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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 간첩단' 대법 파기환송심 두번 치받은 '핑퐁 판사'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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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읽는 『반헌법행위자열전』 오병선 편

비서울대 출신 첫 고등고시 사법과 수석합격

"자백이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 처벌 못해"

헌법 조항 근거로 1970년엔 진보적 판결도

강희남 목사엔 "유무죄 모르겠다"며 10년 선고

'송씨 일가' 대법원 파기환송심 "유죄" 뒤집어

총 7번의 재판 끝에 안기부 뜻대로 유죄 확정

이일규 대법원장 '무죄' 취지 거슬러 잇단 좌천

'고문 조작'에도 유죄 판결… 재심서 모두 무죄

서초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실에서 민변과 참여연대가 검찰 60주년을 맞아 공동으로 개최한 ‘검찰의 과거사 반성 촉구 및 피해자 증언 기자회견’에서 ‘송씨 일가 간첨단 조작사건(1982년)’ 피해자인 송기복씨가 증언을 하고 있다. 2008.10.29. 연합뉴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오병선(吳炳善, 1939~2014) 항목에는 색다른 구절이 있었다.

"오병선에게는 안기부로부터 대법원판사 자리를 보장받았다는 등의 뒷말이 법원 주변에 돌았다."

그런데 이 '보장'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병선은 대법관이 되지 못했다. 그를 대법관 자리에 앉히려 했던 안기부의 보장보다, 대법원판사 이일규가 대법원장이 된 이후의 현실이 더 강력했다.

이일규 대법원장은 오병선이 치받은 바로 그 판결의 주심이었다. 이 묘한 인과관계가 오병선 이야기의 핵심이다.

고등고시 수석 합격, 비서울대 최초

오병선은 1939년 3월 5일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1958년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에 입학했다. 지방 사립대 재학 중이던 1961년 10월,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비서울대 출신으로는 최초의 수석합격이었다. 법조계에서 학벌 장벽이 높던 시절, 이 기록은 대단한 것이었다.

고시 동기로는 박종연, 황진호, 정구영 등이 있는데 이들 상당수가 나란히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1965년 11월 서울형사지법 판사로 첫 발령을 받았다.

 

오병선(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세계사 속의 동류, '압력에 굴복한 엘리트 법관'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 떠오른다. 독일 나치시대 판사들 중 일부는 처음에 법치주의에 헌신하는 엘리트였으나, 권력의 압박과 경력에 대한 욕심이 결합되면서 체제에 봉사하는 판결을 내리게 됐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분석한 "악의 평범성"이 법관에게도 적용됐다.

오병선은 수석합격자였다. 영리했고, 초기에 인권적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안기부와 보안사의 압력 앞에서, 그리고 대법관이라는 경력의 유혹 앞에서 결국 굴복했다. 이것이 단순한 악인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다.

 

한나 아렌트(Getty Images)

"자백만으로 처벌할 수 없다" 1970년의 명판결

오병선의 이력에는 주목할 만한 양면이 있다. 긍정적인 면부터 보자. 1970년 8월 대전지법 판사 시절, 통금위반 등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된 28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는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는 헌법조항을 근거로 삼았다. 이 판결이 다른 지역의 즉결심판에도 영향을 미쳤다. 진보적이고 원칙적인 판결이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이 판결의 근거가 된 헌법조항이 오병선의 판결 이후 2년 만에 유신헌법에서 아예 삭제됐다. 그리고 1980년 헌법 개정에서 되살아났다. 오병선이 지키려 했던 헌법 조항을 박정희 정권이 지워버린 것이다.

오병선의 반헌법 행위는 1977년 전주지법 부장판사 시절부터 본격화됐다. 유신 긴급조치 위반 사건들을 맡아 줄줄이 유죄를 선고했다.

