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의 역사는 경제가 성장해도 민중의 경제적 형편이 저절로 나아지는 법은 없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더 많은 이윤과 더 빠른 경제성장을 탐하는 자본의 가치 증식 욕망이 견제되기 어렵다. 자본가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두 가지 관념은 특히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어 유해한 것이었다.
첫 번째 관념은 어떤 결정이든 편익과 비용을 금액 가치로 환산해서 저울질해야 한다는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적’ 믿음이었다. 예컨대 아동노동을 금지하면 아동의 건강이 개선되는 ‘편익’은 있겠지만 반면에 아동노동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자본가의 이윤이 상실되는 ‘비용’도 존재하므로 그 둘을 돈으로 따져서 비교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윤 상실이 충분히 크다면 아동노동도 유지할 수 있다는 억지였다.
두 번째 관념은 사적 자치의 원칙이었다. 그것은 사적 계약에 대한 공적 개입의 정당성을 부인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작업장으로 향하는 노동자라 해도 사용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고용 계약을 체결한 것이므로, 사적 고용 계약에 명시되지 않은 노동조건이나 산업안전 문제를 놓고 국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윤리적 가치 기준을 저버린 그런 관념들은 우리한테 낯설지 않다. 2023년 오늘도 한국사회에서 반복적으로 관철되는 자본의 논리이자 시장원리주의 경제학의 변함없는 가르침인 탓이다.
변곡점이 된 19세기 후반
참혹했던 산업혁명 초기를 지나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영국 노동자계급의 처지에는 개선의 조짐이 나타났다. 노동생산성 향상 속도를 임금 상승 속도가 처음으로 따라잡은 것이었다. 노동조건이 개선되면서 미숙련 노동자의 소득이 늘었고 노동시간도 줄었다. 공중 보건상의 진전도 괄목할 만했다. 대도시의 위생 여건이 호전되었고 전염병 통제에서도 성과가 있었다. 단축되기만 했던 노동자들의 수명도 반등했다.
19세기 중엽만 해도 악화일로였던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떻게 나아질 수 있었나. 그것은 자연적인 결과도 아니었고 자본가들의 자발적인 선택 덕분도 아니었다. 당시 공동체의 생활여건이 개선될 수 있었던 극적인 변화의 배경으로 연구자들은 두 가지 요인에 주목해왔다. 첫 번째는 철도 산업에서 나타난 기술 변화의 효과였다. 두 번째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였다.
노동 배제로 이어지지 않았던 철도 산업 혁신
19세기 초까지 기계화와 자동화는 주로 노동을 대체해 일자리를 앗아갔다. 당시 혁신은 임금을 낮췄다. 초기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면직 공업에서 특히 그랬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철도 산업의 기술 변화는 양상을 달리했다. 증기기관차 보급은 직접적으로는 마차와 마부의 설 자리를 앗아갔지만 다른 부문에서 일자리를 획기적으로 늘렸다. 철도 운영에 필요한 기본 직무 외에도 건설 및 유지보수 등 새로운 연관 직무가 만들어졌다. 운송비용 하락으로 석탄 가격이 떨어진 것도 주효했다. 그로 인해 다양한 전후방 연관 산업에서 고용이 확대되었다. 금속 공업과 기계 공업이 대표적이었다.
철도 산업에서의 혁신은 임금도 끌어올렸다. 당시 철도 회사들은 시중노임보다 높은 임금을 지급했다. 그렇게 하면 효율이 보장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 판단은 옳았다. 보수적인 주류경제학에서는 생산성이 임금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낮은 임금은 생산성이 낮은 탓일 뿐 다른 이유가 없으니 사장 탓은 하지 말라는 식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꾸로 임금 수준이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와 같은 아이디어의 현대적 경제학 개념인 ‘효율 임금’이 이미 19세기 후반 영국 철도 산업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생산성 향상의 이득을 자본과 노동이 공유할 수 있는 기제로 작동했다.
차티스트 운동과 정치적 각성
당대의 사회정치적 변화도 그와 같은 기술 변화의 방향성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동자들이 도시와 공장으로 집중되고 일터에서 공장주의 횡포와 부딪히면서 노동운동의 싹이 텄다. 노동자들은 공장주가 저임금을 강제해도, 노동시간을 늘려도, 노동 강도를 올리고 작업 규율을 강화해도 스스로를 조직하지 않는 이상 그에 맞서 대항할 방법이 없음을 자각했다. 불법이었음에도 노동조합 조직화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1834년 전국 단위 노조 상급단체(우리로 치면 민주노총)의 결성과 1838년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대투쟁인 ‘차티스트 운동’이 그 결실이었다.
