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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이 날 고소하다니…분신이라도 해야하나"

[인혁당, 끝나지 않은 눈물 ②] 87세 강창덕 씨 이야기

박세열 기자,최형락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0-11 오후 3:10:22

 

 

강창덕. 중·고등학교 교사, 신문기자, 진보당 당원, 혁신정당 운동가. 그는 1927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다. 전라북도에서 민족종교인 보천교 관련 활동을 하던 아버지를 둔 덕에 '반골 기질'을 타고났다고 한다. 그는 군산에서 태어난 후 아버지의 고향, 경북 경산으로 돌아온다. 거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처음 감옥에 간 것은 1943년이었다. 열일곱 살 강창덕은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과 관련해 주변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다가 적발됐다. 일본 순사에게 '소자지매(소의 성기에 끈 같은 것을 채워넣어 만든 일종의 채찍)'로 무던히 맞았다고 했다.
 

인혁당, 끝나지 않은 눈물
박근혜, 인혁당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나?

 

▲ 강창덕 씨는 유신 반대 투쟁을 하다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1975년 4월 8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와 함께 연루된 8명은 사형 선고가 내려진지 18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스러졌다. 진실은 약 28년 만에 규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1년 재심에서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이 배상액의 이자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국정원으로부터 소송을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프레시안(최형락)


두 번째는 1944년이었다. '황군(일본군)' 해군에 자원입대하라는 '명령'이 나오자 "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하나. 지금 해외에서는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데"라고 생각하며 도망쳤다는 이유였다. 해방 후 갓 스무살이 된 청년 강창덕은 1947년, 분단 반대 웅변대회에서 유엔과 미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미군정에 의해 또 한번 구속됐다.

초대 제헌 국회의원이자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 출신인 이승만 반대파 서상일 선생의 비서로 있다가 '북진통일 지양하고 평화통일 지향하자'는 주장을 냈다는 이유로 또 옥고를 치렀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경산 질량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그러나 통일과 정치 혁신을 바라는 20대 젊은 교사의 피는 끓고 있었다. 진보당 대표를 지낸 죽산 조봉암 선생이 1956년 대선에 출마하자 경북 경산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내가 운동해서 이승만 표보다 곱절 많은 표가 경산에서 나온 것이 내 평생의 자랑"이라고 했다.

그는 선거 패배 후 서른살 나이로 영남일보 공채로 입사해 기자가 된다. 그러나 영남일보 사장이 자유당에 들어가자 3년만에 신문사를 그만두게 된다. 이후 대구매일신문 주필을 지냈던 몽양 최석채 선생의 추천으로 대구매일신문에 입사, 3년을 더 신문기자로 일을 했다. 신문 기자 시절은 그의 인생 최고의 황금기였다. 그는 "내가 정치부에서 반정부 기자(반이승만)로 명성이 높았다"며 웃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5.16으로 그는 또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된다. 장면 정부가 추진한 반공임시특별법(현 국가보안법과 유사)과 데모규제법(현 집시법과 유사)에 반대하는 이른바 '2대악법반대투쟁(대구 데모 사건)'에 가담했다는 이유였다. 데모는 장면 정부 때 했는데, 처벌은 박정희 정권 때 받았다. 5.16쿠데타 이후 그는 혁명재판에서 경상북도사회당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징역 7년을 받았게 된다. 쿠데타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쿠데타 이후 만들어진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특수반국가행위 위반)을 적용하는 '만행'을 박정희 정권은 스스럼없이 저질렀다. 이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은 <프레시안>이 상세히 다룬바 있다. (관련기사 : 아직도 살아 있는 '5.16 악법', 박근혜는 폐기할까?) 강창덕 씨는 이 사건과 관련해 201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 강창덕 씨를 민주화운동원로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무실에는 통일기(한반도기)와 전봉준, 김구, 여운형, 조봉암, 전태일 등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내가 국정원한테 채무자가 돼"

