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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30명씩 죽어나가던 현장... "바꿔보고 싶었다"

용진이 입사한 1995년 무렵 24시간 맞교대를 하던 철도 현장에선 매년 30명 넘는 노동자들이 사망사고를 당했다. ⓒ 정용진 제공

철도노동자가 될 운명이었을까. 정용진(57)씨의 고향은 섬진강변을 따라 기차가 지나가는 마을이었다. 전라남도 승주군 황전면 비촌리. 지금은 순천시에 편입돼 있다. 비촌리를 지나는 역이 있으니 구례구역이다. 구례로 통하는 입구라는 역 이름대로, 비촌 마을 사람들은 다리만 하나 건너면 되는 구례군을 생활권 삼아 살았다.

그곳에 오래도록 터 잡고 산 집에서 용진이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안 외양간 옆 작은방은 그의 아버지가 태어난 방이기도 했다. 그토록 오래 뿌리내려 살던 터전이었지만 용진의 가족은 용진이 세 살 무렵 서울로 이주했다. 삼형제 중 막내였던 용진의 아버지에겐 계단식 논조차도 돌아오는 몫이 별로 없었던 탓. 55년 전이었음에도 서울로 올라온 시기를 정확히 기억한다.

"우리가 원래는 마포에 있는 와우아파트로 들어가려고 했거든요."

와우시민아파트는 무허가 판잣집들을 헐고 만든 시민아파트 중 하나였다. 시민아파트의 입주 대상은 주로 용진의 가족처럼 농촌을 떠나온 가난한 사람들. 게다가 무허가 판자촌들은 대부분 산 가장자리에 있었다. 아파트를 짓기도 힘들고 지으려면 큰 비용이 드는 땅들, 그런 곳에 턱없이 낮은 단가의 예산을 중간 업자와 공무원들이 떼먹기까지 한 날림 건축물들이 들어선 것이다. 와우시민아파트는 1969년 12월 26일 완공됐지만 불과 4개월도 안 돼 1970년 4월 8일 붕괴하고 만다. 70여 명이 매몰 당했고 34명이 사망한 '부실공화국'의 상징과도 같은 사고였다.

서울이 낯설던 용진의 가족도 친척에게서 이 아파트를 소개받았다. 하지만 돈이 부족했다. 얼마 후 붕괴 사고가 일어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용진 가족이 터를 잡은 곳도 산 밑이었다. 용산의 남산 자락에 셋방을 구했다.

용진의 가족은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를 피해 자리잡은 터전은 남산 밑이었다. ⓒ 정용진 제공

그곳에서 용진의 아버지는 청소일을 하고, 어머니는 남대문시장에서 행상을 했다. '다라이'(대야)를 가지고 가서 과일을 떼어 오면 과일 장사, 생선을 떼어 오면 생선 장사, 채소를 떼어 오면 채소 장사를 했다. 일을 하느라 어머니는 바빴다. 구청 상용직인 아버지도 저녁에 나가 새벽까지 일을 했다. 세 동생을 챙기는 건 온전히 용진의 몫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동생들하고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었어요. 어려서부터 밥 하고 라면 끓이고 연탄 갈고. 동생들을 건사하는 게 내 일이었죠."

새 학년이 겁났던 아이

부모님은 장남인 용진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세 명의 동생들에게도 "맏이가 부모다. 용진이 말에는 무조건 순종하라"고 이르곤 했다. 또, 용진에게는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라"는 말로써 맏이가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을 종종 드러내셨다. 문제는 용진이 학교와 친하지 않았다는 것.

"새 학년 되는 게 정말 싫었어요. 새로운 반에 적응해서 새 친구들 사귀는 게 힘들어서요. 학교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죠. 누가 나를 못 살게 구는 것도 아닌데 학교라는 곳이 편하지가 않았어요."

