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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은 민족의 시중꾼이었다”

최초 대남 밀사 황태성 50주기 추모식 열려

이계환 기자 | k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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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2.09 03:2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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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대남 밀사 황태성 50주기 추모식이 8일 고인의 묘가 있는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청상리 소재 선산 중턱에서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황태성은 민족의 진정한 시중꾼이었다.”

최초 대남 밀사 황태성 50주기 추모식이 8일 고인의 묘가 있는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청상리 소재 선산 중턱에서 열렸다.

북한에서 무역성 차관을 지낸 황태성은 1961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친형이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장인이 되는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이며 동지 관계였다. 또한 박정희는 황태성을 박상희 못지 않게 따랐다. 그런데 해방정국 속에서 일어났던 대구 10.1사건 때 박상희는 경찰에 사살되었고 황태성은 도피차 월북했다.

이런 관계로 황태성은 박정희 의장이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자 박 의장을 만나 통일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그해 8월 말 대남 밀사로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잠입했다. 결국 황태성은 중앙정보부에 검거됐고 박정희를 만나지 못한 채 50년 전인 1963년 12월 14일, 그러니까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간첩죄로 사형을 받는다.

이날 참배는 황태성의 조카사위인 권상릉 씨의 주도로 이뤄졌다. 권상릉 씨의 부인으로 황태성의 조카딸이 되는 임미정 씨는 이날 건강상의 이유로 참여하지 못했다. 권상릉, 임미정 부부는 50년 전 총살형을 당한 황태성의 유골을 보관해 두다가 1964년 한식날에 이곳 선산에다 안치했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서울에서 상주로 향한 참배객들은 상주 현지에서 전성도 전 전농 사무총장과 해후해 그의 안내를 받으며 묘로 향했다. 참배객들은 권상릉 씨를 비롯해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전명혁 역사학연구소 소장 그리고 이창훈 4.9평화통일재단 사료실장 등이다.

 

   
▲ 황태성 묘가 있는 야산 입구에서 참배객들이 감나무 아래에 모였다. 상주는 곶감 국내생산량의 60%를 차지한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야산 입구에서 묘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으나 삽으로 길을 헤치며 가야 할 정도로 힘들었다.

특히 산세가 45도 각도로 경사졌고, 낙엽 진 길을 오르기에는 80세가 넘은 권상릉 씨나 박중기 명예의장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 황태성 묘 오르는 길. 길은 없고 방향만 표시하는 리본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묘로 오르는 길이 없이 다만 방향만을 표시하는 리본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글씨는 다 지워진 채 ‘황태성 선생 묘 가는 길’이란 흔적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이날 간략히 치러진 추모식에서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는 “황태성 선생을 직접 뵌 적은 없다”면서도 많은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것 같다며 이같이 대남 밀사 황태성을 ‘민족의 시중꾼’으로 평했다.

권 대표는 “황 선생은 심부름꾼이 아닌 시중꾼이었다”고는 “시키는 대로 일하는 심부름꾼이 아니라 스스로 일을 찾고 만들어 나가는 그런 시중꾼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날 추모식은 참배객이 많지 않은 관계로 참석자 모두가 절을 하고는 한마디씩 추모의 말을 하면서 진행됐다.

박중기 명예의장은 “황태성 선생은 반세기 전 통일을 위해 사지를 찾아 나섰다”고는 “그런데 성과 없이 여러 가지 화제만 뿌리고 독재자의 정권 연장에 구실만 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며 황태성이 밀사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박 명예의장은 “정치가 황 선생이 죽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는 “역사가 잘못된 기초 위에 서서 그렇다. 그래도 민중들이 역사를 바로 잡으려고 다시 일어서고 있다”며 최근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사건에 대한 촛불집회에 의미를 부여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조사관으로 황태성 사건을 다뤘던 전명혁 역사학연구소 소장은 진실화해위에서 황태성 사건을 진지하게 파헤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면서 “이 사건은 진실이 밝혀져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권상릉, 임미정 부부는 지난 2006년 11월 진실화해위에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내용을 접수한 바 있다.

 

   
▲ 황태성 추모식 후 참배객들이 묘 앞에 모였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한편, 조촐한 추모식 후 권상릉 씨와 참배객들은 주변의 묘를 둘러보았다.

황태성은 3남2녀 중 장남이다. 이 야산이 황태성 집안의 선산이어서인지 주변에는 차남 황태형, 삼남 황삼용의 묘가 있었다.

권상릉 씨는 황태형 묘 앞에서 “둘째 황태형 씨는 겁이 많아서인지 형이 구속됐는데도 면회를 가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또한 삼남 황삼용 묘 앞에서는 “막내 동생은 일본에서 성악을 배웠으며 경기여중 선생을 한 아주 음악적 조예가 깊었다”고 회고했다.

일정을 마친 참배객들은 전성도 전 사무총장이 운영하는 상주곶감 건조 공장을 견학한 후 그의 집에 들러 늦은 점심을 하고 서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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