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22일 오후 국회수소충전소 옆에 기후위기시계가 설치돼 있다. ⓒ 연합뉴스
그럼에도 범주를 말하는 이유는 다시 돌아가 기후 문제의 첫 단추를 정확히 끼우기 위함이다. 기후 문제가 환경에 속하지 않는 첫째 이유는 환경 문제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인간조차도 기후 문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62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살충제가 자연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다뤘다. 이 책이 쏜 서구 환경운동의 화살은 1970년대 일본, 1980년대 한국으로 이어졌으며 역시 공해 문제가 급한 화두였다.
그런데 이런 온갖 공해를 일으키고도 나는 좋은 것 챙겨 먹으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악덕업자조차 대기로부터 벗어날 순 없다. 오르는 지구의 기온은 코스타리카의 황금 두꺼비(기후위기로 멸종), 저개발국의 이주민, 선진국의 저소득층에 이어 그들에게도 반드시 찾아갈 것이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청구서는 당도한다.
둘째, 기후는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문제다. 온실가스는 페놀 같은 공해 물질이 아니다. 나와 당신도 내뿜는 이산화탄소다. 먹고, 입고, 지내는 인간의 모든 일들이 유관하다. 단지 이 모든 일이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대량의 에너지 소비와 함께 이뤄지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기후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 소비, 분배하는 경제와 나눌 수 없는 연관이 있다.
셋째, 기후는 정의와 도덕의 문제다. 지구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로 제한하겠다는 '파리 기후 협약'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과학은 예언하지 않기에 변화에 대해 여러 어려운 단서가 달려 있지만, 더 빈번한 자연재난, 해수면 상승, 수많은 생물종의 절멸 등 예견되는 재앙은 두말할 필요 없이 크다.
그리고 기후변화에 대한 연구가 쌓이면 쌓일수록 "알고 보니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었어"가 아니라 "예상 이상으로 위험하잖아"란 결과가 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불구덩이 옆의 아기와 같이 위험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점이다.
과학이 지금까지 밝혀낸 지구 온난화의 메커니즘은 단순한 공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 지구 평균 기온의 상승은 온실가스의 누적량과 비례한다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인간이 내뿜을 수 있는 온실가스의 양은 배출하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가 있다면 과학기술로 배출 가스를 다시 거둬들이는 것이지만 아직 믿을 만한 기술은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재앙'에 앞서 공동으로 쓸 수 있는 배출 총량을 절대자에게 이미 할당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나가고 힘 있는 자들이 먼저 거의 써버렸다. 한데 종말은 모두에게 떨어진다. 못 가진 이, 힘없는 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에게 이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런 일을 눈 뜨고 보고 있는 우리에게 양심이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런 의미에서 기후는 환경부, 환경 기자, ESG팀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느 누구의 문제도 아니다. 당신과 나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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