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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1억의 그녀, 변기 닦이로 전락한 이유는?

꿈깨라 중산층]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희망의 배신>

안은별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0-26 오후 6:20:33

 

얼마 전 현대자동차그룹의 신입사원 공개 채용 과정에서, 같은 사진을 약간씩 변형하여 다른 주민등록번호와 출신 학교로 지원한 '가짜 자기 소개서'가 수십 장 발견됐다. 조사해 봤더니 모 대학 경제학과 교수가 연구 목적으로 120여 개 회사에 1900장이나 허위 자기 소개서를 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트위터에서 누군가 이 기사를 링크하며, "자소서는 원래 다 가짜야 이 양반들아"라고 덧붙였다. 뉴스는 그저 '황당 해프닝'을 전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 촌평은 회사에 자신을 팔기 위해 내놓는 문서가 거짓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의 한 유명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경력이 호환되지 않는 세계에서 허위 이력서로 취업에 도전한다. 그녀도 이 과정에서 "평범한 이력서를 눈에 띄는 것으로 만드는 법, 실제로는 갖지 않았거나 가질 자격이 없는 자신감을 가장하는 법" 그리고 "이런 식의 속임수가 게임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위장 취업 도전기를 담은 <희망의 배신>(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은, 한국에 뒤늦게 소개된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3부작' 마지막 책이다.

<긍정의 배신>(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과 <노동의 배신>(최희봉 옮김, 부키 펴냄) 그리고 이 책의 원제는 모두 '배신'과 거리가 멀지만, 사회적 고통을 긍정 마인드로 견뎌도, 뼈 빠지게 노동해도, 하라는 대로만 하면 잘 살 거라는 희망을 가져도 소용없는 세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꽤 잘 지은 제목이다. <긍정의 배신>의 예상치 못한 성공을 이어가보려는 출판사의 희망도 배신당했을지 모르겠지만….
 

▲ <희망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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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배신>의 원제는 싼 광고 상품으로 손님을 끌어 비싼 물건을 파는 상술을 뜻하는 "Bait and Switch"라고 한다. 책을 읽다 보니 이건 기업 중심의 사회에서 처참하게 잘려 버린 화이트칼라 실직자들이, 다시 안정적인 중산층으로 진입하고자 사기에 가까운 게임에 말려드는 불행한 처지를 은유하는 것 같다. 겨우 "실직은 당신 내면의 문제야"란 말을 듣기 위해 코칭 프로그램에 수백 달러를 지불하고, 인맥을 만들어 준다는 네트워크 모임에서는 같은 실직자의 명함 몇 개만 쥐고 돌아오기 일쑤다. 기업에 맞는 인간이 되기 위해 나를 개조하고 또 개조하지만, 돌아오는 건 무반응, 연장되는 건 '공백' 상태뿐이다.

바버라는 자신이 알려진 대학, 출판(잡지 신문 책), 비영리 진보 단체 등 일부 영역은 배제하고, 그동안 비판해 온 기업에 대한 비판 의식과 의구심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신분을 만들고 거기에 맞는 개인사를 갖다 붙인다. 그녀는 활동가 경험, 출판사의 홍보부 사람들과 함께 일해 본 경험 등을 떠올려 가며 "나는 회의를 계획하고 주재했다.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리더 역할을 했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데 익숙하다"는 식으로 '홍보 전문가'로서 자신을 위장한다. 그리고 결혼 전 성을 활용해 바버라 알렉산더로 명함을 팠다.

반쯤은 바버라이면서 반쯤은 바버라가 아닌 자신을 만들어 놓고 기업의 세계로 나간 그녀, 결과는 어땠을까? 이 책이 블루칼라 노동을 다룬 <노동의 배신>과 마찬가지로 위장 취업 '체험'기라 생각한 나는 책의 3분의 1을 읽어갈 때쯤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쯤이면 어떤 기업이든 들어가서 과도한 야근과 상사의 압박에 괴로워하는 내용이 나와 줘야 되는 거 아냐? 라는 기대를 갖고 읽어나갔지만, 책의 마지막에 이르도록 실험자=피실험자가 결국 원하는 홍보직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보험 없는 보험 판매원, 화장품 방문 판매원 같은 영업직으로는 간신히 취업되기는 한다.)

비단 그녀가 원래 글 쓰던 돌아갈 장소가 있어서, 그러니까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약 10개월간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그녀가 코칭 프로그램이나 취업 알선 행사에서 만난 전 화이트칼라 구직자들에게 연락을 해 본 결과, 열한 명 중 '진짜' 일자리를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그들은 일단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시간당 8달러를 받고 월마트에서 육체 노동을 하거나, 공황 발작 등의 고통을 겪으며 청소나 변기 닦기 등에 매진했다.

그들은 이것을 "생존용 일자리"라 부른다. 그러나 저자는 '진짜 일자리'를 상정하는 "생존용"이란 명명이 낙관적이라면서, 이 상태가 각자의 전문 분야를 살린 재취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실업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물론 생존용 일자리에 내몰린 전 화이트칼라가 기대하는 건, 대기업 옆 일류 레스토랑에서 접시를 나르다 보면 언젠가 그 회사 임원과 연줄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생각'이다.

