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부지회장을 지난 6일 저녁 거제에서 만났다. 9월 초 퇴원해 9월 13일부터 현장에 복귀한 그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용접 일을 한 뒤 곧장 노조 사무실로 가 밤 늦게까지 노조 업무를 봤다. 유 부지회장은 노란봉투법의 필요성을 말하다가도 "기대를 잘 하지 않습니다. 기대했다가 꺾이면 힘드니까요. 여태까지 살면서 뭘 '꽁'으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라고 꾹꾹 눌러 말했다. 동시에 "노란봉투법은 하청 노동자도 좀 더 쉽게 노동조합 할 수 있게 하는 법 아닙니까"라며 "노동조합 한다고 집, 돈 다 날리고 인생 다 털어먹었습니다. 하청은 계속 이렇게 노동조합 해야 됩니까?"라고 또랑또랑 되물었다.
"감옥 투쟁 후... 현실 바뀐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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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최안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지난 6일 경남 거제 옥포조선소 인근 하청 노조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를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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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 상태는.
"저번 주까지만 해도 무릎이 아팠는데 이제 거의 다 회복한 것 같다. 다행이다."
- 파업 종료(7월 22일) 뒤에도 하청 노동자 40여 명의 고용 승계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김형수 지회장이 지난 8월 18일부터 9월 8일까지 22일간 단식 농성을 했다.
"그 중 아직도 10여 명은 고용 승계가 안 됐다. 하청은 이렇게 똑같은 내용 갖고 세 번, 네 번 합의해야 한다. 화가 나서 미치겠다."
- 지난 6~7월 파업에 큰 반향이 있었다.
"조선소 바깥에서 우리 지회를 바라보는 인식은 좋아진 것 같다. 하지만 조선소 내 현실이 좋아진 건 없다."
- 무슨 말인가.
"노동자들이 대우조선을 다 떠나고 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거밖에 안 오른다고?' 하면서. 이번 파업이 사회적으로 주목 받으면서 어느 정도 기대치가 있었는데, 그게 무너진 거다. 우리 파업으로 오히려 삼성, 현대 등 다른 업체들 임금이 많이 올랐다. 더 좋은 조건 찾아 떠나는 걸 막을 순 없지 않나. 본래 600명 정도 되던 조합원들도 20% 정도 줄었다(대우조선에는 정규직이 약 8000명, 하청 노동자가 약 1만 2000명 있다).
경험 많고 기량 좋은 숙련공들도 이번에 회사가 하는 꼴 보고 마음이 많이 틀어졌다. 노동조합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자기 작업에 대해 자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일로는 꼬투리 안 잡히는, 일 잘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몫 떳떳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회사는 여전히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노조 안 하는 사람들만 원하고 있다. 의욕이 생길 수가 없다."
- 수주가 늘어나는 등 호황기가 와서 오히려 일손이 부족하다고들 한다.
"일 잘하는 숙련공은 팽시키고, 경험 없는 사람들이나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인 채용만 늘리고 있다. 위험한 작업이 많은데도 일단 쓰고 치우면 된다는 식이다. 분명 탈이 날 거다. 선박의 안전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회사에 대한 애정 없이 단기적으로 돈 벌러 온 사람들이 과연 책임감 갖고 배를 만들까. 실제 용접을 하면 속이 다 쇳물로 차 있어야 하는데, 쇠 안에 스펀지를 넣거나 텅 빈 채로 겉만 불량하게 용접한 뒤 돈 받고 떠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러면 또 알아서 책임감 갖고 일하는 노동자들만 죽어나간다. 한 번에 할 일을 두 번 세 번 해야 하니까. 지금 현장에선 작업이 안 되고 있다."
