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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반헌법행위 매달린 문호철의 짧은 41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6/06/09 09:39
  • 수정일
    2026/06/09 09:3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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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읽는 『반헌법행위자열전』 문호철 편

오제도 강연 듣고 공안검사 되겠다고 결심

대학 때 경찰과 싸우며 "난 판검사 될 사람"

아이히만처럼 악의 아닌 상부 압박에 순종

공화당 의원 선거법 위반 봐주고 출세길에

남산 부활절 예배 박 목사 허위 진술 유도

인혁당 재건위 조작, 사형 구형장에 서명

야당 의원 13명 불법 구금 알고도 기소해

'어쩔 수 없음'이란 핑계가 치명적 결과 낳아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4권을 펼쳤다. 문호철(文鎬喆, 1937~1978) 항목은 이 책에 수록된 인물들 중에서 가장 짧은 생애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다. 41세. 1978년 3월 26일 중앙정보부 파견 근무 중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 41년 안에 담긴 반헌법 행위의 목록은 결코 짧지 않다.

그리고 이 인물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박형규(1922~2016) 목사에게 한 말이다.

"어렵게 고시에 합격해 어쩔 수 없이 공안부에 배속됐는데 기소하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하니 도와주는 셈치고 '폭력시위'라는 어귀 하나만 쓰게 해달라."

 

이 말이 이 글의 핵심이다. "어쩔 수 없이" 이 한 마디가 한국 공안검찰의 구조를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다.

 

 

문호철.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오제도의 제자, 출발점이 말해주는 것

문호철은 1937년 7월 19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57년 고려대 법대에 입학한 그는 재학 중 극우 공안검사 오제도의 순회강연을 듣고 감동해 오제도가 이끌던 '한국 청년도덕재무장기구(OMRY)의 학생위원으로 활동했다. 오제도는 이승만 정권 시절 반공 사냥개 노릇을 한 검사로, 『반헌법행위자열전』에서 "재판소 서기 출신으로 옆문으로 검사가 된" 인물로 묘사된 바 있다. 그 오제도에게 감동받아 반공 학생운동을 한 청년이 나중에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검찰관이 됐다.

 

출발점이 말해주는 것이 있다. 그는 확신으로 공안검사가 됐다. 적어도 처음에는. 대학생 때 경찰과 싸우다 구속됐을 때 "나는 판검사가 될 사람이야"라며 난동을 부렸다는 기록도 있다. 특권의식과 확신이 결합된 출발이었다.

1962년 제15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고 1964년 춘천지검 검사로 시작했다. 고시 동기로는 가재환(1940~2025), 이철환, 정상학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나란히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에 이름을 올렸다. 결혼식 주례는 법무부장관 민복기(1913~2007)가 섰다. 민복기도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의 인물이다. 1965년 결혼식에서 이미 두 명의 반헌법행위자가 만났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세계사 속의 동류, '명령을 따른' 사람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독일 역사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연구가 떠오른다.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 재판을 취재하며 "악의 평범성"을 말했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명령을 따랐고, 출세를 원했고,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다.

 

문호철은 아이히만보다 작은 규모의 악을 행했다. 그러나 구조는 같다. "어쩔 수 없이 공안부에 배속됐는데", 그 '어쩔 수 없음'이 박형규 목사를 괴롭히고, 인혁당 사건의 조작에 참여하고, 고문당한 국회의원의 호소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구조의 압박이 그를 움직였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더 무서운 이유다.

 

 

1942년의 아돌프 아이히만(위키피디아)

1967년 6·8 총선, 부정선거 수사를 중단하다

문호철의 반헌법 행위 첫 번째 장면은 1967년 6·8 총선 공화당 부정선거 수사중단이다. 강원도 영월·정선에서 당선된 공화당 장승태의 선거법 위반혐의를 수사했다. 박쥐작전, 베트콩작전, 두더지작전, 울타리작전, 흑색작전. 공화당의 부정선거 수법은 그 작전 이름도 다채로웠다. 문호철은 현지로 가서 관련자 70여명을 소환해 부정선거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장승태 측이 증인을 매수·협박하고 고소인이 고소를 취하하자 문호철은 다른 증인을 확보하는 대신 수사를 접었다. 그 결과 장승태는 국회의원 세 번, 체신부장관까지 지냈다. 부정선거를 덮은 검사와 부정선거로 당선된 의원이 각자의 길을 걸었다.

