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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아서 죄송합니다" 단원고 생존학생 아버지의 눈물

 

[편지 전문] 1980년 오월 광주 이후 가장 슬픈 도시, 안산14.05.13 21:05l최종 업데이트 14.05.14 10:24l이선옥(okyunjuya)내게는 '유서'라는 폴더가 있다. 두산중공업의 배달호, 한진중공업의 김주익, 그리고 2012년 최강서의 유서까지. 수없이 많이 읽었는데도 볼 때마다 눈물 없인 읽을 수가 없는 유서들이다. 

김주익의 유서를 읽을 때면 어김없이 장례식장에서 울던 아저씨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닳아빠진 작업복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으며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울던 아저씨들. 지금까지 중년의 남자들이 그렇게 슬피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우는 아저씨들 모습은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다. 속울음으로 삼키느라 아무리 애를 써도 터져 나오던 그런 울음들. 

도저히 울지 않고는 견뎌낼 수 없는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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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희생자 추모와 진실을 밝히는 국민촛불행동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안산문화광장에서 학생,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세월호 희생자 추모와 진실을 밝히는 국민촛불행동'이 열렸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의 생전 모습이 모니터에 비치자 참가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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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이 지난 오늘, 다시 그런 눈물을 본다. 지난 5월 10일, 안산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울었다. 내 곁에 서 있던 이름 모를 아저씨들도 모두 어깨를 들썩이고 소매를 훔치며 울었다. 도저히 울지 않고는 견뎌낼 수 없는 시간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지금까지 제대로 글 한 줄을 쓰지 못했다. 웃는 순간에도,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살면서도 내상을 입은 듯 슬픔에 압도되어 살고 있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네"하고 천진하게 대답하던 아이들. 

죽음을 예견한 순간, 꼭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온 언니를 찾고, 엄마아빠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죽어간 아이들. 선생님의 구명조끼를 걱정하고, 서로의 무사를 빌며 사랑의 말을 전하던 아이들. 그러다 끝내 가만히 있으라는 말 그대로 가만히 웅크린 채 주검으로 발견된 아이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4월 16일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나라라 해도 그 이전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 

어느 누구도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위정자들의 나라. 살아남은 아이와 부모들이 죄인이 되어 미안하다 하고, 아무런 잘못 없는 부모들이 못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한 죄를 곱씹으며 가슴을 치는 나라. 

아들에게 처음으로 쓴 편지가 '조사'가 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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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희생자 추모와 진실을 밝히는 국민촛불행동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안산문화광장에서 학생,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세월호 희생자 추모와 진실을 밝히는 국민촛불행동'이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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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0일, 안산은 슬픔으로 뒤덮였다. 태어나 아들인 수현이에게 처음으로 쓰는 편지가 '조사'가 되어 버린 아버지는 거짓만을 말하는 언론을 보며 "이 세상의 모든 전파를 없애고 싶다"고 절규했다. 

생존의 희망은 버린 채 그저 시신이라도 건지길 바랐던 동혁이의 엄마는 "자는 듯이 이쁜 모습으로 부모님 품에 돌아와 줘서 너무 고맙다"고, 아들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그랬듯 자기도 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고, "동혁아 사랑한다"며 목 놓아 울었다. 살아남아 죄인이 된 애진이의 아버지는 "부모들도 아이들도, 살아서 너무 힘들다"며 고개를 떨구고 울먹였다.

공부 대신 좋아하는 수영이라도 가르쳤다면 그곳(바다)에서 그렇게 떨진 않았을 텐데,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고 당부하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그렇게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을 텐데, 우리가 돈 있고 힘 있는 강남의 상류층 부모였더라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을 텐데….

아이한테 그러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렇게 해줬더라면 하는 후회가 수백 가지는 넘고도 남을 부모들의 회한은 세월호를 삼켜 버린 바다보다도 더 깊게 안산을 짓누르고 있었다. 

안산만의 슬픔이 되지 않기를 

지금 안산은 2014년 4월 16일에서 시간이 멈췄다. 1980년 5월의 광주 이후 가장 슬픈 도시가 되었다. 광주처럼 총칼로 인한 죽음은 아닐지라도 위정자들로 인해 죄 없는 시민들이 죽어갔고, 마을공동체가 죽음으로 파괴되었으며, 혼자 고립될 위험에 놓여 있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살아남은 사람은 죄인이 되어 가슴을 치고 있는 상황도 같다. 

수많은 세월 동안의 비리와 부패와 무능과 탐욕이 추악하게 얽혀 마침내 진도 앞바다에서 터져버린 사건. 잔인한 운명으로 하필 그 밤 그 배에 올랐던 가여운 사람들. 진짜 죄인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어쩌면 사는 동안 내내 그들이 저지른 비리와 부정과 탐욕의 피해자였던 이들만 제물로 바쳐졌다. 바다는 어쩌자고 이토록 비정한지…. 

