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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서방이 나쁜 놈이다

 

12월 28일(현지시각) 가자지구 중부 알 자웨이다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다친 팔레스타인 소녀가 주변의 도움을 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편집자주

가자지구 남부의 한 피난민 수용소에서 하루에만 민간인 165명이 사망하는 등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이 해를 넘겨 계속 되는 가운데, 미국의 조 바이든 정권이 29일(현지시각) 긴급조치를 발동해 의회의 심의 없이 이스라엘에 1900억원 상당의 포탄과 군사 장비를 추가로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미국은 이스라엘의 안보에 책임이 있으며 이스라엘이 강력하고 준비된 자위 능력을 발전하고 유지하도록 돕는 게 미국의 이익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10월 7일 이후 가자 주민 2만 1000명 이상을 죽인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전쟁'을 계속 확대하겠다고 공언해도 서방의 이스라엘 지원은 사그라들 기미가 없는 것이다. 서방의 지배 계급의 지원이 끊이지 않는 한, 서방은 이번 학살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비난하는 미들이스트아이의 기사를 소개한다. 

원문:  ‘Are we the baddies?’ Western support for genocide in Gaza means the answer is yes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국의 한 인기 코미디 코너에서 최전방에 있는 나치 장교 하나가 불현듯 생각난 듯 갑자기 동료 장교에게 묻는다. ‘우리가 나쁜 놈인 거야?’ 지난 3달 동안 그런 순간이 지속되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서방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대량 학살 전쟁을 말로 지지할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 보호하고 무기 등의 군사적 지원도 제공하고 있다. 대다수가 여성과 어린이인 약 200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고향을 떠났고, 2만 명 이상이 살해 됐으며, 수만 명이 다쳤다. 서방은 이에 대한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

서방 정치인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공공건물을 포함한 주요 인프라를 폐허로 만들고, 가자지구의 보건 부분을 붕괴시키는 동안 이스라엘이 ‘방어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제 남은 팔레스타인인은 굶주림과 질병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은 도망갈 곳도, 폭탄을 피할 곳도 없다. 언젠가 탈출이 가능해진다면 그들은 이웃 나라 이집트로 갈 것이다. 그리고 수십 년의 난민 생활 끝에 마침내 고국에서 영구 추방될 것이다.

서방 정권이 하마스를 비난하며 이스라엘의 만행을 정당화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군인과 정착민 민병대가 하마스가 없는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의 파괴를 정당화하면서 이를 드레스덴과 같은 독일 도시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과 자주 비교했다. 그것이 이미 오래 전에 2차 세계대전의 최악의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규정됐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자기가 불법 점령한 땅의 원주민을 국제 인도법이 없던 시절의 식민지적 방법으로 살해하고 하고 있지만,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이스라엘을 서방 지도자들이 응원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나쁜 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노예의 반란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변론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인류의 퇴행인 것 같다. 70년 이상 ‘발전’이라는 외피 속에서 인권이 강조되고 국제기구가 발전하며, ‘인도주의’가 확산하는 동안 가려졌던 서구의 원시적이고 추악한 모습이 드러난 것 같다. 그런 주장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베트남,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우크라이나 모두 거짓말에 근거한 전쟁이었다. 미국과 나토 동맹국의 진정한 목표는 다른 나라의 자원을 약탈하고, 미국의 세계적 패권을 유지하며, 서방 엘리트의 배를 불리는 것이었다.

그런 실제적인 목표는 여러 기만적인 이야기에 의해 유지됐다. 전쟁은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 이슬람 ‘테러’, 새로운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전쟁은 억압받는 여성을 해방하고, 인권을 보호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등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이야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갇힌 민간인을 폭격해 사실상 감옥이던 그곳을 완전히 파괴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에 ‘인도주의’를 갖다 붙일 수 없다. 가자지구는 마치 큰 지진이라도 난 지역 같다. 하지만 그 원인은 자연재해가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위적인 재앙이다. 이스라엘조차 이번 학살로 가자지구의 여성과 소녀가 ‘해방’된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민주주의 증진’에 관심 있는 척도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에 따르면 가자지구는 ‘인간 동물’로 가득 찼으며, 가자지구를 완전히 밀어버려야 할 뿐이다.

