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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세월호는 '제일 위험한 배'였고, 해경의 실패는 '조직적'이었다"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 기자간담회

이명선 기자 | 기사입력 2024.04.04. 04:24:48

세월호는 왜 침몰했는가. 해경은 왜 304명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는가. 참사 10년이 지났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2016년 3월 참사 발생 후 10개월간의 기록과 자료를 토대로 <세월호, 그날의 기록>(초판)을 쓴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기록팀)이 세월호 참사 10주기인 2024년 4월 참사 발생 후 10년간의 기록과 자료를 추가해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개정판)을 냈다.

기록팀은 3일 서울 중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서사 구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개정판을 만들게 됐다고 밝혔다. 또 세월호 침몰과 해경의 구조 실패 원인을 규명하는 데 있어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등 국가 조사기구가 가진 한계를 지적하며 "기록을 토대로 한 민간 차원의 진상규명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록팀은 지난 10년 간의 진상규명 노력을 돌아보면서 특조위, 선조위, 사참위 등 국가 조사기구가 보여준 문제점을 대략 세 가지로 정리했다.

"하나는 위원회의 조사가 법적 처벌을 중심을 한 조사로 행해지면서 참사의 총체적인 진실, 종합적인 진실을 규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방향 설정에 문제가 있었다. 두 번째로 조사 대상이 분할되고 단절되면서 조사관들이 참사의 전체적인 상을 그려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세 번째 문제점은 세월호 침몰 원인 조사가 외력에 대한 가능성, 잠수함 충돌 가능성을 찾는 데 집중됨으로써 침몰 원인을 보다 깊이 있게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이 그쪽으로 많이 몰렸다. 이런 것을 '기우제식' 조사라고 하는데, 과학적인 가설로 외부 충돌설을 기각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음에도 외력설을 기각하는 대신 잠수함이 등장할 때까지,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듯 조사를 계속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개정판 기록팀에는 △10년 동안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탐사보도를 이어온 <뉴스타파> 김성수 기자, △특조위 조사관과 선조위·사참위 보고서 집필위원으로 일했고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을 쓴 박상은 플랫폼C 활동가, △세월호 국민고소고발대리인단 단장, 선조위 사무처장으로 일하며 진상규명에 앞장서 온 이정일 변호사, △선조위·사참위 보고서 집필위원으로 활동했고 과학기술학의 관점에서 세월호 진상규명 과정을 연구하고 있는 전치형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2016년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기획하고 감수한 (재)진실의 힘 이사 조용환 변호사가 참여했다.

▲ 4월 3일 서울 중구 상연재에서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그날 세월호는 "제일 위험한 배"이자 "열려 있는 배"였기 때문에 침몰했다"

세월호 선체가 바다에 가라앉은 지 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자(2017년 3월), 그동안 의혹이 난무했던 침몰 원인 규명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선조위는 1년 4개월간의 활동을 마무리하며(2018년 6월), 기계 결함 등의 이유로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내인설'과 충돌 등 외력에 의한 침몰 가능성 등을 추가로 조사해야 한다는 '열린안', 즉 '외력설' 두 가지 결론을 담은 종합보고서를 냈다.

선조위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참위는 대한조선학회의 검토 의견과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의 보고서 모두 잠수함 충돌을 비롯해 외력에 의한 세월호 침몰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에도 외력설 입증에 매달렸다. 결국 사참위는 '외력설(잠수함 충돌설)의 가능성은 낮다'는 취지로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2022년 6월).

기록팀은 초판 당시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 비교적 짧게 정리했지만, 선조위와 사참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개정판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었다.

"세월호 침몰 원인을 얘기할 때 4월 16일 아침 기계 결함이 있었던 것이냐, 아니면 잠수함 같은 물체와 충돌한 것이냐에 대한 여러 의혹과 설명이 제시되었지만, 그날 세월호 침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 세월호 도입 당시로 돌아가 선원들이 말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전사(全史)부터 밟아와야 한다는 게 기록팀의 생각이었다.

차분하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세월호가 왜 이렇게 위험한 상태로 출항하게 되었는지, 이 과정에 개입한 사람과 조직은 누구였는지 이런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에 따라 이렇게 위험한 출항과 침몰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도 전사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알 수 있다."

또 기록팀은 국가 조사기구의 애매한 결론과 달리, 나름대로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제는 세월호 침몰 원인을 정리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사참위의 종합보고서에는 '외력 충돌 외의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으며 외력이 침몰의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최종 결론에 이르렀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허용되어 있어서 침몰 원인을 확인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해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쓰여 있었다.

