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례 국지전 도발 시도
윤석열이 계엄선포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던 국지전 도발과 내란 공작은 군대를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다. 군사작전통제권을 가진 주한미군의 승인 없이 계엄선포가 불가능한 이유다.
처음 윤석열은 대북 전단을 이용해 교전을 유도했다. 지난 2023년 11월 윤석열은 군사분계선(MDL) 일대에 기구·무인기 등의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9·19 남북군사합의 1조3항을 콕 집어 효력을 정지시켰다.
총선을 앞둔 지난해 3월 대북 전단이 집중 살포됐다. 북은 대북 전단을 원점 타격할 대신 대남 오물 풍선으로 응수했다. 덕분에 윤석열의 교전 기도는 좌절됐다.
윤석열의 2차 교전 시도는 7년 만에 재개한 휴전선 부근 포사격 훈련이다. 지난해 7월 육군은 군사분계선 5km 이내 사격장에서 K-9 자주포 6문과 차륜형 자주포 6문을 동원해 실탄 140여 발을 발사했다. 이 지역은 주한미군의 방조가 필수다.
윤석열은 9.19 남북 군사합의 전면 효력 정지에 따른 훈련 정상화 조치라고 했지만, 북의 대응 사격 유도가 주된 목적이라고 봐야 한다.
당시 김여정 부부장은 포사격 훈련을 "자살적인 객기"라고 비난하면서 윤석열이 국내 정치 상황 때문에 전쟁위기를 키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윤석열의 교전 기도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참고로 2010년 ‘연평도 포격전’ 때는 국군이 80여 발의 대포병 사격에 대해 조선인민군은 170여 발의 포로 응수한 바 있다.
윤석열의 3차 시도는 무인기 평양 침투를 통한 국지전 유발이었다. 지난 10월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 지시로 평양에 무인정찰기를 침투시켰다.
당시 김여정 부부장은 ‘한국군부의 3차례 무인기 침투’ 사실을 폭로하면서 “다시 발견되는 그 순간 끔찍한 참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고도의 인내력을 발휘한 것이다.
김용현이 무인기 평양 침투를 주한미군과 사전 협의했음은 자명하다. 김여정 부부장도 “핵보유국의 주권이 미국놈들이 길들인 잡종개들에 의하여 침해당하였다면 똥개들을 길러낸 주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미국에 경고했다.
4차 시도는 대남 오물 풍선에 대한 원점 타격 지시다. 계엄선포 1주 전 김용현 당시 국방장관이 김명수 합참 의장에게 ‘북에서 오물 풍선이 날아오면 경고 사격 후 원점을 타격하라’고 지시했다.
원점 타격은 오물 풍선을 띄우는 황해도 지역을 국군이 공격하는 것이어서, 국지전 도발을 위한 선제공격을 의미한다. 다행히 핵보유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한 한미연합사가 이를 허용하지 않아 미수에 그쳤다.
계엄선포 사후 명분 쌓기 공작
국지전 유발이 번번히 실패하자 인내력을 상실한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먼저 선포하고, 사후에 내란 공작을 꾸며 계엄 요건을 충족하려고 했다.
12.3계엄 당시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북파공작원 특수부대 HID 요원들이 ‘체포되어 이송되는 한동훈을 사살한 후 북한군 소행으로 위장’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동훈 전 대표가 계엄선포 당일 “체포되면 사살되니 피하라”는 전화를 받고 국회 본회의장으로 몸을 피해 미수에 그쳤다.
아울러 체포되어 호송되는 이재명‧조국·김어준 등을 구출하는 시늉을 하다가 도주하고, 특정 장소에 북한군복을 매립해두었다가 일정 시점 후에 발견해 북한 소행으로 발표한다는 작전까지 세웠다. 실제 정보사가 비상계엄 3주 전에 북한군 군복 300벌을 구매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치인, 종교인, 판사 등 ‘수거 대상’ 16명을 체포해 납북으로 위장한 뒤, 백령도 인근에서 그 배를 폭파한다는 내용이다.
계엄 준비 과정에 작성된 이런 계획을 미국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국회에서 계엄이 해제되면서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미국은 뒤늦게 이런 사실을 김어준 뉴스공장 공장장 등을 통해 공개했다.
전략적 인내와 전쟁 억제력
윤석열의 국지전 도발에 북이 한 번이라도 말려들었다면 지금 세상은 어떻게 됐을까? 만약 3월 대북 전단에 원점 타격을 가했다면, 7월 포사격에 대응 사격을 가했다면, 10월 무인기를 휴전선 일대에서 박살냈다면, 상상만 해도 끔직하다.
북이 12.3내란사태 과정에 보여준 전략적 인내는 한반도 전쟁을 억제하고, 내란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 힘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북이 남침 의사가 없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지금까지 발표된 모든 남북공동선언에는 평화통일 노선과 적대행위 금지가 적시돼 있다. 7.4남북공동선언, 6.15공동선언, 10.4선언, 4.27판문점선언, 9.19평양선언 등.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모든 선언은 파기되고 말았다.
어느 쪽, 누가 약속을 어겼나?
누가 평화통일 주장을 탄압하고 선제공격 운운하며 전쟁연습을 강화했나. 어느 쪽이 상대를 반국가세력이라 적대하고 민족연대를 범죄시했나.
한미동맹은 반공‧전쟁동맹
계엄선포 과정에 드러난 한미동맹의 본질은 전쟁동맹이자 반공동맹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비단 12.3계엄에 국한되지 않는다.
1948년 제주도를 레드아일랜드(빨갱이섬)로 규정하고 계엄을 선포해 도민 3만명을 학살할 때도, 1950년 예비검속을 이유로 보도연맹 가입자 120만명을 학살할 때도,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4.19혁명을 뒤집을 때도, 1972년 유신 계엄 반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민청학련 사건을 일으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40명을 긴급체포할 때도, 전두환이 5.17계엄선포로 광주시민 2800여명을 향해 총을 난사할 때도 모두 미국의 지시와 승인이 있었고, 그때마다 한미는 늘 반공동맹, 전쟁동맹을 강화했다.
전쟁동맹은 필연적으로 반공동맹을 부른다. 전쟁을 일으키려면 먼저 적대국을 선정하고, 필요에 따라 도발을 유도해 선제공격 명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80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연공‧연북을 주장하면 빨갱이‧종북세력으로 매도됐다. 독재정권은 민중의 저항에 부닥칠 때마다 내란세력을 등장시켜 반국가세력 척결에 나섰다. 난데없이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그때마다 대북 적대와 한미동맹이 강조돼왔다.
요컨대 12.3계엄사태를 계기로 한미동맹의 실체가 드러났다. 반공을 앞세워 독재정권을 유지해 왔다. 북은 남침 의사가 없음이 분명해졌다. 때문에 '한미동맹과 민족동맹', '반공과 연공'에 대한 새로운 설정이 필요해졌다.
데스크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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