"가끔 '괴물'이 되어간다고 느껴... '대우'라는 괴물을 상대하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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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최안(41)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최근 용접 현장에서 찍은 사진. 속이 비어있는 불량 작업이다. 유 부지회장은 사회적인 관심을 받았던 6~7월 파업 이후에도 임금 등 처우가 현실화되지 않자, 숙련공들이 대우조선을 떠나고 있다고 했다. 그 자리는 단기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채우고, 제대로 용접을 하지 않고 겉으로만 눈속임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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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26일 대우조선이 유 부지회장을 포함해 노조 간부 5명에게 47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소장도 안 읽었다. 뭐 얼마를 더 뺏기겠나. 더 뺏길 것도 없다. 어차피 이 사회가 만든 비정규직 하청 구조에서, 희망도 없는 삶에서 뭘 더 잃겠나. 신경도 안 쓴다. 손배 때리면 그냥 맞는 거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좀 알려달라."
- 파업 내내 회사는 거액의 손배 압박을 했다.
"나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걸 경고해야 했다. 우리라고 손배 각오를 안 했을까? 까놓고 얘기해서, 나는 '이번에 안 되면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더는 답이 없어서. 여기서는 뭔가 멈춰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냥 이대로 사는 건 벌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살아가는 의미가 없었다."
-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할 건 다 해봤는데 안 되는 걸 어떡하냐는 거다. 우리는 작년에도 파업했다. 쟁의권도 얻지 못한 채 소위 '불법 파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당장 돈 떼어 먹혔다고, 지금 돈 돌려달라고 노조에 모이는데 거기 대고 '자 여러분 1년만 기다려보세요. 교섭하고, 쟁의권 얻어서 파업하면 됩니다'라고만 할 순 없지 않나. 하지만 '불법 파업' 딱지가 붙으니 공권력이 모든 걸 막아 뭘 해보지도 못하고 좌절했다. 격렬했지만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고립된 채 고사했다. 민주노총도 거제에 잘 오지 않았으니까. 조합원들은 계속 다른 일자리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올해 더 절박했다. 정말 뭔가 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노조 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노동자들에게 '그래도 파업이라도 한 번 해보고 가자'고 설득했다. 조선소에서 10~20년 일했는데 다른 데 가기 전에 뭐라도 해보고 떠나야지 않겠냐고. 벼랑 끝에서 올해 파업을 준비했다. '합법 파업'을 위해 쟁의 기간 다 기다려가며 파업권을 획득했다.
그렇게 합법 파업을 했더니 이번엔 구사대들이 몰려와 두들겨 팼다. 조합원들 한 명 한 명 떨어져 나가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1도크 감옥으로 들어간 거다. 근데 이마저 불법이라고 한다. 20일 넘게 밥을 굶어도 안 되고, 한 달 동안 진수(배를 물에 띄움)를 막아도 안 된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앞으로 무얼 더 해야 하나? 제발 방법을 좀 알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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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최안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지난 6일 경남 거제 옥포조선소 인근 하청 노조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를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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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로·세로·높이 1미터 철제 감옥에 스스로 몸을 가두고 한 달 넘게 투쟁했다.
"이렇게 관심을 받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다. 우리 같은 비정규직, 하청이 왜 극단적인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줄 아나. 빨리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200만원 버는 사람들이 한 달, 두 달 임금 포기하고 파업 할 수 있을까? 절대 못 한다. 수위를 높일 수밖에 없다. 우리도 피켓 몇 번 드는 걸로 끝나는 집회 하고 싶다. 그 정도로 말 들어주면 왜 안 하겠나. 그런데 이곳은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는 지옥이다. 우리가 강성인가? 그들이 너무 하는 것 아닌가?"
- 감옥 투쟁 당시 정부는 공권력 투입을 운운했다.
"문제는 나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다. 파업 끝나고 서로 얘기해보면 다 비슷한 마음이었다. 공권력 들어오면 고공농성 하던 누군가는 뛰어내렸을 것이고, 연쇄적으로 일이 터질 상황이었다. 솔직히 내가 가끔 '괴물'이 되어간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대우'라는 괴물을 상대하는 괴물. 이런 '괴물'들이 점점 많아지면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도 많아지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 지난 5일 국회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한창 파업할 때 우리가 8000억 손해 입혔다고 많이 모함 받았는데 그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해달라"고 회사에 요구했다.
