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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은 그렇게 암매장꾼으로 몰렸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의 유가족인 윤근(67·왼쪽부터), 전재영(53), 황명애(57)씨가 지난 1일 오후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를 찾았다.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이 유골이 안장된 부지 근처다.

[토요판] 커버스토리
세월호 수습 책임자 중 한명인 강병규 장관
대구지하철 참사 수습 책임자일 때 생긴 일

대구지하철 참사의 유가족들은 유골을 암매장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2년 넘게 재판을 받았다. 재난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 어쩌다 그런 의혹까지 받게 됐을까. 유족들은 공교롭게도 재난 컨트롤타워인 안전행정부의 수장 강병규 장관이 대구시 행정부시장 재직 당시(2005년 3월~2006년 8월)를 문제삼는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겨레>가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대구지하철참사의 사후 처리 과정은 우리 사회에 여러 숙제를 던져준다. 우리는 재난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재난 이후에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 대구지하철이 세월호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래픽은 대구시 동구 시민안전테마파크에 전시된 2003년 2월 불탄 전동차 1079호를 배경으로 강 장관의 사진을 합성한 것이다. 취재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사진 연합뉴스·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 세월호 침몰 참사를 겪으며 많은 이들이 “추모하겠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말로 그렇게 해왔을까요.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과거 재난을 우리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해왔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대구지하철 참사의 피해자들이 지난 11년간 살아온 이야기는 어찌 보면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대구의 명산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서는 매년 2월18일만 되면 격앙된 목소리들이 뒤엉킨다. 2010년부터 5년째 이 공원으로 참배를 하러 온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의 유가족들과 인근 상인들이 대치했다. 올해 2월18일도 다르지 않았다. 양쪽 사이에선 고성이 오가며 몸싸움이 벌어졌고, 한편에는 가져온 꽃을 땅에 떨구며 흐느끼는 유가족도 있었다. 상인들은 왜 참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참배를 막아섰던 걸까.

 

이곳 상인들은 유가족들이 공원에 유골을 ‘암매장’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근 식당을 운영하는 지윤환씨는 지난 1일 저녁 <한겨레>와 만나 “유가족들의 애통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유골을 암매장한 것까지 받아들일 순 없다. 대구시는 애초 공원이 조성될 때 유골과 위령탑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고 말했다.

 

2003년 2월18일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화재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규모가 큰 지하철 참사였다. 무려 192명이 숨지고, 146명이 다쳤다. 화재는 한 방화범에게서 시작됐지만, 피해가 커진 이유는 누적된 안전불감증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피해가 발생한 1080호 전동차는 1079호 전동차가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중앙로역에 들어섰다. 승객들은 옆에 정차한 전동차가 불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라는 안내방송을 믿고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결국 차는 출발하지 않았고, 안내방송을 한 기관사는 지하철의 출입문을 조작할 수 있는 마스컨키(Master Control Key)를 뽑은 채 도망쳤다. 사망자 대부분이 전동차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화염 속에서 숨졌다. 이 어처구니없는 대참사로 인해 11년 전 대한민국에선 최근 세월호 침몰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 192명의 희생자 중 32명의 유골이 작은 상자에 담겨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안전 상징 조형물 인근에 묻혔다. 불과 가로 1m, 세로 1m의 구덩이 2곳에 32명의 유골이 담겼다. 2009년 10월27일 새벽 3시의 일이다. 하지만 이 공원엔 피해자들의 영령이 안치됐다는 안내문이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참사 희생자들의 유골은 왜 그 공원에 묻혔을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왜 ‘남몰래’ 공원에 유골을 묻었고, 어쩌다 ‘암매장’을 했다는 비판마저 받게 됐을까. 이 의문들을 풀기 위해 유가족들과 대구시가 지난 11년간 주고받은 서류와 대화 녹취록을 입수해 분석했다.

 

 

희생자 192명 중 32명 유골 묻힌 
팔공산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영령 안치됐다는 안내문은 없다 
유족들은 왜 남몰래 묻었을까 
어쩌다 ‘암매장’ 논란이 생겼나 

2005년 11월 강병규 행정부시장과 
서명한 합의문이 논란 불씨 돼 
희생자 대책위 쪽은 대구시 쪽이 
‘수목장’ 이면합의 요구했다 주장 
대구시는 그런 사실 없다고 부인 

 

 

유가족과 대구시 사이 대화 녹취록 입수

 

11년 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딸을 잃은 황명애(57)씨는 유골을 대구시 동구의 시민안전테마파크에 묻었던 2010년 10월27일의 새벽을 또렷이 기억했다. 황씨를 지난 1일 오전 대구시 중구의 희생자 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32명의 희생자 가족들이 다 모이다 보니 사람 수가 꽤 많았어요. 42인승 버스를 하나 빌렸고, 자가용을 끌고 오는 사람들도 많았죠. 그 인원이 남들 자는 새벽 3시에 모여 가족들 유골을 옮기는 모습이 기이했죠. 우리가 무슨 죄를 지은 사람들도 아닌데 말이죠.”