안산 문화의 광장 한편에는 노란 쪽지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친구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간절함이었다가, 이제는 그리움과 미안함, 분노와 슬픔으로 바뀐 편지들이다. 어느 것 하나 슬프지 않은 것이 없어 모두 그 앞에서 눈물짓고 섰다.  

"수진아, 다음 생에도 내 친구 해줘." 

먼저 떠난 친구에게 보내는 열여덟 천진한 아이의 한 마디에 가슴이 미어진다. 다음 생에는 부디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지 말기를. 죽는 날까지 안전하고 행복하게 너희를 보호해 주는 나라에 태어나 부디 끝까지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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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분향소에 놓인 단원고 학생 영정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안산문화광장에서 희생자 추모와 진실규명을 위한 '국민촛불 켜기'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시민분향소에 학생 희생자들의 캐리커쳐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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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 안산의 추모제에서 단원고 2학년 고 박수현, 김동혁군의 부모님과, 생존자 애진양의 아버지가 전하는 편지들의 전문을 싣는다. 또박또박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울고 또 울었다.

세상 어떤 비극보다도 슬프고, 세상 어떤 구호보다도 선동적인 분노가 담긴 이 편지들을 새 폴더에 담아둔다. 무뎌지지 않도록, 비겁하지 않도록, 나약해지지 않도록 들여다 볼 것이다. 

바다 속으로 하염없이 가라앉는 배 속에서 손가락이 부러지고, 손톱이 뭉개지도록 창을 두드리다 참혹하게 죽어간 아이들과 세월호의 수많은 희생자들, 살아남은 죄인이 되어 앞으로 살아갈 시간들이 더 고통일 아이들.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그게 이 거대한 비극을 눈앞에서 함께 겪은 우리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5월 17일, 청계광장에서 이 참사를 잊지 않고 용서하지 않겠다는 시민들이 모인다. 하필 5월이다. 1980년 5월의 그날의 광주처럼 안산만의 슬픔일까봐 우려가 된다. 아직 차가운 바다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스물아홉 명의 실종자가 있고, 평생을 이 고통의 땅에서 살아가야 할 희생자와 생존자의 가족들이 있다. 더 이상 혼자 울게 두어서는 안 된다.

이들과 함께 슬픔을 분노로, 분노를 행동으로. 함께 모이고 실천하자, 무엇이든. 

[전문] 단원고 2-7반 고 박수현군에게 보내는 아버지 박종대씨의 편지 

이 편지는 생존의 희망이 더 이상 없던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희망이란 끈을 놓으면서 하늘로 보내는 애비의 편지>

아들아, 그곳은 무척 춥고 깜깜하겠지? 얼마나 춥고 두려웠겠니. 구조에 의지도 없는 어른들의 황당한 얘기를 듣느라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니. 널 이 못난 땅에 태어나게 한 무능한 애비로서 진심으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본다. 아들아, 처음 애비가 이 사건을 접했을 때 적어도 너에게만큼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확신했고, 최악의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빌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구나.

신보다 더 큰 무엇이 있나 보다. 모두 구출했다고 했다. 그리곤 곧 오보라 했고 다시 전원 구출에 성공했다고 했다. 성공의 요인으로 하늘이 도왔다고 했다. 날씨도 비교적 좋았고 다행히 파도도 높지 않아 가능했다고 했다. 현재는 혹시나 못 구한 생존자가 있는지 선박 구석구석을 수색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애비는 너를 데리고 가려고 이곳 진도에 오게 되었단다. 헌데 희망은 거기까지였다.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 다시 이 세상에서 명랑한 너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구나. 

숫자를 잘못 집계했다고 했다. 섬으로 대피했다가 180명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비교적 똑똑한 공무원 집단에서 숫자 파악도 하지 못한 데서 놀라고, 있지도 않고 곧 탄로 날 사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그들의 만행에 애비는 분노하고 도저히 용서를 할 수 없구나. 

애비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연실색하고 적정한 구조를 하긴 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구조의 의지는 있는지, 확실한 구조계획은 있는지 의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구조진행 속도는 분노의 각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행동, 그리고 부실대책, 부실대응, 늑장대응. 이것이 네가 피지도 못할 꽃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원인이란다. 그래도 그들은 사죄는커녕 언론이라는 큰 입을 가지고 자신들을 오히려 대단한 영웅으로 만들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가증스러움을, 글과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느낀다. 하루 종일 사실에 반한 내용을 가지고 언론을 도배질하는 것을 보면 이 세상 모든 전파를 없애버리고 싶구나.