박정희와 그의 인연은 끝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지독했던 일에 휘말린 것이다. 1974년,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사건'이었다. 그는 유신 반대 투쟁을 하다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1975년 4월 8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와 함께 연루된 8명은 사형 선고가 내려진지 18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스러졌다. 진실은 약 28년 만에 규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1년 재심에서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주심 신영철 대법관)은 그에 대한 배상을 다룬 소송에서 35년치 이자(연 5% 적용)를 적용한 원심을 깼다. 받은 이자를 도로 내놓으라는 판결이었다. 1심을 뒤집고 대법원이 직접 판결을 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관련 기사 : 홍사덕 '유신 미화' 발언 파문, 37년 전 그는…) 국정원은 곧바로 강창덕 씨에게 소송을 걸었다. 37년만에 돌아온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짧은 '편지'였다. 사과도 아니었고, 유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장 형태로 강창덕 씨에게 날아들었다. <프레시안>은 강창덕 씨를 대구 중앙로에 있는 민주화운동원로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후배들이 선배들의 정신 계승 잘 해달라고 민주화운동원로회를 만들어서 사무실을 하내 냈어요. 배상금 받아서 내 생에 내가 하고싶은 일 한다고 하는데, 청천벽력같이(국정원이) 돈 갚으라고, 소장을 보내왔어요. 경천동지할 일 아닙니까. 이런 소식이 어디 있겠어요. 내 팔자가 와 이리 됐느냐. 한평생 반독재 민주화운동하고, 민주통일 운동을 하는데,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가해자인 국정원한테 내가 채무자가 돼 가지고 법정에서 심판을 받으라니, 이거는 몇 번째 나를 죽이는 것 아닌가. 나를 이런 굴욕적인 인간으로 만들어...한이 많지요. 보통 한이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떨 때는 국정원 마당에 가서 분신 자살을 해서 억울함을 우리 사회에 고하고 죽어야 안 낫겠나.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주심인 신영철 대법관 등의 판단은 '배상금을 너무 많이 줬으니 일부를 다시 국가에 돌려달라'는 취지였다. 여기에 국정원이 민사소송을 내고 법무부가 이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5일 법원의 결정이 나왔다. '국정원은 절반만 받고, 강창덕 씨는 절반만 갚으라'는 취지로, 그나마 화해 권고 결정을 내렸다. 법무부가 이의 제기를 하지 않으면 이 결정은 확정된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기류가 이상하다는 말들이 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법무부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

"더욱 억울한 것은 차라리 가집행을 안하고, (1심 배상 판결 이후 가집행으로 강창덕 씨는 약 65%, 12억 원을 먼저 받을 수 있었다-편집자) 그 때 돈을 안 줬으면 (대법원 판결까지 끝나고 배상금을 줬으면) 내가 국정원에 이런 빚쟁이가 안 되지. 1심 끝나고 고법에서 가집행 했는데, 대법에서 법을 1, 2심 판결을 뒤엎어버리고…. 1974년 사건 아니요. 74년부터 시작해서 법에 의해서 이자 연 5% 손실금이라고 해서 사법부에서 법대로 한 것 아닙니까. 1, 2심 판결을 대법에서 자판해가지고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30여 년간 이자를 다시 내놓으라고 하고, 법무부가 국정원이 하라고 해서 소송을 하는데, 우리는 또 국정원이라고 하면 몸이 서려하는 인간이고, 한이 많은 인간이예요. 그런데 소송을 걸어가지고, 국정원은 원고가 되고 (나는 피고가 되고) 이런 굴절된 역사가 어디 있겠습니꺼. 숨통이 터져서요, 자꾸 병이 날라고 그러고, 이렇게 살 바에야…. 국정원에서 소장이 나오는데 깜짝 놀라잖아요."

87세 강창덕 씨의 입술은 국정원에서 날아온 소장 받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바르르 떨렸다.
 

▲ 강창덕 씨는 이번 일을 겪은 후 '호소문'을 돌리기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구타, 물고문으로 조작된 사건…감옥서 나오니 모두가 나를 피하더라"

강창덕 씨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겪은 일을 설명해달라고 주문하자 그는 "내가 박정희한테 호되게 당했단 말이야. 처음에 오일육 군사혁명재판에 끌려가서 7년 받았지, 반유신운동하다가 무기징역 받고 8년을 살았지. 내 인생 개인은 박정희 때문에 이만저만 희생을 당한 게 아니"라고 했다. 강 씨는 당시 고문을 당했던 일까지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은 강 씨의 구술을 최대한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1974년에) 민청학련사건이 안 터졌나. 그 때 내가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서울에 있는데, 74년 4월 25일인가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 사건을 갖고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하는기라. 하는데, 배후 세력이 (인혁당 재건위가) 있다고 해.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불똥이 나에게 날라오겠더라. 내가 대구에서 반유신 운동한 실적이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이놈들한테 당하겠구나 했어. 서울에서 내가 여동생에게 여비 좀 돌라케가지고 부산에 도망가서, 부산서 저 전라도 보성, 광양, 백운산 밑에까지 돌아댕겼어. 그때 날 체포한다고 난리가 났었나봐. 고향을 뒤지고 난리가 났어. 한 열흘 쯤 피했는가. 5월 6일날 저 전라도 갔다가 여수, 순천 갔다가 부산에 시내에 내 동서가 양복점을 하고 있었는데, 동서한테 왔어. 도피 자금을 얻을라고. 그래 갔다가 (양복점에) 들어갔는데 남대구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꼼짝없이 붙잡혔지.
 

