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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유가족은 왜 녹사평역 지하4층 아닌 서울광장이 필요할까

서울시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에게 추모 공간으로 제안한 녹사평역. 지하1층에서 내려보면 지하4층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히 내려가야 한다. ⓒ민중의소리

 

"자꾸 지하공간으로 호도하면서 어둠의 공간인양 말하는데, 시민들이 열차를 타는 플랫폼 광장의 공간입니다"

오신환 서울시 정무부시장의 목소리가 한껏 격앙됐다. 서울시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에게 추모 공간으로 제안한 '녹사평역 지하 4층'을 두고 유가족이 강하게 반발하자, 억울하다는 듯 항변한 것이다. 유가족이 원하지 않는다는데 서울시가 고집할 만큼 녹사평역 지하 4층이 추모 공간으로 적합한 공간일까.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으로 향했다.

13일 월요일 오전 8시경. 직장인의 혼을 쏙 빼놓는 출근 시간이지만 녹사평역 주변은 한산했다. 다른 역에 비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지상에는 넓은 도로를 오가는 차량은 빼곡했지만, 유동 인구는 적었다.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시민들이 산책하는 모습만 간간이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음식점과 카페 등이 모여 있는 곳을 가려면 육교를 통해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녹사평역 인근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녹사평역 지하 1층으로 향하자 끝이 보이지 않는 아찔한 높이가 눈에 들어왔다.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아득한 깊이에 어지럼증을 느껴 난간을 잡아야 할 정도다. 지하 4층은 쉽게 내려다보기도 힘들 정도의 깊이를 한참 내려가야 다다를 수 있다. 층마다 설치된 길고, 가파른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지하 4층에 도착한다.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에 개찰구가 있고, 개찰구를 통해 한 층 더 내려가면 승강장에 이르는 구조다.

 

 

 

서울시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에게 추모 공간으로 제안한 녹사평역 지하4층의 모습. ⓒ민중의소리


이곳이 지하 4층이 맞는지, 추모 공간은 대체 어디에 마련한다는 것인지 의아해하며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양옆으로 뻗어 있는 작은 공간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시가 제안한 추모 공간 후보지다. 에스컬레이터를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녹사평 용산공원플랫폼 사무실'과 세미나실이, 반대편에는 빈 사무실과 세미나실이 있다. 양쪽 공간 모두 천장 조명이 켜져 있었음에도 지하공간 특유의 답답함과 어두컴컴함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서울시는 천장 유리 돔을 통해 지하 4층까지 자연채광이 든다고 강조했지만 그 효과는 체감하기 힘들었다.

바닥 마감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곳도 눈에 띄었다. 이곳이 시민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공간이라는 방증이었다. 특히 대부분의 시민들은 개찰구를 통과해 바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바로 개찰구로 이동하기 때문에 이곳으로 시선을 돌리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직접 본 녹사평역 지하 4층은 추모 공간이라기보다 참사를 가리기에 최적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유가족이 바라는 건 시민과 함께하는 추모다.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의 원인에 국가의 부재가 있었음을 알리고 이에 대한 책임을 함께 묻기 위한 추모다. 지난해 12월 유가족들이 녹사평역 인근 이태원 광장에 설치했던 분향소는 참사 현장과 가깝다는 상징성이 있긴 하지만, 시민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오히려 유가족과 희생자를 공격하는 혐오세력만 난무했다. 온전한 추모를 위한 별도의 추모 공간이 절실한 상황이다. 

유가족들이 원한 곳은 서울 광화문 광장 한켠에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이를 거부하고 경찰 기동대까지 동원해 광화문 광장을 봉쇄했다. 결국 유가족과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 대신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인근에 분향소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통행하면서 추모하는 곳으로 자리 잡게 됐다. 광화문에 있는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잠시 짬을 내 분향소를 찾는 시민부터 전국 곳곳에서 가족,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놀러 온 시민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모여 한결 쉽게 추모의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울시는 오는 15일 이렇게 조성된 추모 공간을 철거하겠다고 통보한 상태다. 그러면서 현재의 갈등을 모두 유가족 책임으로 돌리고, 피해 당사자인 유가족의 요구를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비난하고 있다. 유가족의 요구사항인 '광화문 광장 또는 서울광장에 분향소를 설치'에 대한 찬반 여론조사를 실시하며, 유가족을 시민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한다. 여기에는 '법과 원칙'으로 포장한 행정만 있을 뿐, 유가족을 위한 행정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서울시가 해야 할 일은 유가족을 기만하는 '녹사평역 지하 4층'을 수용하라고 협박할 게 아니라 유가족의 요구에 적합한 추모 공간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유가족과 수많은 시민이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서울광장 추모 공간을 일방적으로 허문다는 것도 가당치 않은 일이다. 서울시는 하루빨리 아집을 버려야 한다. 

 

 

 

서울시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에게 제안한 녹사평역 지하4층의 모습. 개찰구에서 나오면 추모 공간 후보지는 제대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구석에 위치해있다. ⓒ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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