차티스트 운동은 선거권이 없었던 노동자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지향을 ‘인민 헌장’에 담았다. 헌장은 일정 연령 이상의 누구한테나 투표권을 부여할 것과 재산이 많지 않으면 출마를 못하게 막았던 자격 제한을 폐지할 것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부는 강경 진압에 나섰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투옥되었다. 파업과 봉기가 뒤따랐다. 저항은 1840년대 말이면 거의 와해되었다. 하지만 노동과 자본 간 역관계가 불균형인 조건에서 노동운동의 직접 정치 참여로 집단적 대항력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계급적 각성은 그 과정에서 확고해졌다.
노동의 정치세력화야말로 변곡점을 이끌어낸 원동력
노동자계급은 포기하지 않았고 19세기 후반 정치개혁운동을 거치며 점차 정치적 대표성 확대를 위한 세력화의 길로 나아갔다. 노동운동은 피와 희생을 딛고 전진을 거듭했다. 대중적 압력 속에 개정된 1867년 선거법은 처음으로 도시의 가난한 보통 사람인 노동자들의 투표권을 인정했다. 1871년에는 세계 최초로 노동조합법이 제정되어 노동조합이 합법화되었다. 1900년 노동당 창당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흐름은 이어졌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출은 진정으로 영국 사회를 변화시킨 원동력이었다. 아래로부터의 목소리가 조직되고 파급력이 커지면서 사회적 합의점의 위치를 진보적인 쪽으로 옮겨올 수 있었다. 이웃 유럽에서 번져가는 혁명의 기운이 두려웠던 보수파들로서도 차라리 입법을 통한 점진적인 개혁으로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수용하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아동노동이 제한되었다. 공공서비스 공급이 확대되었다. 공중보건 개선을 위한 도시 기반시설 확충도 이루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바라던 사회 개혁 조치들이 조금씩 실행에 옮겨졌다. 그렇게 국가의 역할도 변화되었다.
산업혁명의 역사는 경제가 성장해도 민중의 경제적 형편이 저절로 나아지는 법은 없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더 많은 이윤과 더 빠른 경제성장을 탐하는 자본의 가치 증식 욕망이 견제되기 어렵다. 자본가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두 가지 관념은 특히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어 유해한 것이었다.
첫 번째 관념은 어떤 결정이든 편익과 비용을 금액 가치로 환산해서 저울질해야 한다는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적’ 믿음이었다. 예컨대 아동노동을 금지하면 아동의 건강이 개선되는 ‘편익’은 있겠지만 반면에 아동노동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자본가의 이윤이 상실되는 ‘비용’도 존재하므로 그 둘을 돈으로 따져서 비교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윤 상실이 충분히 크다면 아동노동도 유지할 수 있다는 억지였다.
두 번째 관념은 사적 자치의 원칙이었다. 그것은 사적 계약에 대한 공적 개입의 정당성을 부인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작업장으로 향하는 노동자라 해도 사용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고용 계약을 체결한 것이므로, 사적 고용 계약에 명시되지 않은 노동조건이나 산업안전 문제를 놓고 국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윤리적 가치 기준을 저버린 그런 관념들은 우리한테 낯설지 않다. 2023년 오늘도 한국사회에서 반복적으로 관철되는 자본의 논리이자 시장원리주의 경제학의 변함없는 가르침인 탓이다.
변곡점이 된 19세기 후반
참혹했던 산업혁명 초기를 지나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영국 노동자계급의 처지에는 개선의 조짐이 나타났다. 노동생산성 향상 속도를 임금 상승 속도가 처음으로 따라잡은 것이었다. 노동조건이 개선되면서 미숙련 노동자의 소득이 늘었고 노동시간도 줄었다. 공중 보건상의 진전도 괄목할 만했다. 대도시의 위생 여건이 호전되었고 전염병 통제에서도 성과가 있었다. 단축되기만 했던 노동자들의 수명도 반등했다.
