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만으로 처벌할 수 없다" 1970년의 명판결
오병선의 이력에는 주목할 만한 양면이 있다. 긍정적인 면부터 보자. 1970년 8월 대전지법 판사 시절, 통금위반 등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된 28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는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는 헌법조항을 근거로 삼았다. 이 판결이 다른 지역의 즉결심판에도 영향을 미쳤다. 진보적이고 원칙적인 판결이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이 판결의 근거가 된 헌법조항이 오병선의 판결 이후 2년 만에 유신헌법에서 아예 삭제됐다. 그리고 1980년 헌법 개정에서 되살아났다. 오병선이 지키려 했던 헌법 조항을 박정희 정권이 지워버린 것이다.
오병선의 반헌법 행위는 1977년 전주지법 부장판사 시절부터 본격화됐다. 유신 긴급조치 위반 사건들을 맡아 줄줄이 유죄를 선고했다.
가장 황당한 장면이 강희남 목사 사건이다. 1977년 11월, 오병선은 "피고인은 지난날의 행적으로 보나 기독교 목사이므로 도저히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할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기에 재판부도 무척 고민했다"고 말하면서도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반공법에 저촉되는지 안 되는지는 본 재판부도 확실히 모르겠으니 항소해보시오."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 같고, 반공법 위반인지도 모르겠는데, 징역 10년. 이것이 유신시대 긴급조치 재판의 현실이었다. 재판부가 판단을 내리기 두려워 피고인에게 "항소해보라"고 말하는 법정. 오병선은 11건의 긴급조치 사건을 이런 방식으로 처리했다.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치받다 '핑퐁재판'의 주인공
오병선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결정적 장면은 1983년 송씨 일가 간첩단 조작사건 파기환송심이다. 안기부가 1982년 9월 "대형 간첩단"이라며 발표한 이 사건은 처음부터 고문조작이었다. 피고인들은 첫 공판부터 고문 사실을 폭로했다.
1심은 송지섭에게 사형 등 전원유죄, 2심도 유죄. 그런데 1983년 8월 대법원 형사1부(주심 이일규)가 "장기 구금 후 검사 앞에서 한 자백은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다"며 파기 환송했다. 무죄 취지였다.
안기부와 대법원장 유태흥이 발칵 뒤집혔다. 파기환송심 재판장이 오병선으로 결정됐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오병선의 방에서 비공개로 증언했다. 통신담당 직원이 비공개로 설명했다. 1983년 12월 23일 오병선은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의 무죄취지 파기환송 판결을 하급 법원이 치받은 것이다.
변호사 백형구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만약 오 판사가 무죄 판결을 했으면 그 당시에 바로 옷을 벗어야 했을 것이다."
이일규 전 대법원장은 "당시 고등법원 오 판사가 안기부의 부탁을 받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고 말했다. 국정원과거사위원회가 면담을 요청했지만 오병선은 거절했다.
이 사건이 핑퐁재판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대법원이 두 번이나 무죄취지로 파기환송했는데, 고법이 두 번 다 치받아 유죄를 선고했다. 총 7번의 재판 끝에 안기부의 뜻대로 유죄가 확정됐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