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9월 26일 라파엘 그로시(Rafael Grossi) 사무총장이 AP통신과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다. 그는 “우리가 (대화의) 문을 닫은 뒤에 해결한 것이 있습니까? 오히려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시킨 것은 아닙니까?”라며 조선의 핵 활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것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AP통신과 인터뷰하는 IAEA 사무총장 라파에 그로시.
AP통신과 인터뷰하는 IAEA 사무총장 라파에 그로시.

IAEA 수장 “북한은 핵보유국, 매우 신중하고 외교적인 준비 조치 필요”

또한 그는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대단히 우려스럽다”(extremely concerning)면서 “매우 신중하며 외교적인 준비 조치”(very careful, diplomatic preparatory moves)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로시의 발언은 조선이 핵무기 보유국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서방측 고위 인사의 첫 언급이다. 조선과의 핵 협상과 외교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국제원자력기구의 수장이 조선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한 발언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그로시의 발언은 조선이 핵무기 보유국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서방측 고위 인사의 첫 언급이다. 조선과의 핵 협상과 외교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국제원자력기구의 수장이 조선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한 발언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우리 정부의 외교부 당국자는 이 발언이 나오자 하루 뒤에 “북한 비핵화는 한반도와 전세계 평화·안정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자 국제사회의 일치된 목표”라는 입장을 낸 바 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의 ‘북 핵보유 인정’ 발언에 대한 반박에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수위이다.

같은 날 러시아 외무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 역시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과 관련해 ‘비핵화’라는 용어조차 의미를 상실하게 됐으며, 이 문제는 종결됐다”라고 하여, 그로시 총장과 유사한 발언을 했다. 우리 정부는 이 발언에 대해서는 “러시아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매우 무책임한 발언, 깊은 유감”이라고 날 선 비판을 한 바 있다.

그로시의 발언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북핵’ 입장의 변화 기류를 반영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북핵 보유 현실’에 대해 미국 내에서 일련의 변화가 감지된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정강정책에서 ‘한반도 비핵화’ 삭제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지난 7월과 8월 정강정책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비핵화’ 문구를 삭제했다. 민주당의 정강정책은 2020년에 마련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었는데, ”(북한) 비핵화라는 장기적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 ”북한의 핵 프로그램 및 역내 호전성으로 인한 위협을 제한하고 억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민주당은 새롭게 채택한 정강정책에서 해당 내용을 모두 삭제했다.

직전 정강정책에서 CVID(완전하고 검정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북한 비핵화)를 대북정책의 목표로 규정했던 공화당 역시 지난 7월 ‘북한 비핵화’에 대한 언급 자체를 하지 않은 채 새로운 정강정책을 발표했다.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이 모두 관련 내용을 언급하지 않은 배경은 확인할 수 없다. 양당이 조선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기류의 반영인지 여부 역시 아직은 불확실하다.

미국 전문가 “북한 핵보유 현실 받아들여야”

그러나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강정책의 변화가 ‘북 핵보유 현실을 인정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전직 미 국방부 부차관이었던 리처드 롤리스는 “비핵화 문구가 빠진 것은 분명 현실 반영이고, (양당) 모두가 이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라면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논평했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대해 “북한을 완전하고 명실상부한 핵 보유국으로 받아들이고 억제하는 시대”라고 덧붙였다.

 

다른 전문가들도 유사한 입장을 내놓았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마이클 오핸런 역시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우리가 현재로서는 억제를 우선시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논평했고, 전 국가정보분석관이었던 마커스 갈로스카스 역시 “미국이 최근 들어 북한의 비핵화 협상보다는 북한 억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적절한 조치”라고 말했다.

바이든 정부의 비핵화 정책은 불변, 트럼프 역시 “북 비핵화 목표”

그러나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다. 미 국무부는 8월 31일 “대북 정책의 초점이 ‘비핵화’에서 ‘억제’로 전환되고 있는 것 아니냐”라는 질문에 “미국과 한국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계속 추구하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지난 3월 바이든 정부의 관리들이 조선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중간 단계’(interim steps)를 설정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 역시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잠정적 조치’로서 언급되었을 뿐이다. 조선의 핵무기를 “폐기시켜야 한다”는 비핵화 정책에서 이탈한 것은 아니었다.

트럼프 캠프의 안보 참모 역시 “북한 비핵화”를 강조한다. 9월 30일(현지시간) 미국에서 개최된 한 심포지엄에서 트럼프 외교 참모로 알려진 로버트 오브라이언(1기 트럼프 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 역임)은 그로시의 ‘북 핵보유 발언’을 언급하며 “우리가 그 길로 가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인데, 나는 우리가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우리는 계속해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조선의 핵보유국 인정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으나 이 발언이 곧 '핵군축 협상' 등 조선과의 새로운 협상을 시사하는 발언은 아니다.
트럼프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조선의 핵보유국 인정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으나 이 발언이 곧 '핵군축 협상' 등 조선과의 새로운 협상을 시사하는 발언은 아니다.

이는 트럼프가 지난 7월 공화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핵무기를 가진 누군가와 잘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라면서 조선의 핵보유 인정을 시사하는 발언과 어긋난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조미 협상 국면이 재개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북 핵보유국 인정’이 조미 협상 국면 의미하지 않아

비록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강정책에서 ‘한반도 비핵화’ 문구를 삭제하는 등 일정한 변화를 보이긴 하지만 조선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는 ‘정책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는 단서를 포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로시의 발언 역시 조선의 핵무기에 대한 미국의 입장과 정책의 변화를 암시하는 신호탄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지 않다.

다만, 그로시의 발언은 조선의 핵무기 증강에 대한 미국과 서방의 정책 난맥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발언인 것은 분명하다. 미국과 서방은 조선과의 핵무기 협상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조미 핵대결 국면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조선의 핵무기 보유고와 동시타격 능력은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미국의 핵무기 정책 역시 더욱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협상이 사라진 공간에 군사 대결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미국 정가의 ‘조선 핵보유국 인정’이 ‘핵군축 협상’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창출하는 신호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자칫 미국은 자신의 대조선 핵무기 공격을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변화를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4년 들어와 바이든은 ‘핵운용 계획’을 비밀리에 변경했고, 한미 사이에도 핵억제 지침을 합의하기도 했다. 한미일 역시 올해 ‘한미일 안보협력 프레임워크 협력각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미국은 ’중간 단계‘를 설정할 수 있다면서도, 한국과 일본을 동원해 조선에 대한 핵대결적 적대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