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이삼촌>의 무대인 제주 북촌리의 희생자 추모식에서 분향하는 현기영 작가. ⓒ 현기영
현기영 작가의 4·3 소설을 보면 지식 청년과 교사, 학생, 공무원, 경찰, 해녀, 일본 귀환자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4·3에 대한 시대 상황과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매우 섬세하고 리얼하다. 현장취재와 증언 수집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짐작이 간다. 그가 제주 출신이기는 하지만,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비로소 4·3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점을 감안하면 1970년대에 어떻게 4·3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이 나올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저도 4·3이 일어나기 전에 발생한 3·1사건을 비롯해 당시 제주도의 상황을 잘 몰랐습니다. 모두가 쉬쉬하던 때였으니까요. 그런 분위기에서 <순이삼촌>의 무대였던 북촌리로 가서 학살사건의 증언을 들으려고 했습니다만, 마을 분들이 저를 의심하면서 말을 해주지 않는 겁니다. 마침 그 마을 출신의 동창이 있어서 그 친구를 앞세우고 갔는데도 역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더라고요.
제가 그때 마을 사람들에게 울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매달리기도 했고, 때로는 협박조로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작가가 와서 그 참혹했던 사건을 이제는 세상에 드러내야 하지 않겠냐고 호소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면, 나중에 여러분이 돌아가셔서 먼저 가신 고인들을 무슨 면목으로 만날 거냐,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분들이 의심한 건 당시만 해도 함부로 진상을 말했다가는 정보기관에 잡혀갔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에는 굿이 흔했는데, 4·3 때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달래는 원혼 굿이란 게 있습니다. 이런 굿을 하게 되면 경찰이나 안기부 같은 데서 몰래 와서 엿듣습니다. 무당이 증오의 말이나 분노의 말을 하지 않을까 감시하기도 하고, 밀항자의 이름이나 어떤 정보를 얻으려고도 한 것이지요. 이런 시절이었습니다. 6월항쟁 이후 4·3 진상규명 작업이 진행되면서 많은 증언이 나왔고 그걸 제가 다 소화해서 소설을 쓸 수 있었지요."
현기영 작가는 4·3 소설 이외에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제주도를 휩쓴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을 소재로 한 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라든가 1932년 제주도 해녀 투쟁을 그린 장편 <바람 타는 섬>을 발표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소설이라기보다 소설 형식을 빌린 역사 탐구서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들로, 제주의 역사와 민초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연민과 유대감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보는 제주도, 제주공동체는 어떤 것일까.
"제주도는 지금처럼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는 한반도의 맨 마지막 아래쪽에 있는 절해고도의 거대한 땅덩어리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리적으로도 거의 단절됐고, 언어도 육지와는 달랐기 때문에 특유의 공동체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경상도 공동체, 전라도 공동체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역사적으로 제주도는 공동체적인 삶을 영위해온 것입니다.
한편으로 조선시대에 중앙정부는 제주도를 하나의 내국 식민지로 간주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문서에도 나타나 있어요. 천주교 제8대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주교가 고종의 황제즉위식을 마련해줬습니다. 그런데 제국이 되려면 식민지가 있어야 하잖아요. 당시 황성신문 주필이었던 장지연이 보니까 식민지가 있는 겁니다. 북으로는 여진, 즉 함경북도가 있고, 남으로는 탐라, 제주도가 있으니 명실공히 대한제국이 성립할 수 있는 거다, 라고 한 것이지요.
이렇게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본토와는 동떨어져 나름의 공동체를 이뤘던 제주도는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 살았다는 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제주도에만 있는 특수한 형태의 품앗이를 수눌음이라고 합니다. 농사일을 할 때 이웃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도와주는 공동작업의 전통이 이어져 왔습니다. 바다에 공동으로 미역밭 같은 것을 조성해 공동으로 물질을 하고 공동으로 판매했던 해녀들의 작업도 그렇고, 한라산 기슭에 마을 공동목장을 조성해 번갈아 가면서 말을 돌보았던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제주도는 공동체의 전통이 강했습니다."
제주공동체 이야기를 하다 보니 화제가 '장두'로 이어졌다. 현기영 작가의 장편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민중 속에서 장두가 태어나고 장두를 앞세워 관권의 불의에 저항하던 섬 공동체의 오랜 전통, 그 신화의 세계는 그날로 영영 막을 내리고 말았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제주도에서는 백성이 학정으로 인해 도탄에 빠졌을 때 자주 민란이 발생했는데, 이때 리더인 장두가 나와 민중을 이끌고 목적을 달성한 후 자기 목숨을 내놓곤 했다.
위에서 현 작가가 소설에서 언급한 장두는 4·3 때 유격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를 말한다. 그렇다면 현기영 작가는 4·3을 민란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이덕구를 제주공동체가 배출한 '장두'의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일까.
"저는 4·3을 이데올로기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란의 전통이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4·3이 발생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덕구는 처음엔 중요한 위치에 있던 장두였죠. 그리고 자기 목숨을 내놓으려고 했겠지요. 그런데 옛날엔 민란이 일어나면 장두가 대표로 죽었는데, 4·3 때는 온 백성들을 다 죽여버렸잖아요. 장두의 목숨이 수많은 희생의 하나에 불과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사건이지요.
그래서 이덕구에 대해 영웅적이라고 얘기하기가 참 곤란해요. 비극적인 인물이 되어 버린 거예요. 이 점을 내 독자들이 불만스러워합니다. 이덕구를 훌륭한 장두로 묘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이죠. 일각에선 4·3 봉기가 결과적으로 많은 도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면서 좌익 모험주의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4·3이 일어나기 전에 3명의 청년이 고문당해 죽는 등 당시 봉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앉아서 죽느니 일어서서 싸우자 한 겁니다. 작년에 나온 제 소설 <제주도우다>에 당시 상황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역사 왜곡하는 작업 진행 중, 어처구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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