 

유골 이장은 마치 군사작전처럼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됐다. 유족들은 ‘대구시립 추모의 집’이나 영남불교대학에 안치됐던 유골 골분을 꺼내 새벽에 시민안전테마파크로 옮겼고,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넣은 뒤 흙으로 덮었다. 하지만 1년 뒤인 2010년 10월 대구시청의 기자실에 출처를 알 수 없는 한 투서가 나돌았다. ‘대구지하철 참사의 유가족들이 유골을 암매장했다’는 내용이었다. 암매장 논란이 불거지자 대구시는 ‘암매장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대구지검에 수사 의뢰했다. 사건을 수사한 대구지검은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 대책위의 윤석기 위원장과 황순오 전 사무국장을 ‘유골 암매장’ 혐의로 기소했다. 처음에 검찰은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했으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자연공원법’ 위반으로 공소장을 변경했다. 윤 위원장과 황 전 사무국장은 1심에서 벌금형을 받았으나, 2심과 대법원 최종 판결에선 무죄를 받았다. 2년이 넘는 법적 공방 끝에 윤 위원장이 지난해 9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황 전 사무국장은 올해 1월에 최종 법률적 판단을 받았다. 법원은 “자연장지 조성행위는 자연공원의 외관에 실질적 변경을 초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하지만 당시 법원의 판단은 또다른 오해를 낳았다. 이른바 ‘나쁜 짓을 한 것은 맞는데 처벌할 법규가 없어서 못 했다’는 것이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이는 법적으로 확정된 결론이 아니다.

 

당시 1심 재판에 불복한 피고(희생자 대책위) 쪽이 항소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무죄판결을 받은 사유인 ‘사실오인’으로 자연장 조성이 공원시설을 실질적으로 훼손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사유는 ‘법리오해’로 피고인은 대구시와의 이면합의에 따라 자연장 조성을 추진했으므로 형법 20조의 정당행위로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의 사실오인 주장은 이유 있으므로, 피고인의 법리오해 주장에 관하여 판단할 필요 없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즉, 유족들이 남의 땅인 시유지에 무단으로 암매장을 했는지, 아니면 대구시와 이면합의가 있었는지 여부가 법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셈이다. <한겨레>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법원이 살펴보지 않은 ‘이면합의의 존재 여부’다.

 

대형 참사의 유가족들이 ‘암매장’을 했다는 의혹을 사고, 이로 인해 재판까지 받게 된 상황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유골을 시민안전테마파크에 묻은 유가족들은 한목소리로 2005년 11월22일 대구시와 희생자 대책위가 작성한 합의문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한겨레>는 2일 대구시를 찾아 해당 합의문의 사본을 입수했다. 이 합의문엔 ‘추모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추모관(유골)은 사업에서 제외하고, 위령탑 대신 안전과 추모를 상징할 수 있는 조형물을 설치한다’고 적혀 있다. 합의문에 서명한 사람은 당시 대구시 행정부시장이던 강병규 현 안전행정부 장관과 윤석기 희생자 대책위 위원장이다. 공교롭게도 청와대가 재난 컨트롤타워라고 지목한 안전행정부의 장관이 2005년 당시 대구지하철 참사의 수습을 맡았다. 강 장관은 세월호 사고 수습 초기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을 맡았다가 구조자 수와 구조·수색 작업에 대한 잘못된 브리핑으로 실종자 가족의 원성을 산 바 있다. 윤석기 위원장은 “당시 행정부시장이었던 강병규 장관과 실무를 맡은 공무원들이 줄기차게 이면합의를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즉, ‘외부엔 추모관, 묘역, 위령탑 등이 없이 추모사업을 한다고 발표하도록 종용했지만 실제론 유족들의 요구대로 추모묘역 조성, 위령탑 건립 등을 해주겠다’고 대구시가 제안했다는 것이다.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 있는 탑이다. 대구시는 ‘안전 상징 조형물’로, 유가족은 ‘위령탑’으로 부른다. 대구시 공무원의 표현으로는 ‘위령탑이지만, 이름은 위령탑이 아닌 탑’이다.