용진은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다. 한 반에 60명이 넘는 학생 중 작고 왜소한, 그렇다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아닌 학생이었다. 거기에 급식 시범학교에서 급식을 안 먹었다. 전교에 몇 명 없었지만 급식비를 낼 형편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면 집에 다녀오든지 수돗가에서 수돗물을 마셨다. '선생님이 나를 알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기도 했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감정이 되게 간절했던 것 같아요. 나라는 사람도 있다는 존재감을 느끼고 싶었던 거죠. 간혹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가 있어요. 그때는 그 하루가 너무 좋아. 행복하고 편안한 날이었죠.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급식 대신 수돗가에서 수돗물을 마셨던 용진에게 학교는 결코 편한 장소가 아니었다. ⓒ 정용진 제공

하지만 용진이 학교에서 행복하고 편안한 날은 많지 않았다. 그만큼 공부에 뜻을 두기도 힘들었다. 수학만 좋아하고 다른 과목들엔 큰 흥미가 없었다. 상고나 공고를 갈까도 고민했다. 꿈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과학자, 대통령'을 꿈꾸던 초등학교 시절 그는 장래희망에 '회사원'을 적곤 했다.

"집이 어려우니까 내가 돈을 벌어서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회사원을 꿈꿨죠."

빨리 취직할 수 있는 고등학교를 희망했다. 하지만 대학에 가길 바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1984년 집 근처 용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여전히 공부보다는 노는 게 좋았다.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 예닐곱과 잘 어울렸다.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면 사당동까지 나가 극장에 갔다. 야한 영화와 액션물을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시험을 잘 봤든, 못 봤든 우르르 몰려갔죠. 한번은 영화를 보고 있는데 중간에 한 남성이 영화관 안으로 들어왔어요. 근처 고등학교 선도부 선생님이 애들 잡으러 왔던 거예요. 우리는 몰래 빠져 나와 다른 영화관으로 갔었죠."

대공 수사기관이던 남영동 대공분실 건너편에 있던 청소년센터도 그의 학창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청소년센터에 고등학생 독서토론 동아리가 있었다. 남고 두 곳과 여고 두 곳의 학생들 십여 명이 모였다. "여기 오면 여학생들 있어." 어떤 홍보문구보다 강력했던 친구의 추천에 흔쾌히 참여했다. 책 읽고 토론 하고, 장애인 시설로 봉사활동도 갔다. 숫기도 없고 새로운 사람 사귀는 일에 서툰 용진으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내는 행동이었다. 살 떨리는 일이었지만 도전하면서 사람 만나는 일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비리재단을 몰아내고

군대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계기가 됐다. 훈련하고 남는 시간이면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을까?' 새 학기만 되면 긴장하고, 마음에 드는 여학생한테도 말 한 마디 못 건네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바뀌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뭐든지 적극적으로 하려고 나섰다.

일병 시절, 사단 태권도대회에 나갈 선수를 뽑았다. 입대해서 처음 배운 태권도 단증을 딴 지 얼마 안 됐지만 용진이 자원했다. 또, 겨울에 스케이트대회를 연다고 했을 때도 롤러스케이트를 몇 번 타본 경험만 믿고 손을 들었다. 둘 다 일과 후에 따로 연습을 해야 했음에도 귀찮지가 않았다. 스스로를 바꿔보겠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런 그를 나댄다고 못마땅해 하는 선임들이 있었다.

"한 명한테 많이 당했어요. 어느 날은 느닷없이 내무반 화목난로 주변에 있던 방화사를 다듬던 오각형 나무 판으로 엄지와 검지 사이를 툭툭 때리더라고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듯이 30분 동안 때리니까 팔이 부어서 못 움직이겠더라고요."

훈련에 적응해 군대가 좋아지던 참이었다. 직업군인까지 고민했지만 이런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에 단념했다. 제대가 가까워지자 먹고사는 일이 걱정됐다. 재수 때까지도 입시공부에 전념을 다하지 않았던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

"대학을 바라보는 상이 달라졌죠. 인맥도 없으니 대학이라도 가야겠다. 가서 직업에 대한 시야를 넓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991년 9월 제대해 두 달 반 동안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취업을 목표로 했기에 전문대를 택했다. 인천전문대 기계과에 합격했다. 그런데 인천전문대 재단은 인천대를 비롯해 전체 15개 학교를 거느린, 비리재단으로 유명한 선인학원이었다.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이어온 '재단 정상화' 투쟁이 용진이 입학할 무렵 크게 타올랐다. 1992년 신입생이 된 용진도 자연스럽게 풍물패,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비리재단을 바꿔내는데 동참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투쟁에 나섰다. 이 투쟁에 인천시민들도 적극 호응해 마침내 1993년 12월, 선인학원의 해산을 이뤄냈고 다음해 3월 산하 학교들의 시·공립화를 이끌어냈다.

