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용진이 학교에서 행복하고 편안한 날은 많지 않았다. 그만큼 공부에 뜻을 두기도 힘들었다. 수학만 좋아하고 다른 과목들엔 큰 흥미가 없었다. 상고나 공고를 갈까도 고민했다. 꿈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과학자, 대통령'을 꿈꾸던 초등학교 시절 그는 장래희망에 '회사원'을 적곤 했다.
"집이 어려우니까 내가 돈을 벌어서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회사원을 꿈꿨죠."
빨리 취직할 수 있는 고등학교를 희망했다. 하지만 대학에 가길 바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1984년 집 근처 용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여전히 공부보다는 노는 게 좋았다.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 예닐곱과 잘 어울렸다.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면 사당동까지 나가 극장에 갔다. 야한 영화와 액션물을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시험을 잘 봤든, 못 봤든 우르르 몰려갔죠. 한번은 영화를 보고 있는데 중간에 한 남성이 영화관 안으로 들어왔어요. 근처 고등학교 선도부 선생님이 애들 잡으러 왔던 거예요. 우리는 몰래 빠져 나와 다른 영화관으로 갔었죠."
대공 수사기관이던 남영동 대공분실 건너편에 있던 청소년센터도 그의 학창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청소년센터에 고등학생 독서토론 동아리가 있었다. 남고 두 곳과 여고 두 곳의 학생들 십여 명이 모였다. "여기 오면 여학생들 있어." 어떤 홍보문구보다 강력했던 친구의 추천에 흔쾌히 참여했다. 책 읽고 토론 하고, 장애인 시설로 봉사활동도 갔다. 숫기도 없고 새로운 사람 사귀는 일에 서툰 용진으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내는 행동이었다. 살 떨리는 일이었지만 도전하면서 사람 만나는 일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비리재단을 몰아내고
군대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계기가 됐다. 훈련하고 남는 시간이면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을까?' 새 학기만 되면 긴장하고, 마음에 드는 여학생한테도 말 한 마디 못 건네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바뀌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뭐든지 적극적으로 하려고 나섰다.
일병 시절, 사단 태권도대회에 나갈 선수를 뽑았다. 입대해서 처음 배운 태권도 단증을 딴 지 얼마 안 됐지만 용진이 자원했다. 또, 겨울에 스케이트대회를 연다고 했을 때도 롤러스케이트를 몇 번 타본 경험만 믿고 손을 들었다. 둘 다 일과 후에 따로 연습을 해야 했음에도 귀찮지가 않았다. 스스로를 바꿔보겠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런 그를 나댄다고 못마땅해 하는 선임들이 있었다.
"한 명한테 많이 당했어요. 어느 날은 느닷없이 내무반 화목난로 주변에 있던 방화사를 다듬던 오각형 나무 판으로 엄지와 검지 사이를 툭툭 때리더라고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듯이 30분 동안 때리니까 팔이 부어서 못 움직이겠더라고요."
훈련에 적응해 군대가 좋아지던 참이었다. 직업군인까지 고민했지만 이런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에 단념했다. 제대가 가까워지자 먹고사는 일이 걱정됐다. 재수 때까지도 입시공부에 전념을 다하지 않았던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
"대학을 바라보는 상이 달라졌죠. 인맥도 없으니 대학이라도 가야겠다. 가서 직업에 대한 시야를 넓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991년 9월 제대해 두 달 반 동안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취업을 목표로 했기에 전문대를 택했다. 인천전문대 기계과에 합격했다. 그런데 인천전문대 재단은 인천대를 비롯해 전체 15개 학교를 거느린, 비리재단으로 유명한 선인학원이었다.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이어온 '재단 정상화' 투쟁이 용진이 입학할 무렵 크게 타올랐다. 1992년 신입생이 된 용진도 자연스럽게 풍물패,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비리재단을 바꿔내는데 동참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투쟁에 나섰다. 이 투쟁에 인천시민들도 적극 호응해 마침내 1993년 12월, 선인학원의 해산을 이뤄냈고 다음해 3월 산하 학교들의 시·공립화를 이끌어냈다.
"일머리보다 필요한 건 좋은 관계"
뜻을 모은 사람들의 힘으로 곪고 곪았던 학교가 바뀌는 걸 본 용진은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사회에 진출해도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꿈을. 명절에 고향마을에 갈 때마다 타던 기차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공장에 다니다가 공부를 시작했다.
"1994년엔 신입을 안 뽑고 1995년엔 공고가 났어요. 친구들하고 준비를 했죠.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열심히 공부한 기간이었어요."
절실함이 통했다. 입사시험에 합격했고 철도청 직원이 되었다. 당시엔 공무원 신분이었음에도 그리 인기 있는 직장은 아니었다. 월급도 박한데 24시간 맞교대였다. 아침 9시에 출근해 24시간을 꼬박 일하고 다음날 아침 9시에 퇴근, 다시 그 다음날 아침 9시에 출근하는 근무형태였다. 사실상 휴일이 없었다. 매년 철도 현장에서 30여 명 이상이 직무상 사망사고를 당하는 데는 몸에 무리가 가는 24시간 맞교대의 영향이 컸다. 일하기 쉽지 않은 직장이었다.
용진은 차량 직종으로 발령을 받았다. 디젤전기기관차를 일상적으로 검사하고 고장 난 부분을 고치는 일로 150여 명이 두 조로 나뉘어 일했다. 시험 준비를 많이 했지만 직접 부딪힌 현장은 참고서 속과 달랐다. 우선 규모에 압도됐다. 역에 도착한 뒤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직장인 차량사업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객차(승객을 태우는 차량) 한 량만 해도 20미터가 넘으니 객차와 디젤전기기관차들을 손보는 곳도 엄청 넓었다. 낯선 곳에 적응해 갔다. 어렵지 않았다. 일은 모르면 배우면 되니까. 배우려면 필요한 덕목이 있었다. 일머리와 좋은 관계.
"선배들이 하는 걸 보면서 익히는 일머리가 필요해요. 근데 그보다 중요한 건 좋은 관계를 맺는 거죠. 관계가 좋지 않으면 선배들이 '따라와서 봐'라고도 안 하니깐."
20대 후반으로 열정이 가득할 때였다. 가족들보다도 오랫동안 함께 있는 동료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군대에서부터 갈고 닦은 적극성을 발휘했다. 점심 빨리 먹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무리와 어울리고, 산악회를 만들어서 지리산, 설악산 등 이름난 산들도 많이 다녔다. 여럿이 함께 일하는 것도 좋았다.
"가정엔 에어컨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검수대기실에 전자레인지보다 조금 큰 네모난 에어컨이 하나 있었어요. 여름에 일하고 검수대기실에 들어오면 엄청 시원해. 일하고 와서 사람들하고 에어컨 앞에 있는 게 참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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