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결혼을 세 번 했다고 한다. 첫 번째, 두 번째 배우자들은 모두 납북사건을 알고 난 뒤 이혼을 요구했다. 매일 정보과에서 감시를 당하다보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납북귀환되어 조사를 받고 인생의 모든 기대와 꿈이 무너지고 나서 그는 변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난폭해지고 성질을 자주 내니 가정생활이 되겠소? 생계가 어려우니 누굴 책임지지도 못하지."
지금은 도시락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는 청바지에 하와이안 티셔츠를 입은 화려한 차림이었다. 납북귀환어부로 돌아와 처벌받은 뒤 정상적인 직업을 가지기 어려웠고 결국 뒷골목 생활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가 납북된 때는 1971년 중학교 3학년 시절이라고 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홀로 벌이를 했다. 그랬던 어머니가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앓아누웠다. 그는 돈벌이라도 할 겸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탔다. 그 배가 해부호였다.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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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씨와 찾은 속초의 옛 여인숙 골목. 과거 이곳에서 A씨를 비롯한 선원들이 고문을 받았다. |
ⓒ 변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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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의 아버지 직업 군인이었다. 속초로 오게 된 것도 부친의 근무지가 속초로 발령되면서부터였다. 부친은 속초에서 2년 근무한 뒤 제대하고, 탄광에서 일을 했지만 얼마 안 가 차량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때부터 가정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으로 병원으로 입원해 있고, 형편은 어렵고 하니까 학교는 가기도 싫더라고. 그리고 마침 학교에서도 배 타고 고기 잡으러 가는 건 장려를 했어요. 당시에는 다들 가정형편이 어렵다 보니 그렇게 돈을 벌어서라도 경제도 살리고 학비도 벌면 좋으니까 며칠씩 빠지더라도 배 탄다고 하면 다 이해해주는 분위기였어요.친구 소개로 해부호라는 배를 타게 된 거예요."
해부호가 납치된 것은 새벽이었다. A씨는 멀미로 정신없는 상황에서 선실 밖에서 들리는 멈추라는 소리와 총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나이 든 선원들을 통해 납치된 장소가 고성 앞바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 북한 사람을 만나면 모두 죽는다고 배웠기에 A씨 등은 모두 벌벌 떨기만 했다고 한다.
북한 장전에서 조사받은 뒤 해주 쪽으로 넘어가 보니 속초 승운호 선원 등이 있었다고 한다. 억류 생활이 길어지자 남한으로의 귀환 요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귀환 요구가 있을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남한으로 돌려보내 주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귀환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포기하고 있던 중, 19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가 나면서 급진전되었다. 1972년 9월 7일 귀환 당시 기쁜 마음에 승해호를 탔지만 정작 멀미로 인해 어떻게 귀환되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승해호가 속초항 수협 쪽으로 정박해 하선했지만,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 채 곧바로 버스로 태워서 시청 2층 회의실로 이동했다. 조사받았던 곳은 시청 앞 해동여인숙, 저승 같은 곳이었다.
"사실 시청에 와서 누가 나를 부른다 하는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여인숙에 들어가면 수사관들이 각목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꿇어앉힌 다음에 허벅지를 밟더라고요. 무릎이 빠지는 거 같아요. 그리고 눕혀놓고 물고문을 해요, 수건을 얼굴에 덮어놓고 팔다리를 잡고, 한 되짜리 주전자 물을 붓는 물고문을 해요. 그러다가 안 되니까 이렇게 돌리는 군인 전화기 같은 걸로 전기고문을 하더라고요. 전기고문은 의자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당했어요. 나중에 고춧가루 물고문도 당했는데 그건 물고문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당했어요."
A씨가 특별히 고문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 당시 치과 치료를 받은 기간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 A씨보다 몇 해 전 납북되어 억류되어 있던 매형 등을 만나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결국 A씨는 고문에 못 이겨 '5년 있다가 북한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둘러댔다.
허위자백 때문이었는지 고문이 잦아들었다. 경찰 조사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조사받은 것을 말하지 말라는 각서를 쓰게 했고, 결국 검찰과 법원에서도 그 각서로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한다.
집행유예로 나온 이후로 경찰이 계속 따라다녔다고 한다. 담당 형사가 가끔 집에 찾아와 어떻게 사는지 물어보고 A씨가 친한 친구들과 만나기라도 하면 친구들한테까지 찾아가서 조사하기도 했다. 직장생활도 불가능했다.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게 했던 것, 그것이 제일 괴로웠던 일이라고 한다. 여전히 그는 납북귀환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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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수사 종료 시점에 작성한 각서. A씨 등은 이 각서 작성으로 인해 고문 수사 등 진실에 대해 함구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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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도 엉망이 되었다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뭐냐면 공황장애를 겪는 거예요. 고문이나 납북 이런 단어나, 그 당시 기억이 떠오르면 등에 식은땀이 나고 그래요. 지금 이 이야기 하는 중에도 북한 이야기 나오고 하면 식은땀이 나요. 나도 달변인데 북한 이야기만 나오면 좌불안석이 되는 거예요. 내가 가고 싶어서 북한을 갔어요? 태풍 때문에 잡혀가서 북한 아이들이 하라고 하는 대로 한 것뿐인데 나이 어린 학생들을 왜 고문하고 처벌하느냐고요.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 혹은 장난삼아 간 사람들이에요, 방학 동안 그저 호기심에 배를 탄 건데 국가보안법, 반공법으로 만들어 놔서 인생 조져 버린 것 아니에요. 50년 넘었지만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박박 갈려요."
그는 자신의 환경이 다른 사람보다도 더 나빴다고 했다. 그는 그보다 먼저 납북되었던 이모부와 형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고문을 더 받고 더 지독한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직장을 제대로 못 다니는 거지. 맨날 경찰들이 찾아다니고 정보부에서 조사를 하고 하다 보니 사람 성격이 모나지게 되고 누가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게 됐어."
한 번은 거진에 사는 동생 집에 놀러 갔다가 누군가의 신고로 인해 강릉보안대까지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내가 납북된 걸 모르는 놈이 신고를 했겠어? 나를 아주 잘 아는 놈이 신고를 한거지. 세상 믿을 놈 하나 없어"
그의 사회생활은 그 자체로 엉망이 되었고 대인관계, 결혼생활도 엉망이 되었다.
그가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나서 두 번째 배우자를 만났는데, 그의 동서가 중령 계급의 군인이었다. 문제는 중령인 동서가 더 이상 진급이 되지 않았고, 그 진급 누락의 책임이 A씨에게 돌려졌다. 결국 그는 두 번째 결혼도 실패했다.
"난 모든 걸 숨기고 살았어. 내가 결혼을 세 번이나 하면서도 새끼를 한 명도 안 놓았어. 그 이유가 뭔지 아나? 연좌제 때문에... 이북에 갔다가 넘어온 나는 그렇다 쳐도 내 새끼들은 무슨 죄가 있어. 그런 고통을 물려줄 바에는 새끼를 안 놓고 말지."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고통스러운 나라. A씨에게는 대한민국이 그런 곳이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불행을 안고 태어날 아기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그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국가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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