게다가 가자지구에 갇혀 있는 수천 명의 전사로 구성된 하마스가 서방의 삶의 방식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하마스는 어떤 종류의 탄두로도 유럽을 공격할 수 없고, 하마스의 근거지는 파괴되기 전에도 서방을 정복하고 ‘샤리아’ 법을 강요할 준비가 된 이슬람 제국의 심장부처럼 보인 적이 없었다.

사실 지난 몇 달을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했다. 가자지구는 국가도 아니고 군대도 없다. 가자지구는 수십 년 동안 불법 점령 당했고, 16년 동안 완전 포위되어 공격을 받아 왔으며, 이스라엘은 약한 정도의 영양실조 상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열량을 계산해서 가자지구의 식량 반입을 통제했다.

미국의 유대인 학자 노먼 핀켈스타인이 지적했듯이,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노예 반란’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스파르타쿠스가 로마에 대항해 일으킨 기원 전 1세기의 반란부터 1831년 버지니아에서 일어난 미국의 냇 터너 반란에 이르기까지 노예 반란은 역사적으로 잔인한 유혈 진압을 당했다. 우리가 유혈 진압을 하는 교도관의 편에 선 것인가. 우리가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를 무장시키고 있는 것인가.

집단 가스라이팅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이 설득력 있는 명분이 없기 때문에 서방 지도자들은 자국민과, 적어도 그들의 생각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완전히 없애려는 이스라엘이 그럴 권리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 팔레스타인인의 해방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는 것, 이 지역 모든 사람의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 등이 이제 모두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팔레스타인 사람을 죽이는 폭격을 중단하라고 휴전을 요구하는 것은 유대인을 혐오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혐오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반유대주의에 해당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배 계급의 집요하고 철저한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았다면 아주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학살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가자지구의 파괴와 팔레스타인인의 인종 청소,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어린이의 살해를 원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극우 정부와 군대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진정한 유대인 혐오이다.

이런 집단 가스라이팅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완전히 파괴하기 아주 오래 전부터 진행됐다. 2015년 영국 노동당 당수로 선출된 제레미 코빈은 처음으로 반제국주의 의제를 영국 정치의 핵심으로 끌어올렸다. 팔레스타인의 굳건한 지지자였던 코빈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됐다. 자본주의 제도권에게 매우 중요한 미국의 의존국이자, 서방이 석유 생산지인 중동을 군사적으로 장악할 때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이스라엘을 말이다.

서방 엘리트들은 이에 전례 없는 적대감을 보였다. (이를 지켜본 코빈의 후임 키어 스타머는 이후 노동당을 나토의 제일 가는 지지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코빈을 영원히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해 전략을 짰다. 그리고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었다. 이 명예훼손 캠페인은 코빈 개인을 매장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 노동당을 분열시켜 정당의 에너지를 모두 내분에 소모하고 선거 승리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흑색선전

서방은 영국과 미국 대중을 상대로 같은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번 달 미국 하원은 시오니즘을 반대하는 것(지금의 경우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을 반대하는 것)을 반유대주의와 동일시하는 결의안을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가자지구 학살을 끝내기 위해 휴전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고, 이스라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요르단강부터 지중해까지’라는 구호를 ‘이스라엘 국가와 유대 민족의 멸망을 부르는 구호’라고 비난했다. 이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흑인에게 그랬듯,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에게 평등이나 의미 있는 자유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을 서방 지배층이 의도치 않게 인정한 것이다.

미국 정치인은 현실이 완전히 뒤바꿔 대량 학살에 대한 반대를 대량 학살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이 흑색선전을 가로 막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 서구 엘리트가 스스로 나서서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돼야 할 기관에서 이를 차단하기에 이르렀다. 얼마 전 미국 의회는 차기 지배층을 육성하는 미국 최상위 대학의 세 총장을 불러 유대인들이 가자지구 학살의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 때문에 직면한 반유대주의 위협에 대해 질타했다.