▲ "고문 조작이었지. 주변 사람들 전부 북의 지령을 받아가지고 했다고 발표한대로 그대로 아는 거죠. 고향에 나중에 나와보니까 날 안볼라 해. 간첩이라고. 간첩 사건인줄 알고. 전부 간첩 사건으로 홍보를 해놓았거든. 그렇게 국가 권력에 의해 피해를 봤는데, 출소는 했는데 아무데도 취직도 못하고, 일가족 행사에도 못 가요. 결혼식도 못가요. 오는 거 안 반갑게 해. " ⓒ프레시안(최형락)

남대구경찰서로 연행이 됐지. 경찰서에서 밤새도록 고문을 당했어. 때리고, 구타하고, 처음에는 손바닥 발바닥을 주로 경찰봉을 가지고 구타하더라고. 아따, 손바닥 발바닥, 그거 맞아도 못견디겄대. (종아리, 팔뚝을 매만지며) 이꺼지 시꺼멓드라고. 죽은 피가. 그래도 내가 자백을 안하니까 코구멍으로 물을 흘려서 물고문을 하더라고. 물고문을 했다가 (기절을 했는데) 가만히 깨나 보니, 내가 유신 반대한 사람이고, 유신반대 역할이 있다 아니가. 내가, (거짓 자백) 하면 몇 년 그냥 살고 안 나오겠나. 그래서 이정우 기자라고 같이 혁신운동하고, 반구데타 운동하고 지냈는데. (한숨) 이정우는 혁신계 학원 담당, 강창덕이는 정치 경제 언론 담당, 나경일은 노동운동가인데 노동운동 담당하고 공소장에 보면 그래 돼 있거든. 그래가지고 강창덕이는 신민당경북도당 부위원장 뭐를 포섭하고, 언론에 대구매일신문 기자를 포섭하고 그래가 돼 있어.

진실로쿠는(실제로 말하면) 나도 당시에 유신 반대하고, 지하신문을 발행을 할라꼬 준비를 다 했었지. 그래 가지고 내가 (고문을 당한 후에) 기왕 날 박해할라고 그러는데, 박해 당할 수밖에 없지. 이카면 까딱하면 내가 고문 받다가 죽겠다. 근데 난 안 죽어야 되겠다. 그래서 (북한과 연계됐다는 거짓 진술에) 도장 찍고 고문을 면했다. 그래서 서울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한숨) 그리고 8년 8개월이다. 무기징역을 받았는데, 중간에 20년으로 감형됐죠. 형집행정지로 82년도에 출소했다. 그래서 잔형면제를 노태우 때 받았는데, 복권 사면을 안해줬단 말이야. 꼬빡 10년을 더 기다렸잖아. 그러면 자연 복권이 되니까. 8년 8개월, 거기다 10년, 이거저거 다하니까, 40대 50대 다 갔어.

고문 조작이었지. 주변 사람들 전부 북의 지령을 받아가지고 했다고 발표한대로 그대로 아는 거죠. 고향에 나중에 나와보니까 날 안볼라 해. 간첩이라고. 간첩 사건인줄 알고. 전부 간첩 사건으로 홍보를 해놓았거든. 그렇게 국가 권력에 의해 피해를 봤는데, 출소는 했는데 아무데도 취직도 못하고, 일가족 행사에도 못 가요. 결혼식도 못가요. 오는 거 안 반갑게 해. 근데 우에 가노. 눈치 보면 알거든. 옛날 신문사 친구들도 하나도 안 만날라 그래. 그렇게 희생을 당했는데, 민주화 역사 발전 때문에 그래도 우리가 재심 무죄까지 받고 배상을 받았죠. 정상적인 판례에 의해 판결이 났는데, 검찰에서 대법까지 상고를 하는 바람에, 1심 끝나고 3분의 2 정도 가집행을 해줘서 빛도 다 갚고, 아파트 겨우 하나 샀는데, 도루묵이 됐다. 반유신행동했다가 고문 받고 조작 당하고, 개인 인생을 망쳤는데, 정말 굴욕적인 이런…. 그러니까 지금 현재 심경은 뭐라고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아주 착잡합니다. 착잡해. 하루아침에 엉망진창이 됐으니. 정말 피를 토할 일 아니십니까.

세상에 운명이라도 이런 운명의 장난이 어데 있을 수 있겠어요. 고문 조작해서 겨우 살아나가지고, 또 '엄정 독거'를 시키라고 청와대에서 지시를 내려갖고, 8년 8개월 중에 독방 생활을 약 7년 8개월을 했어. 전주형무소에서 있었는데, 나중에 출소할 때는 대구 형무소에서 일년 남짓 있다가 나왔죠. 전주형무소에서 나랑 무기수 네 사람은 독방에서 갖혀서 한 사람씩 감시를 하는데, 북에서 온 사람보다도 더 엄중 감시를 받고 살았거든요.

나는 가집행 중에서 실제 수령한 게 12억 원 정도 되는데, 6억9000만 원을 반납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6억9000만 원 반납할 돈이 어디있나. 내가 평생을 항상 신세지고 살다가 이제 그것 갚고, 어려운 사람 돕느라고 기부하고, 거의 다 소비를 했는데, 갑자기 돈을 갚으라고 하니…. 37년간 인간 관계에서 사람 구실 못하다가 빚갚고 구실하는데. 기가찰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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