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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투성이 암살범' 문세광 수사 번개처럼 끝낸 김기춘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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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명 미흡한데 국가는 왜 그렇게 서둘렀나

총격 사건 127일, 형 확정 사흘 만에 사형

중앙정보부장의 법률보좌관 김기춘이 수사

"'자칼의 날'로 문의 입 열었다" 김의 회고 유명

수사기록 보면 문은 그 전부터 여러 차례 진술

김기춘이 2009년에 낸 회고록 지난달에 공개

"일본의 공동수사 받으려는 신직수 내가 만류"

김 이듬해부터 승승장구, 박근혜 비서실장으로

국가가 연루된 사건일수록 제대로 수사했어야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박정희(1917~1979) 대통령이 경축사를 읽던 순간 객석에서 총성이 울렸다. 쏜 사람은 재일동포 문세광(1951~1974)이었다. 그는 첫발을 잘못 쏴 자기 허벅지를 맞혔고, 연단으로 달려가며 여러 발을 더 쐈다. 박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몸을 피했지만 총탄 한 발이 육영수(1925~1974) 여사의 머리에 맞았다. 육 여사는 수술을 받았으나 그날 저녁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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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단원이던 여고생 장봉화(17)도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 학생은 문세광의 총탄이 아니라 그를 향해 응사한 경호실 쪽 총탄에 맞은 것으로 후속자료에서 확인된다. 당시 검찰 기소내용과 뒤의 조사·보도가 엇갈리는 대목이다. 저격은 몇 분 만에 끝났다. 진짜 놀라운 속도는 그다음부터였다.

 

문세광(나무위키)

말문을 연 사람, 김기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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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문세광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신직수(1927~2001) 중앙정보부장의 법률보좌관으로 파견된 서른다섯 살 검사 김기춘(1939~ )이 직접 신문했다. 특별수사본부장은 김일두였다. 김기춘은 중정부장의 지시를 받아 문세광을 조사한 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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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은 문세광에게 프레더릭 포사이스(Frederick Forsyth, 1938~2025)의 소설 『자칼의 날』을 읽었느냐고 물었고, 영웅심을 자극해 진술을 끌어냈다고 회고했다.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프랑스 대통령을 노린 가상의 암살자를 다룬 소설이다. 그러나 당시 수사본부의 초기 발표에도 이미 문세광의 진술이 있어, 이 대화가 모든 진술의 출발점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확인되는 사실은 김기춘이 직접 신문했고 그렇게 회고했다는 데까지다.

 

1975년 11월 22일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대해 언론에 직접 브리핑을 하는 김기춘 당시 중앙정보부 공안수사국장. 이 사건으로 간첩으로 몰렸던 유학생들은 40여년 만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는다. 유신시대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이다. ⓒ 뉴스타파

127일 만에 끝난 재판, 형 확정 사흘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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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특별수사본부는 문세광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일본경찰은 권총절도 등은 확인했지만 조총련과의 연계를 입증할 증거는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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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숨 돌릴 틈이 없었다. 9월 12일 기소, 10월 7일 첫 공판, 10월 19일 1심 사형 선고, 11월 20일 항소기각, 12월 17일 대법원 상고기각, 12월 20일 사형집행. 사건부터 사형 집행까지 127일이었고, 형이 확정된 지 사흘 만이었다. 민원서류 한 장에 몇 달씩 걸리던 시대에 한 청년을 교수대로 보내는 행정만은 번개 같았다.

 

1972년 4월 23일 도쿄 시부야 야마테교회에서 열린 한청 주최 4ㆍ19 혁명 12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던 문세광(나무위키)

일본이 손을 내밀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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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김기춘의 미공개 회고록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이 보도됐다. 2009년에 쓰였지만 정식 출판 없이 일부 지인에게만 배포됐다고 한다. 여기에 일본의 공동수사 제안이 나온다. 문세광이 권총을 훔친 오사카 파출소에서 여러 사람의 흔적이 발견돼 공범 가능성이 제기되자, 일본이 검사와 수사관을 한국에 보내 함께 수사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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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은 반대했다. 이유는 둘이었다. 하나는 한국이 재판권을 가진 사건에 외국수사관이 참여하는 것은 수사주권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미 받은 자백이 일본수사관의 직접신문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우려였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신직수는 처음엔 제안을 받아들이려다 그의 의견을 따랐고, 김기춘은 주일대사에게 전화해 거절하게 했다. 진술이 사실이라면 어느 기관이 물어도 같은 답이 나와야 한다. 왜 다른 기관의 확인을 막아야 했을까.

 

1974년 7월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의 명의로 발급한 문세광 여권 사진(나무위키)

자백은 하나인데 결론은 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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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결론은 북한과 조총련 배후설이었다. 일본은 문세광의 일본 내 행적을 조사하고도 조총련 연계의 증거를 찾지 못해 단독범행 쪽에 무게를 두었다. 일본의 결론이 곧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당시 한국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사실로 확정할 수도 없다. 분명한 것은 두 나라의 결론이 달랐다는 점, 그 차이를 좁힐 수 있었을지 모를 공동수사가 제안됐으나 성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은 사람이 훗날 스스로 회고했다.

 

제압 직전 단상을 저격하는 문세광(나무위키)

첩보에는 느렸고 사형에는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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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본부 발표에 따르면 문세광은 일본인 지인 명의로 여권을 만들고, 훔친 권총을 트랜지스터 라디오 케이스에 숨겨 8월 6일 김포공항으로 들어왔다. 사건 당일까지 열흘 가까이 서울에 머물렀다. 사전에 저격첩보가 있었다는 의혹도 2005년 공개된 외교문서 등을 통해 다시 제기됐다. 막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처벌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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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그해 12월 20일 교수대에서 생을 마쳤다. 다른 한 사람은 이듬해 9월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 됐다. 김기춘은 이후 유신체제의 주요 공안수사를 이끌었고,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거쳐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비서실장까지 지냈다.

 

1974년 8월 24일 구속 송치되는 문세광(나무위키)

빨리 닫은 사건은 늦게까지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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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광이 총을 쏜 것도, 육영수가 그 총격으로 숨진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 공범이 있었는가, 북한이나 조총련의 조직적 지시가 있었는가, 권총을 든 사람이 어떻게 김포공항을 통과했는가, 저격첩보는 왜 작동하지 않았는가, 한국과 일본의 수사결과는 왜 달랐는가. 이 질문들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답을 얻지 못했다. 새로 나온 회고록은 그중 하나에 자료를 보탰지만, 회고록은 법정기록이 아니라 한 사람의 기억과 해석이다. 그래서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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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연루된 사건일수록 수사는 빨리 끝내기보다 제대로 끝내야 한다. 반대증언을 기록하고, 불편한 질문을 남겨두고, 외국 수사기관의 확인도 받아야 한다. 문세광의 총성은 그날 끝났다. 국가가 왜 그렇게 서둘렀는지를 묻는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1974년 11월 13일 2심 재판 중 문세광(나무위키)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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