19세기 중엽만 해도 악화일로였던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떻게 나아질 수 있었나. 그것은 자연적인 결과도 아니었고 자본가들의 자발적인 선택 덕분도 아니었다. 당시 공동체의 생활여건이 개선될 수 있었던 극적인 변화의 배경으로 연구자들은 두 가지 요인에 주목해왔다. 첫 번째는 철도 산업에서 나타난 기술 변화의 효과였다. 두 번째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였다.
노동 배제로 이어지지 않았던 철도 산업 혁신
19세기 초까지 기계화와 자동화는 주로 노동을 대체해 일자리를 앗아갔다. 당시 혁신은 임금을 낮췄다. 초기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면직 공업에서 특히 그랬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철도 산업의 기술 변화는 양상을 달리했다. 증기기관차 보급은 직접적으로는 마차와 마부의 설 자리를 앗아갔지만 다른 부문에서 일자리를 획기적으로 늘렸다. 철도 운영에 필요한 기본 직무 외에도 건설 및 유지보수 등 새로운 연관 직무가 만들어졌다. 운송비용 하락으로 석탄 가격이 떨어진 것도 주효했다. 그로 인해 다양한 전후방 연관 산업에서 고용이 확대되었다. 금속 공업과 기계 공업이 대표적이었다.
철도 산업에서의 혁신은 임금도 끌어올렸다. 당시 철도 회사들은 시중노임보다 높은 임금을 지급했다. 그렇게 하면 효율이 보장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 판단은 옳았다. 보수적인 주류경제학에서는 생산성이 임금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낮은 임금은 생산성이 낮은 탓일 뿐 다른 이유가 없으니 사장 탓은 하지 말라는 식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꾸로 임금 수준이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와 같은 아이디어의 현대적 경제학 개념인 ‘효율 임금’이 이미 19세기 후반 영국 철도 산업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생산성 향상의 이득을 자본과 노동이 공유할 수 있는 기제로 작동했다.
차티스트 운동과 정치적 각성
당대의 사회정치적 변화도 그와 같은 기술 변화의 방향성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동자들이 도시와 공장으로 집중되고 일터에서 공장주의 횡포와 부딪히면서 노동운동의 싹이 텄다. 노동자들은 공장주가 저임금을 강제해도, 노동시간을 늘려도, 노동 강도를 올리고 작업 규율을 강화해도 스스로를 조직하지 않는 이상 그에 맞서 대항할 방법이 없음을 자각했다. 불법이었음에도 노동조합 조직화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1834년 전국 단위 노조 상급단체(우리로 치면 민주노총)의 결성과 1838년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대투쟁인 ‘차티스트 운동’이 그 결실이었다.
차티스트 운동은 선거권이 없었던 노동자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지향을 ‘인민 헌장’에 담았다. 헌장은 일정 연령 이상의 누구한테나 투표권을 부여할 것과 재산이 많지 않으면 출마를 못하게 막았던 자격 제한을 폐지할 것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부는 강경 진압에 나섰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투옥되었다. 파업과 봉기가 뒤따랐다. 저항은 1840년대 말이면 거의 와해되었다. 하지만 노동과 자본 간 역관계가 불균형인 조건에서 노동운동의 직접 정치 참여로 집단적 대항력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계급적 각성은 그 과정에서 확고해졌다.
노동의 정치세력화야말로 변곡점을 이끌어낸 원동력
노동자계급은 포기하지 않았고 19세기 후반 정치개혁운동을 거치며 점차 정치적 대표성 확대를 위한 세력화의 길로 나아갔다. 노동운동은 피와 희생을 딛고 전진을 거듭했다. 대중적 압력 속에 개정된 1867년 선거법은 처음으로 도시의 가난한 보통 사람인 노동자들의 투표권을 인정했다. 1871년에는 세계 최초로 노동조합법이 제정되어 노동조합이 합법화되었다. 1900년 노동당 창당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흐름은 이어졌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출은 진정으로 영국 사회를 변화시킨 원동력이었다. 아래로부터의 목소리가 조직되고 파급력이 커지면서 사회적 합의점의 위치를 진보적인 쪽으로 옮겨올 수 있었다. 이웃 유럽에서 번져가는 혁명의 기운이 두려웠던 보수파들로서도 차라리 입법을 통한 점진적인 개혁으로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수용하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아동노동이 제한되었다. 공공서비스 공급이 확대되었다. 공중보건 개선을 위한 도시 기반시설 확충도 이루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바라던 사회 개혁 조치들이 조금씩 실행에 옮겨졌다. 그렇게 국가의 역할도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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