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당사자는 조선과 미국
정전협정의 정식명칭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교전 쌍방이 조선과 미국이란 의미다.
실제 협정문에 조인한 당사자도 김일성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사령관, 마크 클라크 미 육군 대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대한민국 정부는 협정문 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김일성 최고사령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로 표기하고 있다. 1948년 8월 25일 남북 동시선거를 통해 남쪽 320명 북쪽 212명의 대의원(국회의원)이 수립한 나라가 조선이다. 당시 김일성 최고사령관을 수상으로 선출했다.
반면 대한민국은 38선 이남만의 정부다. 1948년 5월 10일 미 군정은 이남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해 국회의원 200명을 뽑았다. 그들이 수립한 정부가 대한민국이고, 그들이 뽑은 대통령이 이승만이다. 당시 강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김구 선생은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지 않았다. 5.10단선은 분단을 의미하기 때문에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백범 김구의 판단이었다.
전쟁 과정에 대한민국 정부는 종적을 감추었고, 조선과 미국이 벌인 전쟁만이 기록에 남아 있다.
6.25전쟁을 흔히 동란 또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하지만, 정작 교전 쌍방은 조선인민군 대 미군이다. 동족 간의 대결이 아니라는 소리다.
교전 쌍방 간의 유일한 공식 문건인 정전협정문은 전쟁을 벌인 당사자가 누구인지, 전쟁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려준다.
정전협정문에 이승만 이름 빠진 이유
정전협정문에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이름은 빠졌다. 대한민국 정부라는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사연은 이렇다.
이승만 대통령이 개전 3일 만에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저만 살겠다고 도망갔다. 이때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편지 한 장으로 넘겨주었다. 지휘한 군대가 없으니, 정전협정문에 사인할 자리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결국 6.25전쟁은 미국이 국제연합군을 데리고 한반도에서 조선인민군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 되고 말았다.
군사작전 지휘권이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이 최근 “전쟁불사, 선제공격” 운운하지만, 그에겐 전쟁을 개시할 권한도, 작전을 수행할 군대도, 종전을 선언할 능력도 없다. 말하자면 ‘달 보고 짖는 개’ 신세일 뿐이다.
정전협정, 누가 휴짓조각냈나?
북미 쌍방은 정전협정문 제2조에서 “모든 군대와 무기의 한반도 경내 진입을 금지”했고, 제4조에서 “3개월 내에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외국군대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협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은 정전협정문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미국 육·해·공군의 한국 주둔을 결정함에 따라 미국은 67일 만에 정전협정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었다.
한 급 높은 정치회의는 이듬해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렸다.
1954년 제네바회담에서 미국은 ‘외국군대 철수’를 합의한 정전협정 제4조를 유린했다. 주한미군은 그대로 있고, 휴전선 이북의 중국군만 철수하라고 주장한 것.
또한 미국은 남북 동시선거가 아닌 휴전선 이북만의 선거를 주장했다. 전쟁 전 38선 이남에서 실시한 선거(1950년 5월 30일)가 유효하다는 근거를 들이밀었다. 게다가 미군이 선거관리를 하겠다는 억지까지 부렸다.
반면 북은 외국군대의 동시 철수와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 동시선거를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제네바회의는 파탄 나고 말았다.
1958년 주한미군은 전술핵무기를 한반도에 들여오고, 1972년 한미합동군사훈련 팀 스피릿을 전개함으로써 정전협정 제2조를 짓밟았다.
정전협정문을 다시 보고 알게 된 진실은 미국이 정전협정을 파기했으며, 한반도 평화체제를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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