서방이 무엇을 중시하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서방은 팔레스타인인을 학살로부터 보호하거나 학살에 반대할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자유를 지키는 것보다 팔레스타인인을 죽일 이스라엘의 권리를 열렬히 지지하는 일부 유대인 학생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더 중시한다. 캠퍼스 내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정치인의 압력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던 세 대학 총장의 태도는 대학 기부 거부 운동과 총장 해임 요구로 이어졌고, 그중 한 명인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엘리자베스 매길 총장은 이미 사임했다.

전방위적 위기

이런 일이 서방의 교육 기관을 덮친 이례적이고 일시적인 집단적 정신병의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여러 전선에서 서방의 장기적인 위기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절망적인 증거이다. 첫째, 그것은 지배 계급의 가시성이 커졌다는 신호이다. 일반 대중의 눈에 지배 계급이 다시 띄기 시작했고, 그들의 이해 요구가 보통 사람의 이해 요구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대중이 실감하기 시작했다. 우리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제도권’, ‘지배 계급’, ‘계급 전쟁’이라는 말을 써도 미친 사람이나 옛날 옛적 1950년 얘기를 하는 사람 취급을 받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서방 정치를 떠받친 내러티브가 얼마나 무너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980년대에 프란시스 후쿠야마와 같은 지식인이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것은 이제 터무니없어 보인다.

둘째, 그것은 서구의 엘리트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질서의 내재적 모순을 가리기 위해 존재했지,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 현실이 이데올로기의 외피를 뚫고 있다. 현재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기후 위기인데, 자본주의의 대량 소비와 경쟁을 위한 경쟁 모델은 인류에게 자살 행위임이 증명되고 있다. 특히 석유에 중독된 경제에서 자원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성장은 점점 더 큰 비용이 드는 사치라는 점도 증명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보다 나은 생활 수준을 꿈꾸며 자란 세대는 더 부유해지기는커녕 더 실망하고 씁쓸해하고 있다. 그리고 ‘진보’, 그러니까 더 따뜻하고 서로를 보살피며 평등한 사회를 향한 약속은 이제 45세 미만의 서양인 대부분에게 말도 안 되는 한심한 농담처럼 들릴 것이다.

난무하는 거짓말

이제는 서방 사람에게도 서방이 최고라는 주장이 사상누각처럼 비치기 시작했다. 그 주장이 외국에서 무너진 지는 오래됐다. 서방의 전쟁으로 파괴됐거나, 파괴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나라에서는 서양이 줄 수 있는 건 위협뿐이다. 협조하거나 벌을 받거나 해야 한다. 가자지구에서 지금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스라엘이 자기주장대로 싸움의 최전방에 선 것은 맞지만, 그 싸움은 문명 간의 충돌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자유 민주주의 질서의 민낯이 드러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해롭고 설득력 없는 온갖 거짓말이 난무하는 불안정한 전초지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중동 유일의 민주주의 국가’로 가장한 인종차별 정책의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이다. 그리고 ‘하마스 제거’로 가장하고 가자지구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항상 협박을 통해 이런 거짓말을 감춰야 했다. 그 속임수를 감히 지적했다가는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가자지구 학살을 중단시켜야 하는 당면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스라엘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지극히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이다.

이런 모든 상황의 끝은 무엇일까? 10년 전 이스라엘의 평화운동가이자 학자인 제프 핼퍼는 [민중을 상대로 한 전쟁]이라는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끝없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모두 팔레스타인인이 될 운명에 처해 있다”. 서방의 ‘적’만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다. 특권과 부를 영원히 누리고자 하는 자본주의 지배 계급에게 전 세계 민중도 언제든 지배 계급의 이익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세상에 나올 때는 심한 과장처럼 들렸던 핼퍼의 주장이 이제는 선견지명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량 학살의 최전선만이 아니다. 가자지구는 서방 엘리트가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개척하며, 우리의 존엄성과 인간다움이 존중받듯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인간다움도 존중받을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벌이는 전쟁의 최전선이기도 하다.

그렇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전선이 그어졌다. 한쪽에는 ‘나쁜 놈’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이들과 한 편이 되기를 거부하는 모든 자가 ‘적’으로 낙인 찍혀 서 있다.  

“ 정혜연 기자 ”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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