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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자에게 고함] <지식인의 표상> vs. <지식인의 책임>

오창은 중앙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0-19 오후 5:56:56

 

정치적 선택과 전향의 논리 사이에서

프랑스의 정치가 레옹 블룸은 "사는 것이 만만한 것이 아니라서 이득이란 이득을 모조리 얻지는 못하며, 선택할 용기가 있는 게 도덕성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하곤 했다"라고 토로했다. 한 분야에서 훌륭하게 훈련된 전문인, 혹은 뛰어난 재능을 소유한 예술인, 지적으로 단련된 지식인일지라도, 모든 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선택을 통해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세계의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선택은 포기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에, 책임을 요구한다.

지식인들의 정치사상적 선택은 그 사회의 심층에 자리한 이데올로기 지형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지식인의 선택은 때로는 정치적 결단으로 의미화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향, 변절로 규정되기도 한다. 식민지 시대 이광수·최남선의 전향이나, 이념적 측면에서 김기진·박영희·백철의 전향도 책임의 문제와 연결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책임지기 위해 식민지 시기 조선 지식인들은 제시한 논리는 분석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정치사상적 선택은 '혹독한 책임'의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여전히 문제는 '방향 전환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선택의 논리'와 '전향의 논리'의 타당성 여부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보편성의 원리에 입각해 정치적 선택에 따르는 지식인의 도덕성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는 "당신은 당신의 능력이 닿는 한, 능동적으로 진실을 표상하는 일과 수동적으로 당신의 후원자나 권력으로 하여금 당신이 할 일을 지시하도록 하는 일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사이드의 이야기처럼 시대의 위협에 맞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언어와 표현의 문제, 그리고 정신적 신념의 문제는 결코 개별적이지 않다. 그것은 대중과 더불어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중은 신뢰할 만한 지식인에게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는 내적 힘과 선택에 따른 의무를 감당해내는 논리를 요구하는 것이리라.

도전받는 지식인의 책임

최근 번역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의 표상>(최유준 옮김, 마티 펴냄)과 토니 주트의 <지식인의 책임>(김상우 옮김, 오월의봄 펴냄)은 '지식인을 둘러싼 상이한 담론'을 제기한다는 측면에서 검토할 만하다.

이 두 책은 지식인의 정치적 행위나 정치 참여의 문제를 화두로 삼았다. 지식인에 대한 규정, 역할, 책임 등에서 서로 입장이 다르기에, 대비해서 읽는다면 지식인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다각적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대선 국면에서 한국 교수 사회가 이른바 '폴리페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기에 이 두 책의 출간은 절절한 시의성을 지닌다.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대선 진행 과정에서 점검할 수 있고,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으로 표상되는 행위 주체들의 책임의 문제'를 성찰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다만, 이 두 저작이 처음 간행된 시기가 1990년대라는 측면은 고려되어야 한다. <지식인의 표상>은 1993년 영국 BBC 텔레비전의 '리즈 강좌'에서 행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강연 원고를 1994년에 간행한 것이다. <지식인의 책임>도 시카고 대학의 '브래들리 강좌'를 위해서 기획된 에세이들을 토니 주트가 1998년에 간행한 것이다.

특히, <지식인의 책임>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좌파 이념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광범위하게 이뤄지던 1990년대의 시대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르트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으며,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편향된 진술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그럼에도 <지식인의 책임>은 프랑스의 중요 지식인인 레옹 블룸과 알베르 카뮈, 그리고 레몽 아롱의 선택을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지적 망명의 고단함
 

▲ <지식인의 표상>(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최유준 옮김, 마티 펴냄).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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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의 표상>에서 지식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그는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공적 처신에 있어서 어떤 강령이나 당파성 그리고 확정된 교조에도 순응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비참함과 억압에 대한 진실의 기준"은 정파나 민족적 배경, 애국주의적 충성심을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인간을 향한 보편적 준칙을 강하게 제기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이드에게 지식인은 "추방자, 주변인, 아마추어,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언어의 설계자"라고 강한 어조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가 기념비적 저작 <오리엔탈리즘>(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펴냄)을 통해 서구 지성계에 비수를 꽂았던 것도 '지배적 권력에 대항하는 추방자 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이드는 지식인은 대중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상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도 진리를 향해서는 대중의 집단주의에 맞설 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중적 딜레마 상황에서 판단의 준칙이 되는 것은 오히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아마추어적 양심'에 충실할 수 있는 신념이다.

지식인에게 체계 바깥에서 추방자처럼 현실을 낯설게 보며 증언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그런데도 '불가능한 것'에 대한 낭만적 진술로 사이드의 논의가 읽히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이 '추방자로서의 삶'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지적 망명의 고단함 속에서도 '회피하지 않고 권력을 향해 진실을 이야기하는 결단'이 그의 저작 속에는 강하게 도사리고 있다.

프랑스 애국주의의 선택

▲ <지식인의 책임>(토니 주트 지음, 김상우 옮김,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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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출신의 에드워드 사이드가 애국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정신을 강조했다면, 유대인 출신의 토니 주트는 <지식인의 책임>에서 '강한 프랑스 문제'를 중심에 놓고 논의를 전개한다. 그간 프랑스 지성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레옹 블룸과 알베르 카뮈 그리고 레몽 아롱을 문제적 인물로 삼아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지성사의 성찰하려는 것이 토니 주트의 의도이다.