"회사가 8000억 떠들어대니 정부, 대통령까지 나서서 공권력 투입 압박을 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470억이라고 말을 바꾸고 설명도 없다."
- 같이 국감장에 있던 박두선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470억 손배소를 취하할 의향이 있냐는 질문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손배가 "준법 경영"이라고도 했다.
"법에 문제가 있는데 법 지키면 뭘 하나. 우리와 법률 싸움하자는 건가. 그럴 거면 회사에 변호사만 있으면 되지 뭐 하러 사장이 있나. 지난 3월 박 사장이 취임하자마자 회사는 우리에게 작년 파업에 대한 10억 손배소를 때렸다. 그전에는 고소·고발을 남발해 구속시켜버리는 기조였다면 이젠 돈으로 노조를 짓누르겠다는 확실한 의지 표현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싸웠는데 어제 사장 얼굴을 처음 봤다. 언론들 있는 데서 친한 척 인사하러 오길래 거부했다."
"다른 데로 떠나라? 속 편한 소리... 할 수 있는 걸 할 뿐, 이대로 살 순 없다"
- 대우조선의 470억 손배소를 계기로 노란봉투법 제정 요구가 커졌다. 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이 이번 정기 국회 내에 노란봉투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손배 앞에서 버틸 방법이 없지 않나. 다만 기대는 잘 안 하고 산다. 여태 살면서 '꽁'으로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비정규직 투쟁이 그렇다. 우리들의 파업은 답이 있어서 하는 파업이 아니다. 어떤 계획과 구상이 있는 게 아니라 몰리고 몰렸다가 터져 나오는 거다. 그 힘으로 밀어붙이는 파업이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뭐를 고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답도 안 그려진다. 특히 법은 우리에게 머니까. 그래서 더 기대를 안 하려 한다."
- 기대가 없어진 건 언제부터인가.
"조선소 상황이 안 좋아지고, 비정규직 하청이 죽어나가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예전엔 정말 일만 했다. 1년으로 따져도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설, 추석에도 일했다. 스물셋에 조선소 들어가 스물일곱까지 4년을 거의 하루도 안 쉬고 잔업·특근을 했다. 결혼을 일찍 해 네 식구 가장이었고 외벌이였기 때문에. 죽으라 일만 하니 스물일곱에 집을 살 수 있었다. 저, 일 정말 잘했다. 그런데 그 무렵부터 조선소가 내리막이었다.
회사가 하청을 정규직보다 많이 쓰는 이유가 뭔가. 더 많이 벌어다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려울 땐 하청부터 깎고 날렸다. 우리는 그냥 한 달 벌어 한 달 살 수 있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되기 시작했다. 몸도 슬슬 망가지는 게 느껴지는데 나중에 쓸 병원비도 안 남을 것 같았다. 스물넷 때 내 시급이 1만원이었는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시급이 1만 300원이다. 삶에 기대나 희망이 생기겠나.
속 편한 사람들은 '그럼 딴 데 가서 돈 벌라'고 한다. 내 나이 이제야 마흔 조금 넘는다. 젊다. 용접사가 어디 가서 대우 못 받겠나. 갈 데 많고 내 친구들도 돈 많이 번다. 그런데 빤히 보이지 않나. 여기 사람들 그냥 놔두고 가나? 여기엔 여기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죽어야 하나? 속 편한 소리들 하고 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 여기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가보는 게 사람답게 사는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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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최안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지난 6일 경남 거제 옥포조선소 인근 하청 노조 사무실에서 대우조선의 470억 손배 소장을 들어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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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부지회장 같은 선택을 하지 않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이다. 각자의 삶이다. 흔히 우리끼리 '조선소는 막장'이란 말을 많이 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밖에서 한 번 고꾸라지고 온 사람들이다. 배 안은 아수라장이다. 시간 아끼려고 용접, 도장, 파워(페인트칠 전 전동 그라인더로 선박 표면의 녹이나 이물질을 제거하는 노동자)가 한데 섞여 일을 한다. 페인트통이 즐비한데서 화기 작업을 하니 폭발 위험도 있고 온갖 유독 물질이 나와 코와 눈이 아프다. 환기 시설이 없어 배에 연기가 꽉 찬다. 중량물 다루는데 다른 건설, 제조 현장과 달리 기계가 움직일 수 있는 길이 없다. 유선형이라 작업하는 자세도 잘 안 나온다. 그런 곳에서 무거운 걸 들고 나르면 무릎, 허리 다 나간다.
