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남북한이 ‘사실상’ 두 개의 국가라는 인식은 남북한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보편적이었다. 갑자기 문제가 된 계기는 2023년 말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했던 “남북관계가 적대적(교전 중)인 두 국가 관계로 고착되었다”는 발언이었다. 그는 또한 “유사시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하여 준비해야 한다”고도 함으로써 무력통일론을 불러일으켰다.
근본적으로 새로울 것 없는 ‘두 국가론’에 대하여 최근 다시 논쟁이 일어났다. 지난 9월19일 광주에서 열린 9·19 평양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임종석이 “통일하지 말고 남북이 평화적이고 민족적인 두 국가로 서로 존중하고 도우면서 행복하게 살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통일 포기론’의 근거로 북한 대남 노선의 변화, 윤석열 정부의 호전적 대북정책과 전쟁 위험성, 그리고 남한 내부(특히 젊은 세대)의 통일에 대한 거부감 등의 현실을 들이대었다.
‘두 국가론’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통일 논의를 완전히 봉인하고 30년 후에나 잘 있는지 열어보자”는 ‘통일 포기론’은 정서적, 논리적, 정책적으로 설득력이 약하다. 당장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보수 쪽은 헌법의 자유민주주의 통일 조항을 위배했다고 비난하고 진보 쪽은 통일이라는 지고한 가치를 포기하는 반민족적 발상이라고 공격한다.
‘방 안의 코끼리’, 미국
통일에 대한 논의에서 흔히 간과되는 요소가 미국이라는 존재다. 끝까지 읽으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한 임종석의 연설문 어디에도 미국에 대한 언급이 없다. 주류 언론매체의 논쟁에서도 그렇고,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개최된 토론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진보적인 인터넷 매체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주류 언론과 정당, 정부와 국회는 약속이나 한 듯이 ‘미국 문제’에 대하여 침묵해왔다. 그러나 통일이든 평화든 안보든 ‘방 안의 코끼리’ 격인 미국 없이 어떤 실질적인 논의가 가능할까. 다 보고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고 있고 말하지 않기로 말없이 약속한 것은 아닌가.
조금만 솔직해 보자. 북한의 무력통일론은 ‘유사시’ 남한을 무력으로 평정하겠다는 것이고, 남한의 그것은 ‘북한이 남침하면’ 무력으로 통일하겠다는 것이다. 즉, 남북한만 놓고 보자면 북한이 먼저 남침하지 않으면 남한은 무력통일을 할 수 없고, 북한에는 남한이 먼저 북침하지 않으면 ‘유사시’가 생길 수 없다. 더욱이 작전통제권도 없는 남한은 미국이 ‘허락’하기 전에는 북침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이 들어오면 그림이 달라진다. 북한은 미국과의 무력 분쟁으로 ‘유사시’를 맞이할 수 있고, 남한은 그때 미국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무력통일을 시도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통일은 민족 공멸과 같은 뜻이라는 것이다.
평화통일론 역시 미국이 빠지면 현실성을 잃는다. 김영삼 정부 이래 유지되어온 남한의 공식적인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화해협력-남북연합-통일국가’의 3단계론이다. 그 첫 두 단계에서 남과 북은 각각 ‘국가성’을 유지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본격적인 화해협력 단계로 들어서는가 했지만, 문재인 정부까지 진퇴를 거듭하다 현재는 다시 ‘냉전시대’로 복귀한 상태다. 그 30년 가까운 굴곡진 역사에서 미국을 빼고 무엇을 논할 수 있을까.
남북한의 자주적 화해협력이 미국의 이익과 배치된다는 사실은 일반 상식이 된 지 오래다. 그와 함께 한국은 정치·군사·경제적으로 미국에 예속되어 있으며 자주에 대한 열망과 의지도 거의 잃어가고 있다는 자괴감이 널리 퍼져 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자부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정리한 적이 있다. “그들(한국)은 우리의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못한)다.”(They do nothing without our approval.) 이 발언은 남북관계가 봄날과 같았던 2018년 10월10일 당시 강경화 외교장관이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취해진 ‘5·24 대북제재 조치’의 해제를 관계 부처들과 검토하고 있다는 국회 발언에 대한 확실한 견제구였다. 그해 11월20일 비핵화와 남북협력, 대북제재 문제 등을 수시로 조율하기 위한 ‘한-미 워킹(working)그룹’이 출범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미 체킹(checking)그룹’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그 뒤는 오욕의 역사다.
북-미 회담 파탄 뒤 멈춰버린 시계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