카뮈는 한국 사회에 문인으로 잘 알려졌지만, 지식인으로서 레옹 블름과 레몽 아롱은 낯설다. 프랑스 사회에서도 세 인물에 대한 평가는 야박했다. 토니 주트는 바로 이러한 프랑스 주류 지식 사회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사르트르와 대비되는 위치에 이 세 인물을 놓는다. 그럼으로써 프랑스 좌파 지식인의 견고한 엘리트 의식과 우파 지식인의 유대인에 대한 인종적 공격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블룸, 카뮈, 아롱의 삶이 아니다. 이들의 삶이 토니 주트에 의해 재현되는 방식이다. 토니 주트는 '강한 프랑스'를 견지한 것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세 명의 지식인을 선택해 기술했다. 이러한 입장은 1990년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구소련에 대한 반감이 투영되면서 형성되었다.

프랑스의 지적 전통을 형성하는 사르트르 중심의 좌파 낭만주의가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 강한 입장 속에서, 토니 주트는 반(反)사르트르 전선에 섰던 세 지식인에 대해 새롭게 의미부여한 것이다. 특히, 알제리 해방 문제를 둘러싼 프랑스 지식인 내부의 입장 차이는 '책임의 문제'와 연결되어 치열한 면모를 드러낸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토니 주트의 논의는 자기가 속한 세계에 대한 보수주의적 옹호를 '정치적 책임'의 문제로 환원시켜 기술한 것으로 비판할 수 있다.

서구 중심주의와 대결하는 추방자 의식

<지식인의 표상>과 <지식인의 책임>은 다음 몇 가지 부분에서 대립시킬 수 있는 텍스트이다.

첫째, <지식인의 표상>이 팔레스타인 출신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견지한 '체제 바깥의 시선'을 보여준다면, <지식인의 책임>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체제 내에서 도덕적 태도를 취하는 지식인의 책임의 문제를 그려냈다. 둘째, <지식인의 표상>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선 보편적 가치를 옹호했다면, <지식인의 책임>은 정치적 윤리 측면에서 프랑스 애국주의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셋째, <지식인의 표상>이 서구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면, <지식인의 책임>은 강고한 서구 중심주의가 여전히 전제되어 있다. 넷째, <지식인의 표상>은 아마추어적 보편성을 옹호하고 있고 <지식인의 책임>은 엘리트주의를 전제하고 있다.

이 두 텍스트는 서구에서 펼쳐지는 지식 담론이 상반된 태도와 입장 속에서 긴장하고 있음을 적절히 드러낸다. 자유와 진리를 위해 역동적으로 탈주하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텍스트와 정치적 책임의 문제를 옹호하는 토니 주트의 입장은 대립적이다. 권력을 향해 외치는 지식인은 '자유'를 옹호하지만, 공동체의 운영 원리를 강조하는 지식인은 '책임'을 강조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 담론은 대중에 대한 지식인의 책임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대중 정치 너머에 존재하는 '지식인의 표상'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급진적이다. 상대적으로, 토니 주트의 지식인 담론은 명예를 중시하며 '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강하게 기입하고 있기에 보수적 면모를 보여준다.

지식 사회의 전향자들로 요동치는 한국 사회

그렇다면, 이 두 텍스트를 한국 사회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인간의 자유와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지식이 쓰여야 한다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입장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프랑스)를 강하게 하기 위해 책임의 윤리를 강조하는 토니 주트의 입장은 대척점에 있다.

2012년 대선 국면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지식인 진영은 토니 주트의 입장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에드워드 사이드의 입장을 지지하는 지식인이라면, 지식인의 선택이 자신의 신념 체계에 비추어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문제 삼아야 한다.

대통령 선거의 정책 자문이나 특정 직책에 참여한 교수들이 500여 명이라면, 이는 심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에 속한 교수가 165명, 민주당의 '담쟁이 포럼'과 경제 외교 자문단에 이름을 올린 교수가 150여 명이다. 안철수 후보의 '진심 캠프'에 합류한 교수가 41명이지만, 비공개 자문 교수까지 포함하면 150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지식인 전문가 집단에 포함된 이들은 정치참여의 명분을 나름대로 내세우고 있다.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고 양극화의 원인을 해소"(장하성 고려대학교 교수)하기 위해, "불신, 또 불안, 불만을 극복할 리더십을 지원"하기 위해(박효종 서울대학교 교수), 그리고, "창조적·사회적·생태적 지역 발전 전략 관철"(성경륭 한림대학교 교수)하기 위해 정치적 선택을 했다고 밝혔다. 앞으로 각각의 선거 캠프를 선택하는 이들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다분하다.

정치적 선택을 감행한 교수들은 '지식 세계의 전향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들이 밝힌 '정치적 선택의 논리'는 한국 정치의 진로를 가늠하는 척도일 수 있다. 다만, '선택에 따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규정 없이 이뤄지는 이합집산은 '권력을 위한 발언'의 길에 들어서는 것과 같아 우려스럽다.

'자유와 지식의 향상'에 기여하는 지식인은 '권력에 대항해 발언'할 수 있는 위치에 스스로를 외롭게 놓아둔다. 정치적 책임을 지는 지식인은 멋지지만, 정치를 선택한 지식인은 권력 앞에 누추해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는 더 이상 지식인으로서 자신을 표상해서는 안 된다. 선택의 기로를 넘어서면, 최선의 순간에도 그는 그저 지적인 정치인일 뿐이다.

ⓒ프레시안

 

 
 
 

/오창은 중앙대학교 교수 메일보내기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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