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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하이닉스 '호남 반도체 공장'의 실체... 마냥 기뻐할 수 없다

[반도체 특별과외] 패키징 공장 아닌, 반도체 팹이 세워져야 하는 이유

26.06.11 06:55최종 업데이트 26.06.11 06:55

반도체 팹 내부 모습. 클린룸 안에서 자동화된 기기들이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곳입니다.이봉렬

지난 10일 <한겨레>는 "삼성전자·하이닉스, 호남에 첫 반도체 공장 설립 추진"이라는 제목의 단독 기사를 통해 "정부는 이르면 이달 말 주요 기업들과 비수도권 투자 방안을 논의할 예정인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호남 반도체 공장 신설안이 이 자리의 주요 안건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파악됐다"라고 보도했습니다. 뒤이어 <연합뉴스>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설비 투자를 호남 및 충청권으로 신규 확대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동안 <반도체 특별과외>를 통해 수차례 "수도권에 추가로 반도체 산단을 지을 게 아니라,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방으로 옮겨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저로서는 "호남에 첫 반도체 공장 설립 추진"이라는 기사 제목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기사 내용을 자세히 보니 두 회사가 호남권에 지을 가능성이 있는 공장은 반도체 팹(FAB)이 아니라 반도체 패키징(Packaging) 공장이라고 합니다. 이는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온전히 만족할 만한 소식은 아닙니다.

세계적인 패키징 기업, 이미 호남에 자리 잡고 있어

오늘 <반도체 특별과외>에서는 반도체 팹과 패키징이 어떻게 다르며, 왜 호남에 지어야 할 핵심 시설이 패키징이 아닌 팹인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반도체 제조는 크게 '전공정(Front-end)'과 '후공정(Back-end)'으로 나뉩니다. 전공정은 둥근 실리콘 웨이퍼 위에 나노 단위의 미세한 회로를 찍어내고, 깎고, 덮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전공정을 진행하는 곳을 반도체 팹이라고 부릅니다. 먼지 한 톨까지 관리되는 클린룸에서 한 대에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을 호가하는 장비들이 웨이퍼 위에 회로를 새겨 넣습니다. 막대한 전력과 물이 필요하며, 반도체의 핵심 성능을 결정짓는 기술의 집합체가 바로 팹입니다. 요즘은 이 팹 하나를 건설하는 데만 50조 원 이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반면 후공정은 전공정을 마친 웨이퍼를 낱개 칩으로 잘라내고(다이싱), 기판과 연결한 뒤 외부 충격이나 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포장(패키징)하는 과정입니다. 회로를 얇게 새기는 전공정 기술이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칩을 수직으로 쌓거나 여러 칩을 이어 붙이는 첨단 패키징 기술이 반도체 기업의 새로운 무기가 되고 있습니다. 패키징 등 후공정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OSAT(Outsourced Semiconductor Assembly and Test : 반도체 후공정 외주 기업)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팹에서 사용되는 장비에 비해서는 비교적 가격이 낮아, 패키징 공장 건설에 필요한 비용은 대략 5조 원 정도로 팹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합니다.

수도권에 이미 수많은 반도체 팹이 있고 용인 산단에도 여러 팹이 들어설 예정이라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팹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세계 유수의 패키징 전문 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OSAT 분야 세계 1위인 대만의 ASE는 경기도 파주에 'ASE 코리아'를 운영하며 전장용(차량용) 반도체 등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세계 2위인 미국의 '앰코 테크놀로지'는 아남반도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현재 광주광역시에 대규모 사업장을 운영 중입니다. 특히 앰코는 국내 사업장에서만 매출 규모가 5조 원 수준에 달할 만큼, 호남은 이미 세계적인 후공정 생태계와 인프라를 경험한 지역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호남을 패키징 기지로 검토하는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습니다.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 광주사업장 모습광주북구청 유튜브

그렇다면 첨단 기술로 격상된 패키징 공장이 진작부터 생태계를 만들어 놓은 호남으로 가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본질과 거대한 경제적 파급력은 전공정을 진행하는 반도체 팹에 있기 때문입니다.