기록팀이 그동안의 조사 결과를 종합하고 여러 가지 보고서를 분석한 바로는, 사참위에서 주력했던 외력설에 대한 분쟁 또는 잠수함 충돌 가능성에 대한 조사에 대한 결론을 이제는 내릴 수 있다라고 판단했다. '잠수함 충돌설은 그동안의 오랜 과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외력이나 잠수함과 같은 개념은 세월호 침몰에 관한 설명에서 삭제할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기록팀은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 책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세월호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이자 '열려 있는 배'였기 때문에 침몰했다. (…) 방향타가 평소보다 큰 각도로 돌아간 것은 솔레노이드 밸즈의 고장으로 촉발됐지만, 세월호는 정상 조타 범위 내의 선회도 감당하지 할 정도로 복원성이 나쁜 배였기 때문에 침몰했다. 세월호의 침몰은 솔레노이드 밸브가 아니라 배 전체의 문제였다. (…) 또 실제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들이 평소처럼 기관실 각 구역을 활짝 열린 상태로 둔 채 승객들을 버리고 배를 빠져나옴으로써 세월호의 전복은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참사로 확대됐다.

세월호 침몰은 기술적인 사고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세월호 침몰의 책임은 4월 16일 아침에 고착된 솔레노이드 밸브에 물을 것이 아니라 4월 15일 밤 지극히 위험한 배를 출항시킨 사람과 조직과 제도에, 일본에서 들여온 배를 결국 그런 상태가 되도록 만든 사람과 조직과 제도에 물어야 한다."(403~404쪽)

▲ 2017년 3월 인양된 세월호 선체. ⓒ프레시안

"그날 해경의 실패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참사 9년 만에 나온 법원의 최종 결론은 사망 304명·부상 142명에 대한 책임을 해경 간부에게 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2023년 11월). 그러면서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 등 참사 당시 중앙구조본부장, 광역구조본부장, 지역구조본부장, 중앙구조 부본부장이었던 해경 지휘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구조 실패의 책임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참사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김경일 전 123정장이 유일했다.

기록팀은 해경 지휘부의 최근 기록 재판을 모두 검토하는 등 해경의 구조 실패 원인 분석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들은 해경의 구조 실패 원인 6가지를 꼽으며 "304명의 죽음으로 이어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101분 동안 그런 비극적인 결과가 생긴 것은 해경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무능과 무책임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이 승객들이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점, △사고 발생 해역의 관제를 맡은 진 VTS가 직무 태만으로 사고를 실시간으로 인지하지 못해 초기 대응 시간이 6분 이상, 관점에 따라 15분 이상 느려졌다는 점, △세월호가 침몰한 101분 동안 해경은 세월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선장과 선원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는 데 완전하게 실패했고 상황 인지에 실패함으로써 구조를 위한 판단과 실행이 가로막혔다는 점, △세월호가 101분 만에 빠르게 침몰했다는 사실이 해경의 구조 실패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점, △현장에 출동한 해경이 침몰하는 배 앞에서 상황을 판단하고 필요한 조치를 실행하는 의지도 능력도 갖췄다는 점, △세월호가 침몰하는 101분 동안 지휘부는 지휘도 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았다라는 점 등.

기록팀은 "해경의 구조 실패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해경 지휘관 한 사람 또는 123정 하나로 축소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점이다. '그날 해경의 실패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라는 것"이라며 "비록 법원이 해경 지휘부의 손을 들어주긴 했지만 어쨌든 해경 지휘부의 책임이 대단히 크고 무겁다"고 지적했다.

이에 기록팀은 책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바다로 나오기만 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들어 승객을 구하는 어선들과 어업지도선들이 있었고, 그 뒤에는 대형 상선들이 있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날씨도 좋다. 수온도 낮지 않았다.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해경은 아무런 위험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현장에 있는 123정의 독자적 판단과 활동을 방해하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조건을 계속 만들어내다가 결국 참담한 실패를 불러일으키고는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며 아래위로 책임만 전가하는 해경지휘부를 가진 것이 비극이었다.

훨씬 더 많은 승객을 구할 수 있었고, 구해야 했다. 세월호 사고가 참사로 끝나야 할 어떤 필연성도 없었다."(783쪽)

▲ 세월호 침몰 당시 해경 123정 모습. ⓒ해양경찰

"'그날'은 2014년 4월 16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록팀이 책에서 밝혔듯이 "'그날'은 2014년 4월 16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참위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발표한 지 두 달여 만에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159명이 사망했으며 187명 부상을 입었다. 가족과 지인을 잃은 이들뿐만 아니라 SNS와 방송 등을 통해 참상에 무방비로 노출된 이들이 받은 정신적 충격까지 사회 전반이 받은 충격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기록팀 또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이 세월호 참사 당시처럼 잘 진행되지 않는 것을 목격하면서 '혹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과정이 우리 사회 전반에 끼친 어떤 경험 때문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사를 또 다시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고통의 기록을 정면으로 통과하지 않고서 우리는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참사의 기억은 미래로 향하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순응하려는 우리의 고개를 붙잡아 세운다. 이 책이 2016년에 기록됐고 2024년에 새로 기록하고 있듯이, 세월호 참사는 규정을 지키지 않고, 관행을 멈추지 않고, 임무를 다하지 않은 이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만들어냈다. 우리가 이 기록과 기억에서 도망치려 할 때,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려 할 때, 한국 사회는 2014년 4월 15일 세월호가 출항했던 그 밤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참사를 불러온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의 기록과 기억을 붙들고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10쪽)

▲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재)진실의힘 펴냄). ⓒ진실의힘

이명선 기자

프레시안 이명선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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