"일머리보다 필요한 건 좋은 관계"

뜻을 모은 사람들의 힘으로 곪고 곪았던 학교가 바뀌는 걸 본 용진은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사회에 진출해도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꿈을. 명절에 고향마을에 갈 때마다 타던 기차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공장에 다니다가 공부를 시작했다.

"1994년엔 신입을 안 뽑고 1995년엔 공고가 났어요. 친구들하고 준비를 했죠.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열심히 공부한 기간이었어요."

절실함이 통했다. 입사시험에 합격했고 철도청 직원이 되었다. 당시엔 공무원 신분이었음에도 그리 인기 있는 직장은 아니었다. 월급도 박한데 24시간 맞교대였다. 아침 9시에 출근해 24시간을 꼬박 일하고 다음날 아침 9시에 퇴근, 다시 그 다음날 아침 9시에 출근하는 근무형태였다. 사실상 휴일이 없었다. 매년 철도 현장에서 30여 명 이상이 직무상 사망사고를 당하는 데는 몸에 무리가 가는 24시간 맞교대의 영향이 컸다. 일하기 쉽지 않은 직장이었다.

용진은 차량 직종으로 발령을 받았다. 디젤전기기관차를 일상적으로 검사하고 고장 난 부분을 고치는 일로 150여 명이 두 조로 나뉘어 일했다. 시험 준비를 많이 했지만 직접 부딪힌 현장은 참고서 속과 달랐다. 우선 규모에 압도됐다. 역에 도착한 뒤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직장인 차량사업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객차(승객을 태우는 차량) 한 량만 해도 20미터가 넘으니 객차와 디젤전기기관차들을 손보는 곳도 엄청 넓었다. 낯선 곳에 적응해 갔다. 어렵지 않았다. 일은 모르면 배우면 되니까. 배우려면 필요한 덕목이 있었다. 일머리와 좋은 관계.

"선배들이 하는 걸 보면서 익히는 일머리가 필요해요. 근데 그보다 중요한 건 좋은 관계를 맺는 거죠. 관계가 좋지 않으면 선배들이 '따라와서 봐'라고도 안 하니깐."

20대 후반으로 열정이 가득할 때였다. 가족들보다도 오랫동안 함께 있는 동료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군대에서부터 갈고 닦은 적극성을 발휘했다. 점심 빨리 먹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무리와 어울리고, 산악회를 만들어서 지리산, 설악산 등 이름난 산들도 많이 다녔다. 여럿이 함께 일하는 것도 좋았다.

"가정엔 에어컨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검수대기실에 전자레인지보다 조금 큰 네모난 에어컨이 하나 있었어요. 여름에 일하고 검수대기실에 들어오면 엄청 시원해. 일하고 와서 사람들하고 에어컨 앞에 있는 게 참 좋았어요."

3중 간선제이던 철도노조를 바꿔내는 일부터 철도의 민영화를 저지하는 투쟁까지 철도노동자들은 오랜 싸움을 해왔다. ⓒ 정용진 제공

철도노조 민주화 한복판에 뛰어들어

사람들은 좋았지만 현장은 바꿔야 할 게 많았다. 디젤전기기관차 밑으로 들어가 바퀴도 보고 좁은 공간에서 기계부품들을 점검해서 교환하고 조이는 게 일상이었다. 장갑과 작업복엔 늘 기름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런데 한 달에 15일 일하는데 지급되는 목장갑은 열 켤레도 안 됐다. 기름때 묻은 장갑들을 빨아 써야 했다. 작업복도 1년에 한 벌만 나왔다. 신입들은 선임들 옷을 물려 입곤 했다. 또, 일상 통제도 강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아침 점호를 하고, 저녁 밥 먹고 또 저녁 점호를 했어요. 다 아는 얼굴들인데 30여 명 이름을 일일이 부르고 '네'라고 대답을 해야 해. 사람들이 다 불만이었죠. 결혼도 하고 애도 있는 어른들인데 왜 그걸 다 호명하고 있느냐고요."

그런 권위적인 관리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용진은 "철도를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24시간 맞교대를 철폐하고 싶었다.

"24시간 맞교대에선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 결혼하고서 아내는 다이어리에 내가 들어오는 날을 표시해뒀어요. 내가 안 들어오는 날은 '애를 누가 보니, 뭘 사러 가니 마니' 이런 걸 논하고 싶어도 할 수 없잖아요."