패키징 공장 아닌, '팹'이 호남으로 가야 한다

반도체 팹을 수도권이 아닌 호남에 짓자고 주장하는 핵심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수도권 집중을 막고 진정한 지역균형발전을 이룬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RE100이 반도체 산업의 생존을 위한 필수 과제가 된 시대에 막대한 재생에너지를 적기에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 호남이기 때문입니다.

패키징 공장을 호남에 짓는다면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좋은 일이긴 하지만, 수도권 집중 해소와 지역균형발전 측면에서는 그 영향이 미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엠코코리아만 해도 광주와 인천 사업장을 더해 직원 수가 8000명 수준에 그쳐서, 반도체 장비나 소재 등 연관 업체의 대규모 유입 효과는 크지 않습니다. 파주에 있는 ASE 역시 세계 1위의 패키징 업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회사 하나 때문에 타지역의 우수 인재들이 파주로 대거 이동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패키징 공장을 하나 더 짓는다고 해서 수도권으로 빠져나간 지역 인재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반면 팹은 다릅니다. 팹 하나가 들어서면 수백 개의 첨단 소재, 부품, 장비 협력사들이 공정의 효율성을 위해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동반 입주해야만 합니다. 시설 투자가 10배 이상이고 거대한 서플라이 체인이 통째로 움직여야 하는 팹을 지어야만, 비로소 그곳에 자생력을 갖춘 새로운 반도체 생태계가 조성되고 인재들도 함께 몰려들게 됩니다.

두 번째로 재생에너지는 더 시급하고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용인 클러스터 하나를 돌리는 데 필요한 전력만 수도권 전체 전력 수요의 4분의 1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데, 수도권 자체로는 이 막대한 전기를 만들어낼 공간도, 방법도 없습니다. 결국 당장은 지방의 석탄화력발전소나 원전에서 만든 전기를 끌어와야 하는데,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송전탑을 새로 세우는 일은 막대한 비용은 물론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게다가 초고압 장거리 송전망 건설은 최소 10년 이상이 소요되며, 송전 과정에서 길바닥에 버려지는 막대한 전력 손실 문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전기를 제때 끌어오지도 못할뿐더러,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애플, 구글, 엔비디아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이제 100% 재생에너지로 만든 반도체가 아니면 사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수도권은 부지 특성상 향후에도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소를 대규모로 지을 수 없어 재생에너지 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겐 'RE100 반도체'가 필요하다

애플 웹사이트에선 애플의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협력업체와 함께 할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애플

호남에서 생산하는 재생에너지를 장거리 송전망을 세워 수도권에 조달하겠다는 계획은, 마치 수도권에서 발생한 대규모 생활 쓰레기를 굳이 호남까지 차로 실어 가서 버리겠다는 발상만큼이나 비양심적이며 비현실적입니다. 이는 지방을 수도권의 에너지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무책임한 처사입니다.

호남은 넓은 평야와 풍부한 일사량, 긴 해안선을 바탕으로 태양광과 해상풍력 등 국내에서 재생에너지 잠재력이 가장 압도적인 곳입니다. 이미 쏟아지는 태양광 전기를 기존 송전망이 감당하지 못해 발전기를 강제로 끄는 출력 제어 사태까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팹 운영을 위해 막대한 전기가 필요하다면 전기를 무리하게 끌어올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전기가 풍부하게 만들어지는 곳에 팹을 지으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송전망 건설 과정에서 발생할 천문학적 낭비와 갈등을 해결하는 동시에, 글로벌 시장이 강력히 요구하는 RE100 반도체를 적기에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후 위기 시대, 재생에너지가 곧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에 현재와 같은 수도권 일극 체제로는 한국 반도체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재해로 인해 수도권에 밀집한 반도체 팹이 동시에 멈춰 서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재난이 될 것입니다. 지정학적·환경적 리스크 분산을 위해 반도체 팹을 여러 지역에 분산 배치하고 있는 미국, 대만, 일본 등 경쟁국들의 행보를 깊이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 지방선거가 끝나고 각 지역의 지자체장이 새로 정해졌습니다. 호남 지역의 지자체장과 시민들은 수조 원대 패키징 기지라는 당근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풍부한 재생에너지라는 강력하고도 유일무이한 장점을 지렛대 삼아, 반도체의 진짜 심장인 전공정 팹 유치에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을 살리는 길이며, 국가적으로는 진정한 지역균형발전을 이루는 길이자, 한국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RE100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해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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