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비핵화는 ‘먼 훗날’ 전 세계의 비핵화로 풀어야

일본의 대하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 외부 세계로부터 절멸 위협을 받는 고립 공동체 파라디 섬이 나온다. 그곳 사람들은 과거 거인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에르디아 제국의 후예다. 성벽 바깥에 파라디를 위협하는 마레 제국이 있다. 과거 에르디아 제국의 폭압을 기억하면서 파라디를 멸절하려는 세력이다. 파라디 공동체가 마레 제국에 맞서 유지하는 최후의 억제력이 ‘땅울림’(rumbling)이다. 거인들을 동원해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외부 세계에게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힘이지만 에르디아인에게는 없으면 망하는 힘이다.

조선은 한 때 고립되어 있었다. 핵이 있어야 공격받지 않는다고 믿었다. 미국의 적대정책과 군사위협 때문에 핵을 가졌으며, 핵을 포기하면 리비아나 이라크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과 주변국은 북한이 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믿는다. 조선의 핵은 평양의 ‘땅울림’이다. 워싱턴과 서울과 도쿄에는 제거해야 할 종말장치이지만, 평양에는 포기하는 순간 자신들이 짓밟힌다고 믿는 최후의 성벽이다. 그러나 <진격의 거인>에서 ‘땅울림’은 실제로 작동해 세계가 멸망의 순간에 처하지만, 조선의 핵은 결코 터져서는 안 되는 물질이다.

6월 8일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갖고 조선의 핵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접근을 강조했다. 비핵화를 협상의 문턱에 두려는 주장을 ‘이상론’으로 규정하고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년 10-20개의 핵탄두를 제조할 수 있는 핵물질의 생산과 탄도미사일 기술의 최상급 고도화 추세를 현 단계에서 멈추게 하는 것이며, 그것만으로도 국제사회에 이익이라고 했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조선에 대한 경제제재도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제재를 앞세운 비핵화 억압 역시 현실적인 방안이 아니라는 견해를 드러냈다. 일보 전진이다.

그렇다고 조선이 즉각 긍정적으로 반응할 것 같지는 않다. 이 대통령이 “비핵화 목표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 이상, 조선으로서는 이를 핵보유국 지위 부정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북은 지금 핵을 협상 카드가 아니라 헌법적 지위, 국가 정체성, 대미 억제력의 핵심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조선에게 비핵화 요구는 주권과 생존권 포기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조선의 반응은 침묵, 냉소적 평가절하, 또는 비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이 발언은 중요하다. 한국이 앞으로 미국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6월 4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위원장이 새로 조업한 핵물질 생산 공장을 현장 지도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김정은은 “지난 5년간 무기급 핵물질 생산능력이 종전의 2배를 능가했다”고 말하고, 핵무력을 “질량적으로, 지속적으로, 가속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미국의 소리’(VOA) 보도에 따르면 공개된 사진의 원심분리기 배열과 통로 구조가 기존 영변, 강선 시설과 달라 새로운 시설일 가능성이 있으며, 정상 가동 시 연간 약 70-80kg의 고농축우라늄, 즉 최소 핵무기 4기분 정도를 생산할 수 있다. 조선은 멀리 나아가고 있다.

미국의 대북 강경파 빅터 차의 시각이 이 대통령의 관점에 근접한다. 차는 4월 21일 <포린어페어> 기고문(North Korea As It Is: The Case for a Cold Peace)에 미국이 비핵화를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이제는 그것이 “먼 목표”임을 인정해야 하며, 당장의 안보 필요를 가로막게 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그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도 “비핵화는 고귀한 목표지만 과거 정책 실패와 조선의 집요한 핵보유 의지 때문에 당장은 달성 불가능하다”면서 미국은 “그 핵무기에 맞서 미국을 더 안전하게 만드는 즉각적 목표”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로 이거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조선의 비핵화를 협상의 입구에 위치시키고 있다. 5월 17일 백악관이 발표한 미중 정상회담 팩트시트는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북한을 비핵화한다는 공동 목표를 확인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중국 외교부는 “중국의 한반도 문제 입장과 정책은 일관되고 연속적이며, 정치적 해결을 추진하겠다”라고만 말한다. 미 국무부 대변인이 6월 5일 시 주석 방북과 관련해 팩트시트의 내용을 되풀이하자 김여정은 비핵화란 “시대착오적 망상”이라면서 미중 정상이 북한 비핵화에 합의했다는 미국 발표를 “허위정보”라고 비난했다.

 

핵탄두를 보유한 나라가 제재나 협박으로 핵무기를 포기한 사례는 없다. 남아공이 과거 핵무기를 폐기한 것은 제재가 아니라 그것이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비핵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과 조선의 반발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5월 26일 QUAD 외교장관이 공동성명에서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하자 조선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비핵화는 영원히 실현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상론일 뿐이다. 조선에게 “비핵화는 끝난 의제”이고 “핵보유국 지위는 불가역”이다.

러시아는 조선을 ‘NPT상의 공식 핵보유국’으로 승인한 것은 아니지만, 정치·외교적으로는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2024년 9월 “조선의 비핵화는 종결된 문제”라 말하면서 조선의 핵무기를 방어 전략의 핵심 요소로 이해한다고 언급했다. 중국 역시 조선의 핵무기국 지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6월 7일 시 주석의 평양 방문과 관련 “조선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중단시키는 일은 중국의 의제에서 빠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는 중국의 조선 핵지위에 대한 묵시적 수용이라고 썼다.

6월 8일 시진핑과 김정은은 정상회담을 갖고 조중관계의 ‘새 시대’를 열기로 합의했다. 조선은 핵보유국 지위를 접지 않은 채 중국의 전략적 후원을 얻었고,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서 자신이 핵심 후견자라는 점을 과시했다. 시진핑은 노동신문에 패권주의와 군국주의 부활 시도에 반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냈다. 미국, 한미일 안보협력,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겨냥한 표현이다. 두 정상이 대미 협상 카드를 조율했을 가능성도 크다. 조선은 중국을 통해 미국에 “비핵화가 아니라 핵군축, 제재완화, 평화공존을 논의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려 했을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비핵화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은 빅터 차의 말처럼 ‘먼 목표’요 ‘고귀한 목표’로 간직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 대통령의 비핵화 불포기 발언이 그러한 맥락이라면 그의 ‘현실론’은 이보 진전이다. ‘완전한 비핵화’라는 이상론만 되풀이해 온 국제사회의 압박문법은 당장 중단해야 한다. 이제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미국에 현실적 접근법을 취하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굳이 비핵화라는 말은 꺼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아주 멀리 가닿아야 할 종착지일 뿐이다. 이를 바로 인식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다.

<진격의 거인>에서 파라디 섬은 외부 세계가 자신들을 절멸시키리라는 공포 속에서 끝내 ‘땅울림’을 가동한다. 실제로 작동한 최후의 억제력은 인류와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는다. 조선의 핵은 결코 그런 길로 들어서면 안 된다. 그것을 막는 길은 파라디의 성벽을 향해 ‘비땅울림화’를 압박하는 일이 아니다. 압박은 늘 재앙을 불러오는 법이다. ‘땅울림’을 인정하고 파라디와 조선의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적 번영의 길을 열고, 적대정책과 핵우산과 전략자산 전개까지 함께 다루는 한반도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모두가 이기는 길은 조선의 비핵화 강요가 아니라 ‘먼 훗날’의 한반도 비핵화다. 그리고 그 ‘먼 훗날’에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NPT상의 모든 핵보유국들도 비핵화를 완료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