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장관의 상징성과 그 위험
새로운 기관의 초대 장관은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다. 그는 조직의 DNA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기획예산처가 향후 어떤 기준으로 예산을 심사하고, 어떤 가치에 따라 우선순위를 설정할지는 초대 장관의 철학에 의해 결정된다.
이혜훈 후보자는 관료 조직과 정치권 모두에서 '신중함'과 '보수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는 위기 관리 국면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으나, 구조 전환과 개혁 국면에서는 명백한 한계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기획예산처는 기존의 관행을 답습하는 조직이 아니라, 부처 이기주의를 넘어서고 장기적 국가 전략을 재정으로 구현해야 하는 기관이다. 그런 역할에는 관성에 맞설 수 있는 강한 개혁 의지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혜훈 후보자가 보여준 정치적 행보에서 그러한 개혁적 에너지를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그는 제도의 안정과 관리에 무게를 두는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 이는 기획예산처가 출범 초기부터 ‘조심스러운 기관’, ‘결정하지 않는 기관’으로 낙인찍힐 위험을 내포한다.
재정 민주주의의 후퇴 가능성
기획예산처를 국무총리실 산하에 두는 구조는, 재정을 보다 정치적 책임 속에 두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치적 책임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장관이 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명확히 호흡을 맞춰야 한다. 정책 비전이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독립성’은 민주적 통제가 아니라 관료적 자율성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이혜훈 후보자가 국무총리실 산하에서 재정의 ‘견제자’ 역할을 자임할 경우, 이는 국정 운영 전반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특히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신속하고 과감한 재정 투입이 내부적 이견과 보수적 판단에 의해 지연될 경우 그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재정 민주주의는 단지 예산 권한을 분산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재정이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책임 속에서 운용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초대 장관이 그 합의를 확장하기보다 축소하는 역할을 한다면 기획예산처 신설의 명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메시지 정치의 역설
이번 인사는 분명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시장과 보수를 안심시키기 위한 신호인지, 지지층에게 ‘우리는 중도적이다’라고 설득하기 위한 제스처인지, 아니면 내부 개혁에 대한 자신 없음의 표현인지 명확하지 않다.
정치는 메시지의 예술이지만, 국정은 결과의 영역이다. 재정 정책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방향 없는 중도와 모호한 절충이다. 이재명 정부가 스스로 내세운 가치와 개혁 과제를 끝까지 밀고 갈 의지가 있다면, 재정의 사령탑은 그 의지를 가장 선명하게 구현할 인물이어야 한다.
통합은 인사가 아니라 방향이다
이혜훈 기획예산처 초대 장관 후보 지명은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선택이지만, 그 실질은 오히려 정부의 재정 개혁 의지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통합은 사람의 출신이 아니라 정책의 방향에서 완성된다. 재정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책임의 영역이다.
새로운 기획예산처가 과거의 재정 관행을 반복하는 또 하나의 관리 기관이 될지, 아니면 국가 전환을 이끄는 전략 기관이 될지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초대 장관 인사는 그 시작점이다. 그 시작이 흔들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제도 설계도 공허해질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진정으로 통합과 개혁을 동시에 추구한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상징적 인사가 아니라 분명한 재정 철학이다. 그리고 그 철학에 부합하는 인사 선택이다. 이번 결정이 그 기대에 부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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