가장 황당한 장면이 강희남 목사 사건이다. 1977년 11월, 오병선은 "피고인은 지난날의 행적으로 보나 기독교 목사이므로 도저히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할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기에 재판부도 무척 고민했다"고 말하면서도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반공법에 저촉되는지 안 되는지는 본 재판부도 확실히 모르겠으니 항소해보시오."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 같고, 반공법 위반인지도 모르겠는데, 징역 10년. 이것이 유신시대 긴급조치 재판의 현실이었다. 재판부가 판단을 내리기 두려워 피고인에게 "항소해보라"고 말하는 법정. 오병선은 11건의 긴급조치 사건을 이런 방식으로 처리했다.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치받다 '핑퐁재판'의 주인공

오병선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결정적 장면은 1983년 송씨 일가 간첩단 조작사건 파기환송심이다. 안기부가 1982년 9월 "대형 간첩단"이라며 발표한 이 사건은 처음부터 고문조작이었다. 피고인들은 첫 공판부터 고문 사실을 폭로했다.

1심은 송지섭에게 사형 등 전원유죄, 2심도 유죄. 그런데 1983년 8월 대법원 형사1부(주심 이일규)가 "장기 구금 후 검사 앞에서 한 자백은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다"며 파기 환송했다. 무죄 취지였다.

안기부와 대법원장 유태흥이 발칵 뒤집혔다. 파기환송심 재판장이 오병선으로 결정됐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오병선의 방에서 비공개로 증언했다. 통신담당 직원이 비공개로 설명했다. 1983년 12월 23일 오병선은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의 무죄취지 파기환송 판결을 하급 법원이 치받은 것이다.

변호사 백형구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만약 오 판사가 무죄 판결을 했으면 그 당시에 바로 옷을 벗어야 했을 것이다."

이일규 전 대법원장은 "당시 고등법원 오 판사가 안기부의 부탁을 받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고 말했다. 국정원과거사위원회가 면담을 요청했지만 오병선은 거절했다.

이 사건이 핑퐁재판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대법원이 두 번이나 무죄취지로 파기환송했는데, 고법이 두 번 다 치받아 유죄를 선고했다. 총 7번의 재판 끝에 안기부의 뜻대로 유죄가 확정됐다.

 

(간첩 누명 쓴 ‘송씨 일가’의 지옥 같은 25년 < 문화 < 기사본문 - 시사IN)ⓒ시사IN 안희태. 송기복씨(사진)와 송기준씨는 인터뷰 내내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가슴속 깊이 패인 상처는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되어 줄줄 흘러내렸다. 그들은 사건 이후 수십 년 만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안기부의 조작은 평온하던 한 일가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간첩조작 피해자들 재심 무죄는 수십 년 뒤에야

오병선이 항소심 재판장으로 유죄를 선고한 사건들의 목록이 길다. 김광호 사건(2013년), 정영 사건(2011년), 허철중 사건(2013년), 윤정헌 사건(2011년). 모두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이었고, 모두 재심에서 무죄가 됐다.

오병선이 항소를 기각하고 유죄를 유지한 결과 피해자들이 수십 년을 억울하게 살아야 했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이를 냉정하게 기록한다.

"항소심 재판장으로서 후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다수의 사건에서 항소를 기각하거나 유죄판결을 유지한 오병선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일규가 대법원장이 되자 밀려났다

1985년 오병선은 서울가정법원 수석부장판사가 됐다. 재판업무에서 물러난 것이었다. 1988년에는 사법연수원 교수부장으로 더 깊은 한직으로 밀려났다. 자신이 치받은 판결의 주심 이일규가 대법원장이 됐기 때문이었다.

법원주변에는 안기부가 대법관을 보장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그 보장은 지켜지지 않았다. 1991년 1월 법원장 보직을 받지 못하자 그는 퇴직했다. "수없이 많은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를 낳은 이 엄청난 판결로 오병선이 치른 대가는 겨우 대법관 선임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것뿐이었다"고 『반헌법행위자열전』은 기록한다.

퇴직 후 그는 고향 영암 학산면의 재경향우회장과 명예면장을 맡으며 장학금을 지원했다. 2014년 1월 7일 사망했다.

 

오병선.(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나치시대 법관들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다. 압박을 받았다는 것이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오병선은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이일규 대법원판사는 같은 압박 아래서 무죄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 용기 때문에 대법원장이 됐다. 같은 시대, 같은 체제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오병선을 떠올렸다. 수석합격자가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에 유죄를 선고하는 구조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물어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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