바버라에 따르면 그들은 "열심히 일하면 물질적 풍요와 안정을 누리게 된다는 구식 청교도 윤리 속에서" "만사를 올바르게 해"왔다. "철학이나 음악에 대한 젊은 열정을 접고 꾹 참고 경영과 금융 같은 지루하고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다. 재미나 모험 대신 일찍이 안정성(다시 말해 지루함)을 선택했기에, 적어도 자기 분의 치즈조각은 계속 같은 자리에 있을 거라 생각해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책 속의 화이트칼라 실직자들이 처한 상황은, 치즈의 실종 정도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음(존재의 없음)'이다. 캐서린 뉴먼이 <추락(Falling from Grace)>에서 쓴 대로 "이전의 자아를 떨쳐 내는 지침도, 새로운 자아를 위한 지시 또는 훈련도 없으므로 사회적·문화적 진공 상태에 놓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사를 올바르게 해온 만큼 회사 속에서의 자기가 전부였는데 그것을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바버라가 보기에 코칭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구직자들은, 실업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부러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직장에서의 생활을 필사적으로 모방하고 있었다. (좀비!) 여기서 바버라의 코끝에는 시간증(屍姦症)의 냄새마저 스친다.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건 이 구절뿐만이 아니다. 바버라는 외모와 의상을 개조하는 코칭을 받는 동안 전문가의 손길로 화장을 마친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인간에서 물건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중간 단계로 일종의 죽음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라고 자문한다. 인성을 규정하고 그에 맞는 직업을 찾아준다는 와그너 에니어그램 성격 유형 지표(WEPSS) 검사지 앞에서는 자신이 "의존과 독립, 용기와 비겁함 어느 쪽으로든 이끌릴 수 있는" 생명체라며 진저리친다.

이 죽음을 잘 극복하라며 들이밀어지는 것이, 자신의 처지를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차단시키는 '종교적인' 제안들이다. 바버라는 코칭 프로그램이나 네트워크 모임에서 '내면의 문제와 마주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일자리를 끌어들이라'는 유사 종교적 선언들을 발견한다. 한국에도 불안한 시기일수록 장사가 잘 되는 건 보험사와 교회뿐이라는 우스개가 있는데, 바버라 역시 당시 미국에 횡행한 복음주의 열풍의 기능 중 하나가 "점점 더 신뢰할 수 없는 직업 세계와 인간을 화해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비꼰다.

이제 바버라가 결론부에서 역설하는 주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기업 세계는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없애야 전진할 수 있는 포식자의 세상으로 변해 버렸고, 따라서 남아 있는 자들에게도 명백하게 서바이벌 게임이며, 조금 일찍 발생한 대숙청은 결코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 다른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어려운 고민을 시작해야 하며, 바로 지금이 공통의 문제에 함께 맞설 기회가 어느 때보다 풍부하다는 것. 이 과정에서 "만성적인 억압에 시달리는 블루칼라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더욱 이상적"이라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

뒷부분이 조금 허탈할 수도 있지만, 책은 상황의 끔찍함을 상술하고 각성을 촉구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고 보인다. 그 역할은 이 책 자체보다 책이 '놓인' 자리와 함께 생각해 봄직 한데, 가령 화이트칼라 세계로 ('재진입'이 아니라) '진입'하려는 구직자들이 처하는 구조적 모순을 다룬 <청춘 착취자들>(로스 펄린 지음, 안진환 옮김, 사월의책 펴냄)이나 탄탄했던 미국 중산층의 몰락과 그 유발자들을 비판한 <중산층은 응답하라>(톰 하트만 지음, 한상연 옮김, 부키 펴냄) 등 비슷한 문제의식의 책들 옆자리 말이다. 미국에서는 각각 2006년(<희망의 배신>), 2007년(<중산층은 응답하라>), 2011년(<청춘 착취자들>)에 나왔지만 한국엔 모두 2012년에 번역되어 도달했다.

각각 결도 다르고 내놓는 방안도 다른 책들이지만, 가장 안정적이라 여겨졌던 세계에서 오는 신음소리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런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자유이지만, 이미 긍정주의와 이별한 사람들은 경제 성장과 안정적 고용 등이 보장됐던 중산층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는 또렷한 경고음에 고개를 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희망의 배신>은 그 한국어 제목이 말해주듯, '중산층의 복권', '중산층 진입 통로를 위한 재정비' 등 마지막 희망에마저도 기대지 않는 자세를 보여준다.

ⓒ프레시안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기업에서 일해본 적 없지만 글 쓰는 '화이트칼라'인 저자는, 기업 문화(기업 문턱에 이르는 문화?)의 해괴함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이 속했던 언론계와 학계의 유연함을 자주 강조한다. 가령 "언론계나 학계에는 유별나거나 까다로운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원고가 제때 도착하기만 하면,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만 하면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데 기업 세계로 향하는 길에는 성격을 개선하라는 경고 표지판이 줄지어 늘어 있다."(282쪽) 같은 부분.

맞는 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끊임없이 역겨움을 표하는 '나 자신을 포장해서 먹기 좋게 내놓기'라는 기업식 요구가, 언론계나 학계에서는 과연 없거나 덜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미국의 환경쯤 되면, 아니면 바버라 에런라이크쯤 되면 좀 다른 걸까? 이곳의 소위 '지식 시장'에서는 '지식 노동자'의 열정과 인성, 적절한 가장(假裝) 능력이 오히려 거래의 주요 품목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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