도 이상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한이 풀리지 않은 채로 사무쳐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미국이 정말로 치유와 화해의 원칙을 따랐는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개입과 중재로 도출된 대표적 작품인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 협정만 봐도 그렇다.
식민지배 문제에 관한 유일한 조문인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라고 선언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이후의 식민지배가 무효라고 하지 않고, 그날 이전의 행위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날 이후 35년간 발생한 식민지배 피해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같은 날 체결된 청구권 협정 역시 위안부·강제징용·강제징병으로 인한 불법행위 손해배상청구권을 규정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민사 채권·채무 관계를 다루는 협정에 지나지 않았다. 1991년 8월 27일 야나이 순지 외무성 조약국장이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청구권 협정으로 인해 개인 청구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라고 발언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식민지배로 인한 개인 피해자들의 청구권은 이 협정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청구권 협정 제2조에 "(양국 간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엉뚱한 문구가 들어갔다. 한국 국민들이 분노하는 쟁점들을 제대로 다루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것으로 끝이다'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한일외교장관회담을 마치고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5.12.28 ⓒ 이희훈
미국의 개입과 중재로 도출된 또 다른 사례인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도 거의 비슷한 문제점이 나타났다. 그해 12월 28일 체결된 것이 만 2년 뒤인 2018년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발언에 의해 유야무야 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위안부 합의는 한국 국민들의 반발 가능성을 감안하지 않은 상태에서 졸속으로 체결된 것이었다.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았다. 게다가 배상금이 아닌 지원금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문제를 봉합하려 했다. 그나마 지원금의 지급도 일본 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가 만드는 재단을 통해 진행되도록 했다. 일본 정부 예산으로 지원금을 마련하되 일본 정부가 직접 지급하지 않는 형식을 띤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금전도 중요하지만 사과 형식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무시하는 합의였다
그렇게 부실하고 무책임한 합의인데도, 청구권 협정 제2조와 유사한 것이 들어갔다. 기시다 후미오 당시 외무대신의 기자회견문에 들어 있었던 "이번 발표를 통해 동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함"이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청구권 협정 때 그랬던 것처럼, '이것으로 끝이다'라는 선언이 위안부 합의에도 들어갔던 것이다.
'다 됐으니 가라'는 돌팔이 의사
청구권 협정과 위안부 합의는 한·일 두 정부의 무책임·무성의와 반역사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협정과 합의를 성사시킨 실질적 주체인 미국의 흠결 역시 드러낸다. 한국인들의 상처를 어설프게 싸매 준 뒤 '다 됐으니 가라'라고 떠미는 '돌팔이 해법'을 보여준다.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은 치유와 화해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고 발언했지만, 실제로 나타난 것은 이 문제를 얼른 봉합하고 자국의 관심사를 추구하는 모습뿐이었다.
이처럼 문제 해결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켜온 미국이 지금 또다시 개입 의지를 드러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신호다. 미국이 종래의 실패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프라이스 대변인의 발언 속에서도 나타난다.
▲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아베 일본 총리가 지난 3월 31일 오전(현지시각) 워싱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2016.3.31 ⓒ 연합뉴스
그는 "치유와 화해를 촉진하는 방식으로(in a way that promotes healing and reconciliation)" 미국이 문제 해결에 임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그가 말한 '치유와 화해'는 '화해와 치유'의 순서를 바꾼 것이다. 미국의 중재 작품인 2015년 합의로 인해 생겨난 결과물이 화해치유재단이다. 그 재단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한 것이다.
2018년 11월 27일 자 <더 디플로매트(The Diplomat)> 기사인 '남한, 위안부 화해치유재단 해체를 결정(South Korea Decides to Dismantle 'Comfort Women' Reconciliation and Healing Foundation)'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미국 언론은 위안부 문제에서 사용되는 '화해와 치유'를 'reconciliation and Healing'으로 표기한다. 프라이스 대변인은 두 단어의 순서만 바꿨을 뿐이다.
박진 후보자와 마쓰노 관방장관이 2015년 합의의 유효성에 관해 주거니 받거니 한 직후에 국무부 대변인이 화해치유재단을 연상시키는 화해와 치유라는 단어를 순서만 바꿔 언급했다. 2015년 합의에 기초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윤석열 차기 정부와 기시다 내각이 추진하는 'Again 2015'에 대해 미국은 동의의 뜻을 암시하고 있다. 이미 실패한 선례를 향해 한국·일본은 앞서 나가고 미국은 뒤에서 주마가편(走馬加鞭)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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