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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또…'현대차 회장 장남 만취 운전' 기사 무더기 삭제



김호경 에디터

haojing610@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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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디어비평

  • 입력 2025.12.26 02:55

  • 수정 2025.12.26 06:01

  • 댓글 0

정의선 아들 정창철 씨, 4년 전 음주 추돌 사고

 

서울 도심서 인명 피해 이어질 뻔한 만취 상태

 

법원, 벌금 900만 원형…언론 당시 앞다퉈 보도

 

SBS·YTN·연합뉴스 등 돌연 기사 내리거나 수정

 

정 씨 '경영 수업 시작' 부각되자 흑역사 지우기

 

재벌 광고주에 불리한 사안 축소·은폐 '고질병'

 

이를 비판하는 매체도 거의 없는 '침묵의 담합'

 

"정 씨 기사 포털에 얼마 안 남아, 자본에 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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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5일 경기 용인 기아 비전스퀘어에서 열린 기아 80주년 기념식을 마친 뒤 이동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5.12.5. 연합뉴스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회장의 아들이 4년 전 서울 도심에서 만취 상태로 운전을 하다 추돌 사고를 냈다는 기사가 근래 무더기로 삭제된 사실이 드러났다. 현대차 측의 요청에 따라 여러 언론사가 담당 기자와 협의도 없이 자사 홈페이지와 포털사이트 등에서 해당 기사를 임의로 내린 것이다. 재벌 광고주의 사전·사후 광고 및 협찬을 고리로 각 기업에 불리한 사안을 축소·은폐해주는 한국 언론의 고질적 병폐가 또 한 번 여실히 확인됐으나, '침묵의 담합' 속에 이 사실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매체조차 거의 없는 실정이다.

 

정의선 회장의 장남인 정창철 씨는 지난 2021년 7월 24일 새벽 4시 45분쯤 서울 광진구 강변북로에서 현대차 제네시스 GV80 차량을 몰다가 영동대교 램프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이후 청담대교 진입로 근처에서 멈춰선 정 씨의 차량은 운전석 앞 범퍼와 타이어 등이 크게 파손됐지만 다른 차량과는 충돌하지 않아 인명 피해는 없었다. 시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사고 발생 약 1시간 뒤 측정한 정 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164%로 면허 취소 수준인 0.08%의 2배가 넘었다.

 

차량이 가드레일에 부딪혀 멈추지 않았다면 자칫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한 만취 상태였던 것이다. 그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아파트에서 지인과 술을 마신 뒤 3.4km가량을 직접 운전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동승자는 없었다. 정 씨가 몰았던 제네시스 GV80은 부친인 정의선 회장의 소유였다고 한다. 사고 당시 정 회장은 대한양궁협회장으로서 일본 도쿄올림픽 현지 일정을 소화하느라 국내에는 없는 상태였다.

 

광진경찰서는 정 씨를 입건한 뒤 같은 해 8월 6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서울동부지검은 8월 10일 도로교통법 위반(음주운전) 혐의로 벌금 900만 원에 약식기소했다. 이에 서울동부지법 형사39단독 이재석 부장판사는 같은 해 9월 15일 정 씨에게 벌금 9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약식명령은 혐의가 비교적 가벼운 사건에서 공판 절차를 밟지 않고 약식으로 벌금 등의 재산형을 내리는 형사 절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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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음주운전 단속. 연합뉴스 자료사진

당시 일간지와 방송사, 통신사, 각종 인터넷 매체들은 정 씨의 음주 추돌 발생, 경찰 송치, 검찰 수사 및 기소, 법원의 벌금 부과 등 각 단계별로 상당량의 기사를 앞다퉈 냈다.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불리는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 재벌 일가, 특히 향후 경영 참여가 매우 유력한 사주 장남의 만취 운전 사고라는 점에서 보도 가치는 충분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올해 9월부터 SBS와 YTN을 비롯한 많은 언론사가 관련 기사들을 돌연 삭제했다. 연합뉴스는 기사 제목에서 '현대차'와 '정의선'을 뺐다가 문제가 되자 일부 복구하기도 했다.

 

거대 광고주인 현대차의 임원들이 나서 각 언론사 국장급 간부들을 상대로 기사 삭제 또는 제목 수정을 요청한 탓이다. 이는 "정창철 씨가 올해 초 현대차그룹 일본 현지법인인 현대 모빌리티 재팬에 평사원으로 합류해 상품기획 파트 담당으로 신차 개발과 상품성 검토 등 업무를 맡아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는 연합뉴스TV의 <[단독] 삼성 장남 군 입대·현대차 장남 일본행…재계 3·4세 행보 주목>이라는 9월 11일자 보도가 발단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4년 전에는 워낙 세간의 보는 눈이 많아 기사를 막는 게 무리였으나, 이제 시간이 흘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장남 이지호 씨가 해군 장교로 입대한 뉴스와 함께 정창철 씨의 행보가 다시 부각되자 '흑역사'의 흔적을 최대한 지울 필요가 있었던 듯하다.