당시에는 명절에도 쉬지 못했다. 명절 대수송기간은 열차가 더 많이 투입되고 안전문제도 더 신경 써야 해서 비상이 걸리는 시기였기 때문에. 꼭 그 기간뿐 아니라 휴가나 병가를 쓸 때면 사유를 써야만 했다. 눈치가 보여 연월차휴가도 제대로 못 썼다.

전국철도노동조합이 있었지만 한국노총 소속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영향으로 많은 노동조합이 민주화되고 있는데도 철도노조는 달랐다. 여전히 정부와 철도청의 입장을 대변하는 어용노조의 성격이 짙었다. 위원장 선거도 중앙대의원들이 뽑는 3선 간선제여서 조합원들의 의견은 무시되는 구조였다.

이런 비민주적인 노조를 바꾸기 위한 움직임이 조금씩 일어났다. 1988년 기관사들이 먼저 '주1일 휴무 보장'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 용진이 입사한 1995년엔 철도노조 민주화 추진위원회(노민추)도 결성됐다. 노조 민주화운동 한복판이었다는 이야기. 바꾸고 싶은 게 많았던 용진도 자연스럽게 노민추 활동을 시작했다.

첫 데이트가 아직 생생하지만 위기를 겪기도

한참 동료들을 묶어내 철도노조 민주화를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던 중에 용진은 결혼을 한다. 과학교사이던 김상미씨는 한 교육에서 지나치듯 봤음에도 눈에 띄는 여성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발랄해 보이는 그에게 계속 관심이 갔다. 용기를 내어 마음을 표현했다. 19997년 5월, 첫 데이트를 아직도 기억한다. 신촌에서 함께 영화를 봤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색 바지를 입었던 상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김상미를 만나서 연애를 한 것'은 용진의 인생에서 자랑스러운 일 중 하나다. "나도 연애를 할 수 있구나"를 일러준 고마운 사람이기에.

"그 전엔 연애가 너무 어려웠어요.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힘든데 이성관계는 더 하죠. 고등학교 때도 좋아했던 여학생한테 말 한 마디 못 했으니까. 그런 내가 아내를 서른 살에 만나 연애를 한 거예요."

첫 데이트로부터 10개월 뒤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첫 발령을 받은 지 3년이 안 됐던 김상미는 나중에 "담임을 맡은 신규 교사가 새학기 초에 결혼하는 경우는 없다. 내가 미쳤던 것"이라며 당시를 돌아봤다. 그만큼 서로에게 빠졌던 두 사람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그해 말에 딸이 태어났다. 3년 후 아들도 태어났다. 그 어느 때보다 아빠가 육아에 힘을 쏟아야 할 시기였지만 용진은 현장일로 바빴다. 살고 있는 인천에서 일터인 서울 은평구 수색동까지 왕복 4시간 가까이 걸렸다. 게다가 24시간 맞교대이니 이틀에 한번 집에 갈 수 있던 것. 그나마도 퇴근 후 철도 민주화를 위해 동료들을 만나느라 못 가기도 하고 가는 날도 잠깐 머무는 수준이었다.

"아내도 전교조 활동도 하고 바쁠 때인데 결혼하자마자 아이가 태어난 거잖아요. 아이 때문에 아무 것도 못 하는 것 같아 무기력하고 우울했대요."

집에 가면 살림을 챙기기도 했지만 아내가 필요로 하는 시간과 애정에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둘째가 태어나고는 다툼이 반복되다가 서로의 입에서 '이혼'이란 단어가 나오기까지 했다.

"아내가 힘든 걸 모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문제는 내가 너무 피곤했던 거죠. 애들 보라고 하면 애하고 같이 자고 있는 거지. 애 엄마는 잠깐 보면서 그러고 있다고 화내고. 많이 싸웠죠. 나는 사랑해서 결혼했으니 결혼하면 안 싸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싸우게 되니까 나도 힘들었죠."

"내가 안 보이면 그날 집을 떠난 거"라고까지 말했던 김상미에겐 힘이 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이 용진의 빈자리를 많이 채워줘 다행히 파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이어지는 기사] "해고 각오한 파업, 돌아오는데 15년 걸릴 줄은 몰랐다" https://omn.kr/2ergb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WORKER ZINE: 일과봄에도 실립니다.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온 이들이 땀으로 엮어온 인생을 풀어냅니다.

#땀의열전#노동자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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