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시대 집회·시위의 문을 성소수자들이 열어젖혔다. 14일 ‘2022 국제성소수자 혐오반대의 날(IDAHOBIT) 공동행동’의 행진은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 대통령 집무실 앞을 처음 지났다.
경찰의 금지통고로 무산될 뻔한 행진이다. 법원에서 과도한 경찰 처분이 저지됐으나 집무실 인근 경호는 그만큼 삼엄했다. 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이들의 목소리까지 막을 순 없었다.
공동행동은 오는 17일 ‘국제성소수자 혐오반대의 날’을 앞두고 이날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기념대회를 열었다. 국제성소수자 혐오반대의 날은 1990년 5월 17일 국제보건기구가 질병관리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용산 광장은 무지개 빛으로 물들었다. 참가자들은 무지개 마스크를 쓰고, 무지개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풍물패 꼬리도, 태극기 건곤감리도 무지개 색이었다. 참가자들은 그간 코로나19로 인해 열리지 않았던 퀴어퍼레이드를 하는 느낌으로 왔다고 말했다. 무지개 색깔만큼 모인 사람들의 색깔도 다양했다. 성별, 나이, 국적, 장애 여부, 종교를 가리지 않았다. 모여드는 인파에 맨 뒷줄에 있던 취재라인은 몇 차례나 뒤로 밀려났다.
광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서로 인사 나누기 바빴다. 파트너 배혜진(퀴어댄스팀 큐캔디) 씨의 공연도 볼 겸 참가했다는 이다은 씨는 “벅차고 즐겁다”고 말했다. 대전에서 올라왔다는 박선우 대전퀴어네트워크 활동가는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 행복하다”며 “혐오세력이 없는 청정한 집회는 오랜만”이라고 말했다.
공동행동은 행진에 나서는 각오를 밝혔다. 이들은 공동선언문에서 “새정부 첫날부터 대통령 비서관이 동성애는 치료될 수 있다는 망언을 쏟아냈고, 이제는 거대야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은 여전히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고 질타했다.
이어 “경찰에 의해 한차례 막혔던 행진길을, 새정부의 대통령실을 향하는 이 길을 무지개로 물들이며 나아간다”며 “성소수자들이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게 하고 인권을 합의의 대상으로 만들며 아직도 ‘나중에’를 말하는 정치를 향해, 성소수자가 여기 있음을, 우리의 거침없는 전진을 누구도 막을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집무실 앞서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혐오로 흥한 정치인의 끝은 초라할 것”
가수 레이디가가의 노래 ‘본 디스 웨이’(Born This Way)로 행진이 시작됐다.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는 내용의 가사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행진은 용산역 광장을 출발해 신용산역을 지나,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삼각지역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녹사평역 이태원 광장으로 향했다.
삼각지역 13번 출구를 지나면서 대통령 집무실이 가까워지자 행진 양 옆으로 폴리스라인이 세워졌다. 빽빽한 폴리스라인 때문에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취재진도 기자증을 보여줘야 폴리스라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무실 앞에 도착한 행진 대열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외쳤다. 소주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는 “국회 앞에 34일째 굶으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동성애자가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는 키워드가 소통이라고 한다. 정말 소통을 원한다면 국회 앞에서 한 달 넘게 굶고 있는 인권활동가들을 찾아와야 하지 않겠나”며 “식사 정치를 강조하는 윤 대통령은 왜 국회 앞 평등의 밥상을 먹지 않나”고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윤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움직임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명숙 ‘여성가족부폐지저지공동행동’ 활동가는 “윤 대통령은 여성혐오로 당선된 자”라며 “혐오로 흥한 정치인은 그 끝이 초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정치인이라면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마땅하나 윤 대통령은 무한경쟁 각자도생을 무기삼아 소수자 공격을 유도했다”며 “전날 사퇴한 김성회 대통령비서실 종교다문화비서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등 현 정부 주요 인사는 사회적 소수자를 질서를 해치거나 비용이 드는 존재로 낙인찍는다”고 지적했다.
새 정부에 기대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성소수자부모모임 비비안 활동가는 “윤 대통령은 전혀 모르던 세계지 않을까. 우리가 이만큼 차별받고 배제되고 있다는 걸 안다면 다같이 더불어 잘 사는 세상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행진 중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폴리스라인 밖으로 나가려는 참가자들에 대해 경찰은 피켓, 깃발 등 집회 용품을 가방 속에 집어넣어야 출입을 허가했다.
폴리스라인을 벗어나기 위해 피켓을 넣어야 했던 박관철 씨는 “제가 무엇을 들고 있던 시민의 자유 아닌가. 피켓을 들고 있다는 이유로 이동의 자유를 침해할 이유는 없다. 부당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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