이면합의 제안, 유족 설득에 애먹어

 

지난 1일 오후 대구시 중구의 한 찻집에서 만난 황순오 전 희생자 대책위 사무국장은 2005년 당시의 논의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추모공원 조성사업이 2년째 지지부진한 상태였어요. 처음 부지로 결정된 대구시 중구의 수창공원은 인근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로 사업을 접었고, 그 이후로 후보지로 선정된 수성구의 천주교묘역, 달성군 화원유원지 등에서도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죠. 추모시설은 혐오시설이라는 거예요. 특히 해당 지역의 시의원, 구의원들이 사람들을 모아 조직적으로 반대했어요. 대구시 공무원은 중앙정부에서 추모사업을 지원하는 국비 100억원이 2005년이 지나면 반납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사업을 더 늦출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유가족들도 마음이 급했습니다.”

 

결국 “공식적인 합의문에 사인하고, 같이 언론에 나와 발표하며 사진을 찍으면 이면으로 합의한 수목장과 위령탑 건립을 들어주겠다는 대구시의 말을 믿었다”는 것이 협상을 진행한 황 전 국장의 전언이다. 윤 위원장은 “강병규 장관의 전임이던 조기현 전 대구시 행정부시장도 추모묘역이나 위령탑 등이 실제론 들어가지만 합의문에는 빼야 추모사업이 수월해진다고 여러 차례 권유했다”고 밝혔다.

 

실제 강병규 장관은 유족들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윤 위원장의 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2005년 10월26일 강 장관과 희생자 대책위 간의 대화 녹취록을 보면, 강 장관은 “내부적으로 법 절차는 우리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군다나 실무자가 좀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하겠다) … 지역 주민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돼서 뭐 괜찮겠다 하면은 그다음부터 구체적인 절차 밟아서 나가는 거니까 그거는 별로 어려움이 없을 거고, 내부적인 어려움은 아까 말씀드린 공원법 문제라든지…”라고 말했다. 강 장관은 이 ‘공원법’ 문제에 대해 지난 8일 “공원법 문제는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위령탑과 납골당 등이 공원에 들어가는 문제였던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혀왔다. 보다 구체적인 정황은 실무자들의 입에서 나온다. 황 전 국장은 강병규 장관을 가리켜 “우리와 했던 이면합의를 지키지 않아 유족들은 큰 상처를 받았다. 무책임한 공무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 전 국장은 시청의 이면합의 제안이 추모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불가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족들을 설득하는 데는 애를 먹었다. 당시 상황은 2005년 11월3일 대책위 사무실에서 이뤄진 대화 녹취록에 자세히 나온다. 황 전 국장이 “이거는 대외로 나가는 합의문이고요. 그래서 실질적인 게 아니죠. 실질적인 건 수림장과 플러스”라고 유가족들에게 설명한다. 이 설명에 유가족들은 거세게 항의한다. 윤 위원장은 “차후에 대구시나 소방본부가 ‘유골 그거 빼기로 했지 않느냐’고 하지 않겠느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문제제기하고, 황명애씨는 “그러면 밤중에 살짜기 몰래 가가 거기 (유골을) 갖다놓을 꺼 아닙니까 … 그때는 그 주민들이 가만있겠느냐. 진짜로 난리 치지”라며 지금의 상황을 예견하기도 했다. 다른 유가족은 “눈 감고 아웅 하는 거고, 하다못해 주민들 만나가지고 직접 발표하고 설득하는 게 맞는 부분이지, 이건 아니지”라고 말했다. 이에 황 전 국장은 “저는 이렇게 해야지만이 우리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제 나름대로 생각이 됐습니다”라고 밝혔다.

 

결국 유가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대구시에서 추모사업의 실무를 맡았던 정아무개 대구시 소방본부 계장이 2005년 11월14일 대책위 사무실로 찾아온다. 이 당시의 대화 녹취록을 보면, 한 유가족이 “황순오(사무국장)씨가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지만도, 대책위원들이 다소 수긍은 하지만도 그동안에 대구시하고 (일을) 하면서 많이 속고 이래놨더니, 마음이 탁 와닿지 않은 것 같아요”라고 운을 뗀다. 이 말에 정씨는 자신도 조직 내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토로한다. 그는 “그래 저도 사실상 (소방본부) 국장님하고는 커뮤니케이션이 많이 됐는데 (대구)시에는 이때까지 시장님이나 (건설방재국) 국장님하고 확 와닿게는 못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가지고 저희는 다 해소가 됐습니다. 부시장님까지는 제가 직접 가가지고 보고를 다 드렸고요. 부시장님도 ‘아 이 정도면 시의 도리로 맞다. 됐다’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부시장이던 강병규 장관에게 직접 보고하고 승낙을 받았다는 의미다.

