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퇴임 이후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이 많다"고 한 그는 "지금은 마이크조차 서울에 집중이 돼 있다. 김장하 선생도 지방에 계신 데 전국적인 영향이 있다. 그래서 저는 서울 중심의 사고를 빨리 깨야 한다고 본다. 인터뷰한다면 지역에 마이크를 드리겠다"라고 말했다.
"제가 왜 법률가가 되었느냐, 왜 판사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제까지 안 밝혔는데, 사실 사법연수원 다닐 때 인권변호사를 하려고 했었다. 근데 군대 3년을 가서 보니 사회도 좀 바뀌었고, 노태우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로 바뀌었다. 그런데 인권변호사를 하면 너무 힘들 것 같더라. 자신이 없었다. 제 생각에 자기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했을 때 그 끝이 안 좋다는 생각을 지금도 갖고 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 최선이 무엇인가, 그래서 제가 생각했던 게 지역법관(향판)이었다. 부산에 머물면서 그냥 제 뜻대로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창원지법에 있으면서 법을 위반한 몇몇 시장·군수를 집어넣으니까 이례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온 것 같다."
문 전 대행은 "김장하 선생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지방에서 문화, 정치, 행정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전부 서울로 가는 게 못마땅하다. 퇴임하고 나서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수도권 중심주의가 아닌 지역이 동시에 발전하는 사회를 바랐다.
"제가 재판관을 하려고 했을 때 부산경남 판사 경력만 갖고 재판관이 되려고 하느냐는 말이 있었다. 지방에서 큰 사건도 안 한 사람이 대통령과 같은 편이라 해서 왔는데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저는 제대로 했다. 저는 (윤석열 파면 선고) 8대0으로 만들었다. 시간은 좀 늦었지만 어쨌든 8대0을 만드는데 조금의 기여를 했다.
지역이라는 게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다만 자기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는 것이고, 진보와 보수 갈등보다는 덜하겠지만 지금 이 사회에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지역 소외다. 서울 사람이나 진주사람이나 다 소중한 사람들인데, 진주라고 해서 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지 않으냐."
그는 헌재에서 파면 선고를 앞두고 평의가 길었던 것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평의 시간이 길었다. 길다 보니까 고칠 시간이 많았다. 재판관 8명이 다 고쳤다. 보통은 주심만 고치고 나머지는 조언만 하는데, 이번에는 다 고치다 보니까 조금 더 다듬어진 문장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 감수는 주심이 했다. 평의가 좀 오래 걸렸고, 오래 걸린 것은 말 그대로 만장일치를 만들어보려고 했다.
모든 관점에서 다 한번 검토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저는 8대0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8대0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재판관들끼리 이견이 있는 상태에서 국민을 설득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고, 사안 자체가 그렇게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파면 이후 후유증이 적었다고 본다."
그러면서 문 전 대행은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을 기다려 줘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사건을 보자마자 결론이 서 있는 사람도 있지만 모든 걸 다 검토해야 결론을 내는 사람도 있다. 그 경우에는 당연히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을 기다려야지 느린 사람이 빠른 사람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느냐"라며 "빠른 사람, 급한 사람이 인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인내를 가졌고, 그런 게 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라고 떠올렸다
삶터를 부산으로 옮긴 문 전 대행은 이제 가끔씩 서울을 오가며 지역 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부산에 있는 대학에 석좌교수 자리를 알아봤는데 빈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알아보고 있다"라며 "된다면 부산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 번 서울에 가서 일을 볼 것 같다"라고 최근 상황을 알렸다.
그는 소신도 분명히 했다. "영리 목적의 변호사를 하지 않을 것이냐"는 질문에 문 전 대행은 "말을 했으니 지켜야죠"라고 대답했다. 그런 그에게 김 선생에 대한 말을 다시 던졌다. 그러자 "김장하 선생과 함께하려면, 착한 일 한 가지 이상하면 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면 된다고 본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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