그런데도 블랙리스트에 올라갈까 봐 산재 얘기도 못꺼낸다. 그러다 정말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까지 간 사람들이 밤 9시쯤 박카스 하나 들고 쭈뼛쭈뼛 조합 사무실로 찾아온다. 도대체 돈이 뭐라고 이렇게 될 때까지 일을 했나, 내가 다 짜증이 난다. 얼마 전에도 서른넷 밖에 안 된 친한 동생이 허리 디스크로 일을 관뒀다. 내가 있는 업체에 직원이 100명 정도 되는데, 올해만 두 명이 죽었다. 한 명은 자살, 한 명은 당뇨로. 둘 다 40대밖에 안 된다. 요즘 세상에 당뇨가 죽을 병인가. 그런데 여기선 이런 일이 발에 차인다.
여기 남은 사람들은 다 죽어야 되는가? 예전엔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사나 싶었다. 그런데 이놈의 비정규직 하청 구조는 내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부터 잔업·특근을 안 했다. 내가 잔업하고 일 많이 하면 옆에 있는 한 명이 짤린다. 그게 보이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더 일을 하나. 미칠 노릇이었다. 왜 서로가 서로에게 침을 뱉어야 하나. 그렇게 노동조합 일도 출발했다. 한 달 월급이 170~180만 원으로 떨어졌다. 스물일곱 때 산 집도 팔았다. 생활비 쓰려고."
- 떠나는 대신, 남아서 노동조합 하면서 좋아진 점은 없나.
"억지로 꼽자면 어른은 좀 된 것 같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갔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 집이 깨져서 동생은 숙식 제공되는 고등학교로 진학해 떨어져 살았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일을 했다. 그러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어머니를 만났다. 감정이 좋지 않았고 피해의식 같은 게 남아 있었다. 마음 속 문이 열리지 않았다. 교류를 안 했다. 하지만 노동조합 하면서 하도 인간 말종들을 상대하다 보니 어머니가 용서되더라(웃음). 이제는 교류를 하고 있다. 이번 파업 때 수많은 시민들이 보내준 연대도 기억하고 있다. 사실 그 덕분에 지금 살아있다."
- 노란봉투법이 제정되면 현장에 변화가 있을까.
"모르겠다. 해봐야 아니까. 지금도 헌법에는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이 잘 만들어져 있는데 사측이 민법을 기막히게 악용해 손배로 침해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노란봉투법이라도 해보자는 거다. 경총은 자꾸 노란봉투법이 재산권 침해라고 하는데, 그럼 우리의 노동권은 언제나 침해 받아도 되는 것인가. 이건 불평등한 것 아닌가.
결국 노란봉투법은 노동조합 하기 좀 더 쉽게 하자는 것 아닌가. 손배를 막고, 우리 하청도 원청과 교섭할 수 있다면 파업이나 교섭이 훨씬 빨라질 수 있다. 우리가 목숨까지 걸 일이 줄어든다. 이번에 감옥 투쟁 들어가기 전 집에 말을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뉴스에 내 얼굴이 나오고, 8000억 어쩌고 하니까 아내가 몸져누워 지금 처가살이 하고 있다. 대학생 된 아들, 고등학생 된 딸 얼굴을 넉 달 만에야 봤다. 정말 하청은 계속 이렇게 노동조합 해야 하나? 정말 난 이대로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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