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수사를 빨리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졌다. 다음날 서울지검장 정구영은 2차장 서익원을 통해 형사2부 검사 안상수에게 부검을 지휘하도록 지시했다. 부검 결과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임이 확인됐다.
이 지점에서 서익원의 역할이 논란거리다. 『반헌법행위자열전』에 따르면 수사 검사 안상수가 서익원과 정구영에게 고문 가담 경찰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으나, "정구영과 서익원은 경찰의 조사내용과 다르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수사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안상수가 신창언 수사팀장과 서익원을 찾아가 "수사를 빨리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 즉 서익원이 완전히 수동적이지는 않았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1월 24일 수사결과 발표에서 서울지검장 정구영이 2차장 서익원과 3차장 이건개, 수사팀장 신창언, 수사검사 안상수·박상옥이 배석한 가운데 물고문 이외의 다른 가혹행위는 없다며 사건을 조한경과 강진규, 두 사람의 구속으로 마무리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발표자리에 서익원이 있었다.
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고문 은폐 사실을 폭로하자 진실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8일 검찰 인사에서 서울지검장 정구영은 광주고검장으로, 차장검사 서익원은 대구고검 차장검사로 각각 한 단계 승진발령을 받았다.
이 대목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의 평가가 결정적이다.
"제대로 됐다면 당시 수사 지휘부였던 정구영과 서익원은 형사 책임을 져야 마땅했는데, 비록 한직이지만 승진까지 한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안상수의 증언에 따르면, 박종철 사건이 없었다면 서익원은 대구고검 차장이 아니라 서울고검 차장으로 영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좌천성 인사이긴 하지만, 형사책임을 지지 않고 좌천으로 처리됐다는 것이 핵심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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