 

강 장관도 2005년 10월26일 대화에서 ‘실무를 맡은 소방본부에서 수시로 보고를 받고 있다’고 밝혔고, 대구시 소방본부가 정리한 문건을 보면 강 장관은 2005년 11월14일 “소방본부의 입장이 부시장인 나의 입장이다. 앞으로 시민안전테마파크와 관련해 유가족들의 의견이나 요청 사항이 있으면 소방본부와 협의해 나가면 된다”고 밝혔다.

 

 

“제가 볼 땐 이거 사기거든요 
이거야말로 이율배반적인 거고 
시민 데리고 장난치는 거고” 
이면합의에 대한 유가족 우려에 
대구시에선 책임지겠다고 약속 

결국 대구시-대책위 논의 속에 
수목장 실행했다고 대책위 주장 
부지 지역 원로들의 묵인 얻고 
공원에선 CCTV 각도까지 돌려줘 
대구시는 계속 책임 없다고 주장 

 

 

권영세 부시장 “나는 모르는 걸로 해라”

 

이후 정씨는 유족들의 우려를 충분히 듣고 설명한다. 한 유족이 “우리가 대다수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뭐냐 카면은, 우리가 굳이 잘못도 아니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비공개를 하고 속이면서 이렇게 해야 되느냐, 이거예요”라고 따졌다. 이에 정씨는 “그래밖에 할 수가 없는 게 또 저희 입장입니다”라며 고충을 토로한다. 그러면서 그는 위령탑 건립과 수목장 조성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윤 위원장은 “대구시가 지금까지 불성실이건 아니면 의도적인 태만이든 간에 약속 이행을 잘 안 해왔는데, 과연 지금 대외적인 표현 따로 하고, 실제로 어떤 진행하는 부분 따로 하는 게, 제가 볼 땐 (이거) 사기거든요. 이거야말로 이율배반적인 거고 시민 데리고 장난치는 거지 … 내용을 담보해낼 수 있는 방법이 뭐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때 정씨의 대답이 참사 유가족들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다. 정씨는 당시 “시가 예전에 그리했지 않느냐? 이카면 저희는 할 말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 소방본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 뭐 담보를 해줄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저희가 확답을 할 순 없지만, 저희는 불을 끌 때 목숨을 걸고 끕니다”라고 답했다. 목숨을 걸고서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였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008년 12월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가 개장되고서도 위령탑 건립, 수목장 조성 등은 지지부진했다. 희생자 대책위 관계자들은 2009년 7월1일 대구시 행정부시장실을 찾았다. 이때 부시장은 권영세 현 안동시장이다. 2005년 당시 실무자였던 소방본부의 정 과장도 이날 동석했다. 이날 유가족들이 이전의 합의 내용에 대해 따져 묻자, 정씨는 “그때 그렇게 합의된 겁니다. 192구 식재를 하고 거기에 수목장 형태로 원하시는 분들이 하는 걸로”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가족이 “부시장님은 어떻게 알고 계시죠?”라고 묻자, 권 당시 부시장은 “희생자 수가 그래 192그루고, 난 그런 의미로 받아서 전부 다 했는 걸로 보고 나중에 추후에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수목장은 여러 가지 법률상 저촉이 되기 때문에 나는 모르는 거로 해라 그 이야기 했지예”라고 말했다. 즉, 새로 온 권 부시장도 수목장에 대해 알고 있지만 법률 위반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은 모르는 것’으로 했다는 의미다.

 

추모사업을 둘러싼 유족들과 대구시의 대립은 2009년 7월17일 극적으로 해소된다. 권영세 당시 행정부시장이 “내 앞에 부시장 하던 강병규 차관(당시 행정안전부 차관)한테 확인을 해보니, 본인이 저거는 이야기하더라. 유족사무실 해주기로 했다고… 우리가 유족 측의 주장을 다 묵살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을 것인지 한번 절충을 해보자”고 손을 내밀었다.

