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간지와 방송사, 통신사, 각종 인터넷 매체들은 정 씨의 음주 추돌 발생, 경찰 송치, 검찰 수사 및 기소, 법원의 벌금 부과 등 각 단계별로 상당량의 기사를 앞다퉈 냈다.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불리는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 재벌 일가, 특히 향후 경영 참여가 매우 유력한 사주 장남의 만취 운전 사고라는 점에서 보도 가치는 충분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올해 9월부터 SBS와 YTN을 비롯한 많은 언론사가 관련 기사들을 돌연 삭제했다. 연합뉴스는 기사 제목에서 '현대차'와 '정의선'을 뺐다가 문제가 되자 일부 복구하기도 했다.
거대 광고주인 현대차의 임원들이 나서 각 언론사 국장급 간부들을 상대로 기사 삭제 또는 제목 수정을 요청한 탓이다. 이는 "정창철 씨가 올해 초 현대차그룹 일본 현지법인인 현대 모빌리티 재팬에 평사원으로 합류해 상품기획 파트 담당으로 신차 개발과 상품성 검토 등 업무를 맡아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는 연합뉴스TV의 <[단독] 삼성 장남 군 입대·현대차 장남 일본행…재계 3·4세 행보 주목>이라는 9월 11일자 보도가 발단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4년 전에는 워낙 세간의 보는 눈이 많아 기사를 막는 게 무리였으나, 이제 시간이 흘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장남 이지호 씨가 해군 장교로 입대한 뉴스와 함께 정창철 씨의 행보가 다시 부각되자 '흑역사'의 흔적을 최대한 지울 필요가 있었던 듯하다.
현대차 요구에 의한 기사 삭제 사례를 조사해온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이하 민실위)는 24일 <'재벌 봐주기' 기사 삭제 무더기 발견…개탄을 금할 수 없다>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지금 포털 사이트에서 '현대차 장남 음주운전'을 검색하면 나오는 기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남아있는 건 KBS, MBC, 한겨레, 경향신문, 노컷뉴스의 기사 정도"라며 "정상적으로 보도됐고 사실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기사가 뒤늦게 무더기로 사라진 것"이라고 밝혔다.
민실위가 언론노조 소속 지부·본부를 통해 확인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9월 무렵 여러 언론사에서 문제의 기사가 잇따라 삭제된 것으로 파악됐다. '현대차그룹'이라고 실명으로 나갔던 기사를 'H그룹'으로 바꾼 곳도 있었다. 당시 기사를 썼던 기자 본인과 담당 부서장도 모르게,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슬그머니 삭제하거나 고친 게 공통점이었다고 한다. 노조가 문제를 제기하자 뒤늦게 원래대로 고친 경우도 있었다. 언론노조 지부가 없는 곳까지 포함하면 기사를 삭제한 언론사는 더욱 많을 것으로 보인다.
사측의 해명을 종합하면 이렇다. '오래된 기사라서.' '타사에도 다 나간 기사라서.' '이미 방송된 기사라서.' 이를 두고 민실위는 "기자가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으로 봐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라며 "이에 비하면 '4년 전 사건을 계속 언급하면서 협찬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 골치'라는 현대차 측 이야기에 삭제했다는 말은 차라리 솔직하다. 하지만 광고주의 민원 해결이 권력과 자본을 감시하는 언론의 역할은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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