 

현대차 요구에 의한 기사 삭제 사례를 조사해온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이하 민실위)는 24일 <'재벌 봐주기' 기사 삭제 무더기 발견…개탄을 금할 수 없다>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지금 포털 사이트에서 '현대차 장남 음주운전'을 검색하면 나오는 기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남아있는 건 KBS, MBC, 한겨레, 경향신문, 노컷뉴스의 기사 정도"라며 "정상적으로 보도됐고 사실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기사가 뒤늦게 무더기로 사라진 것"이라고 밝혔다.

 

민실위가 언론노조 소속 지부·본부를 통해 확인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9월 무렵 여러 언론사에서 문제의 기사가 잇따라 삭제된 것으로 파악됐다. '현대차그룹'이라고 실명으로 나갔던 기사를 'H그룹'으로 바꾼 곳도 있었다. 당시 기사를 썼던 기자 본인과 담당 부서장도 모르게,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슬그머니 삭제하거나 고친 게 공통점이었다고 한다. 노조가 문제를 제기하자 뒤늦게 원래대로 고친 경우도 있었다. 언론노조 지부가 없는 곳까지 포함하면 기사를 삭제한 언론사는 더욱 많을 것으로 보인다.

 

사측의 해명을 종합하면 이렇다. '오래된 기사라서.' '타사에도 다 나간 기사라서.' '이미 방송된 기사라서.' 이를 두고 민실위는 "기자가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으로 봐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라며 "이에 비하면 '4년 전 사건을 계속 언급하면서 협찬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 골치'라는 현대차 측 이야기에 삭제했다는 말은 차라리 솔직하다. 하지만 광고주의 민원 해결이 권력과 자본을 감시하는 언론의 역할은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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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TV가 9월 11일 단독 보도한 '삼성 장남 군 입대·현대차 장남 일본행…재계 3·4세 행보 주목' 화면 갈무리

아울러 "왜 사건 당시도 아닌 올해 9월이었을까. 지난 9월에는 정 회장의 장남이 일본 법인에 입사해 경영 수업의 첫발을 떼었다는 기사가 났다. 장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4년 전 음주운전 사건이 새삼 회자되자 그룹에서 대응에 나섰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재벌에 불리한 기사를 슬쩍 삭제해주는 언론이 권력을 올바로 감시할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자본의 영향을 받는 언론이 정치 권력의 영향은 받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비슷한 일이 또 있지 않았을 거라 장담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편집권 독립을 위해 투쟁해 온 언론노조 민실위는 여러 언론사가 이렇게 손쉽게 자본에 굴복한 것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이번 사태는 자본 권력에 의한 중대한 편집권 침해 사례"라며 "민실위는 기사를 삭제, 수정한 모든 언론사에 문제의 기사를 원래 승인됐던 대로 복구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현대차그룹에도 경고한다.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정상적인 언론 보도를 없애려 하지 말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고 전했다.

 

기사를 삭제한 언론사 중에서 SBS 노조는 공개적으로 사측을 강도 높게 규탄하고 나섰다. 언론노조 SBS본부는 <사라진 재벌가 '범죄' 기사, 짓밟힌 자본 독립>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재벌가의 범죄행위를 기록한 SBS의 기사 3개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삭제됐다"면서 "보도본부 디지털 수뇌부는 해당 기업의 요청을 받고 기사를 삭제해 줬다고 실토했다. 기사를 쓴 기자에게는 일언반구 언질도 없었다"고 분노했다.

 

이어 "현대차의 임원이 SBS에 건 전화 한 통에 그렇게 된 것이다. 삼성가 장남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장교로 입대한다는데, 현대가 장남은 음주운전을 했다며 비교가 되니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 부끄러움은 그렇게 SBS 구성원의 몫으로 넘어왔다"며 "재벌 광고주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쉽게 기사를 지워줬을까? 이런 삭제 사례가 이번 한 번뿐이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 건, 긴급히 보도 편성위를 개최하자는 노동조합의 요구에 보도 최고책임자가 '바쁘니 다음 달에 논의하자'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당장 삭제된 기사들을 원상 복구하라. 납득할 수 없는 해명은 그만두고 기사 삭제까지 전 과정을 명명백백히 밝혀라. 그리고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라. 지금 뼈를 깎는 변화의 의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제 더는 시청자 앞에 신뢰를 얘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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