 

남산 부활절예배, 할머니들이 KBS 점령한다는 공소장

1973년 4월 남산에서 부활절 예배를 마치고 유신반대 플래카드를 들었다가 경찰에 제지된 박형규 목사 등을 문호철은 '내란음모'로 기소했다. 공소장의 내용은 걸작이었다. 할머니들이 다수인 십만 군중이 두 대열로 나뉘어 한쪽은 KBS를, 다른 한쪽은 서울 중앙청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방청석에서 킥킥대는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문호철은 이 공소장을 쓰기 전 박형규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렵게 고시에 합격해 어쩔 수 없이 공안부에 배속됐는데 기소하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하니 도와주는 셈치고 '폭력시위'라는 어귀 하나만 쓰게 해달라."

 

박형규는 문호철이 "측은해 보이기도 하고 입씨름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 허위진술에 동의했다. 그 허위진술이 내란음모 공소장의 씨앗이 됐다.

 

이 사건은 1988년 5월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사건 발생 15년 만이었다. 문호철은 이미 10년 전에 세상을 등진 뒤였다.

 

유신독재 체제에 가장 먼저 도전장을 내민 1973년 4월22일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이래 개신교 진보세력은 박정희 정권 내내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사진은 1975년 4월 구속된 박형규(왼쪽부터)·김관석·조승혁·권호경 목사가 재판을 받는 모습.([길을 찾아서] 미수에 그친 유신반대 시위도 내란음모죄 / 이룰태림)-이룰태림은 고 성유보 선생의 필명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 구형에 서명한 검찰관

문호철 반헌법 행위의 정점은 1974년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관으로서 인혁당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 기소한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에서 피의자들을 속이거나 직접 폭행했으며, 법정에서 진술 중인 피고인을 협박해 "악질검사"로 불렸다. 사형을 구형하는 공소장에 서명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상고기각, 18시간 후 8명이 처형됐다. 국제법학자위원회는 "사법역사상 최악의 사법살인"이라 규정했다.

 

2007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해 문호철이 기소에 참여한 사건들은 모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당한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희생자들, 후에 무죄로 밝혀졌다. ⓒ 의문사위 자료사진

야당 국회의원 고문호소를 외면하다

1972년 10월 유신 직후 보안사령부는 야당 국회의원 13명을 불법감금하고 고문해 개인비리로 검찰에 송치했다. 문호철은 국회의원들이 불법 감금되어 고문당한 사실을 알 수 있었음에도 이를 외면하고 보안사령부 송치내용 그대로 기소했다. 국회의원의 허위자백에는 이런 상황이 있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높은 사람 앞에 가서 지금까지 진술한 대로 해"라고 협박했고, 서울구치소 앞을 지키고 있었다. 문호철은 그 상황을 알면서 기소했다.

 

문호철.(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41세의 죽음,역사의 법정에 서지 못한 이유

문호철은 1974년 하반기 중앙정보부 6국(대공수사국) 수사단장 및 부국장으로 파견됐다. 1977년 8월 부장검사로 승진했다. 그리고 1978년 3월 26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41세. 아직 인혁당 사건의 재심도 열리지 않은 때였다. 그가 기소한 피해자들이 여전히 감옥 안에 있거나 이미 처형된 채였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박정희 정권이 1978년 3월 19일 그에게 홍조 근정훈장을 수여했다. 사망 일주일 전이었다. 국가가 그의 충성에 마지막으로 보답했다. 훈장을 받은 지 일주일 후 그는 눈을 감았고, 훗날 자신이 기소한 사건들은 모두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윤석열과 박정희(박정희, 윤석열 그리고 반복되는 계엄의 역사)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아이히만 재판 이후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국제법리의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뉘른베르크 원칙이라고 한다.

 

"상관의 명령 또는 정부의 명령에 따른 행위는 국제법상의 책임으로부터 행위자를 면제시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공안부에 배속됐는데." 문호철의 이 말이 뉘른베르크 원칙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지를 영국에서 생각한다. 어쩔 수 없었다면, 왜 박형규 목사에게 허위진술을 회유했는가. 어쩔 수 없었다면, 왜 피의자를 직접 폭행했는가. '어쩔 수 없음'은 구조의 압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밤 무장병력을 국회로 보낸 사람들 중에도 "어쩔 수 없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 '어쩔 수 없음'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지를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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