 

이때부터 대구시와 대책위가 긴밀하게 논의를 진행해 수목장을 실행했다는 것이 대책위 쪽의 주장이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황 전 사무국장은 “시청의 국장들과 부시장, 테마파크의 관장 등과 긴밀히 논의했고, 지역 주민들을 설득했다. 특히 지역의 원로들이 ‘공개적으로 유골을 들고 온다면 찬성할 사람은 없지만 몰래 묻고 가는 것은 괜찮다’는 의견을 피력하자, 이에 맞춰 수목장을 실시할 계획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윤 위원장은 “테마파크의 관장조차 유골을 안치하던 새벽 시간에 공원 시시티브이(CCTV)의 각도를 돌려 수목장을 하는 것을 찍지 않겠다며 우리 계획에 협조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구시는 “수목장은 유족들이 임의로 진행한 것으로 시청과는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면합의가 언급된 대화 내용에 대해서도 대구시는 “당시 부시장 주재하에 희생자 대책위와 소방안전본부의 대화 과정에서 녹취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면합의를 인정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세월호 수습 전념한다며 답변 피한 강 장관

 

강병규 장관은 8일 대구지하철 참사 추모사업에 대해 “이면합의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2그루 수목장과 위령탑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보고받은 바가 없다”고 <한겨레>에 알려 왔다. 대구시에서 실무를 맡았던 정아무개 소방본부 담당계장 역시 지난 1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추모사업 일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이들의 회피 속에 대구지하철 참사의 유가족들은 가족의 유골을 암매장한 ‘이상한 사람들’이 돼버렸다.

 

대구지하철 참사의 피해자들은 지난 11년간 지속적인 2차, 3차 피해에 노출돼왔다. 참사 초기 실종자 가족들은 사고 현장에 군 병력까지 동원해 물청소를 하는 대구시의 행태에 분노했다. 전재영 희생자 대책위 사무국장은 “나는 원래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초기엔 대책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골과 유품을 잘 정리한 뒤 청소했다는 당국의 발표와는 달리 쓰레기 더미에서 시신과 유품 등을 찾았을 때 ‘정부를 믿으면 안 되겠다’라고 처음 생각했다. 그 이후론 계속 믿을 수 없는 모습들뿐”이라고 말했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지하철 참사 피해자들이 주최하는 추모식에 매년 불참해왔다. 대구시 쪽의 입장은 “피해자들의 단체가 서너개로 분열돼 어느 곳에 참여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대구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은 김 시장과는 달리 대구지하철 참사 추모식에 종종 참석해왔다. 2009년 6주기 추모식에 참석했을 때, 희생자 대책위원들은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에게 추모사업의 추진에 신경을 써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전재영 사무국장은 “그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추모사업의 어려움을 얘기하니까, 옆에 있는 서상기 의원을 소개하며 ‘이 사람에게 얘기하라. 그러면 해결해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여당의 대구시당위원장이던 서 의원의 사무실에 관련 자료를 보내며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11년 동안 지치지 않았을까. 황명애씨의 감정은 복잡했다.

 

“요즘은 그냥 편안하게 아이를 애도하고 싶단 생각도 들어요. 사실 우리 대부분은 공동묘역에 안장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유가족들 상당수가 선산이 있고, 친지들 모신 가족묘역도 있어요. 그럼에도 희생자 공동묘역에 안장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다시는 이런 참사가 발생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싶어서였어요. 내 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죠.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우리가 가족의 유골을 암매장하는 이상한 사람이 돼버렸어요. 딸이 살아 있었으면 지금쯤 대학 졸업하고 시집 가서 아이를 낳았을 거예요. 그동안 날 지켜봤을 딸을 생각해서라도 이 싸움을 멈출 수가 없어요.”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구호가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였다. 많은 이들이 황망하게 잃은 생명을 애도했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했던 대구지하철 참사에 대한 관심은 금세 가라앉았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그 어떤 위령탑도, 그 어떤 추모시설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만 범위를 넓혀보면 다른 대형 참사도 마찬가지다. 삼풍백화점 터엔 과거 이곳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리는 그 어떤 시설물도 없이 반짝이는 주상복합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다.

 

강병규 장관에게 “희생자에 대한 추모, 재난 대응에 대한 반성 등이 유가족들의 요구가 있어야만 하는 일인지 궁금하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의 사후 대처, 추모 계획 등에 대해 정해진 것이 있는지, 어떤 원칙을 가지고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도록 할 것인지”를 물었다. 답변은 “현재 세월호 사고 수습에 전념을 다하고 있는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지 않으며 추후 기회가 된다면 말하겠다”였다.

 

우리는 과연 사회가 낳은 큰 재난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11년 전 중앙로역에서 멈춘 대구지하철이 세월호에게 묻고 있다.

 

대구/글·사진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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