아들아, 정말로 미안하구나. 진리와 정의가 상실된 이 땅에서 애비가 법과 원칙을 지키는 훌륭한 정치가가 되라고 강요만 하지 않았어도, 수영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네가 적어도 그곳에서 떨진 않았겠지. 무척이나 하고 싶어 했던 음악을 실컷 못하게 해서 미안했다. 애비가 못나서 이렇게 원통하게 가게 해서 미안하다. 아마 이 사건이 강남 등 소위 일류집단에서 일어났다면 대응속도와 방법이 달랐을 것이고 분명 그 결과가 달랐을 것이다. 

아들아 이제는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다. 너와 내가 이별을 해야 하고…(울음) 놓지 못했던 희망의 끈과도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다(울음). 용서하거라… 못난 애비를 용서하고, 믿었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배신을 용서하거라. 숫자도 세지 못하는 공무원을 용서하고 위급 시에도 도대체 움직일 줄 모르는 못난 국가를 용서하거라. 그래야만 네가 좋아하던 치킨과 오렌지만 봐도 목이 메고 눈물이 나는 이 못난 애비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 거 같다.

현재 애비 심정은 저들도 네가 있는 바다에 애원하고 절규할 때까지 빠트려 버리고 싶다(울음). 부디 저 세상에서는 이 애비와 같은 못난 사람도 만나지 말고, 원망하고 분통 터질 세상도 만나지 말거라.

잘 가거라… 실낱같은 희망이 있던 날에서 끝없는 절망의 순간으로 바뀌던 날, 이 무능하고 못난 애비가 보고 싶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보낸다. 

추신. 그곳에서는 대한민국의 언론을 듣지도 믿지도 말아라. 절대. 

[전문] 단원고 2-4반 고 김동혁군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여기 오기까지 저는 용기 없는 엄마였습니다. 비겁한 엄마였습니다. 여기 와서 용기를 냈습니다. 제 아들이 동영상에서 "엄마아빠 사랑해, 내 동생 어떡하지!"했던 2학년 4반 7번 김동혁의 엄마입니다. 저도 방송에서 제 아들이 그랬듯이(울음) 사랑한다 하고 싶어서(울음) 올라왔습니다. 

<내 아들 김동혁에게>

사랑하는 내 아들 동혁아. 2년 전 세상에 지치고 힘들어하던 네 아빠를 통해 너와 네 동생을 만나 단조롭고 조용하던 엄마의 일상은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어. 외롭고 기댈 가족이 많지 않았던 너에게 외할머니 외삼촌, 이모들이 생기고 든든한 형이 생겨서 너는 아주 뿌듯해하며 우리 가족 모두는 표정부터 달라졌었지. 친구도 많이 없어서 집에만 있던 네가 행복해하는 가족들의 지원 아래 단원고 착한 친구들을 사귀고, 만화 그리기를 하며 친구들과의 수다를 엄마에게 전해줄 때 아빠는 늘 너를 응원하며 진짜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어. 

너랑 함께 먼 길 떠난 너의 제일 친한 친구 순영이, 하용이, 윤수, 종영이, 그리고 그렇게 친하고 싶다 말했던 외국인 친구 슬라바. 모두 잘 지내니?

전원 구조됐다는 보도에 네가 갈아입을 옷을 걱정하며 진도로 떠났던 엄마와 아빠. 하지만 3일 밤낮을 기도만 하던 너의 착한 아빠는 이제 더 이상 생존의 희망보다는 너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을 동분서주했었어.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절차와 날씨와 구조체계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게 아빠의 마음이었어.

23일 새벽 mp3와 함께 나타난 너의 시신을 보며 엄마와 아빠는 또다시 고통하고, 그 순간에도 널 찾은 것이 아직 찾지 못한 부모님들께 너무 죄송했단다. 너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좋은 추억 만들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건강하게 돌아오라'고 말했던 아빠는 입을 찢고 싶은 분노로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

자는 듯이 이쁜 모습으로 부모님 품에 돌아와 줘서 너무 고마워 내 아들…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고통스러웠니… 구조를 믿고 기다렸던 순수했던 너와 그 많은 친구들에게 엄마가 어떡하면 용서를 구할 수 있겠니….

'엄마아빠 사랑해요, 내 동생 어떡하지'라고 마지막(울음) 영상으로 남긴 천사 같은 내 아들아…(울음) 너무 고맙다…(울음) 니가 내 아들이 되어줘서, 그리고 앞으로 평생 단원고 2학년 4반 7번 김동혁의 엄마로 살게 해줘서 너무 감사하다.

용접공으로 20여 년을 묵묵히 살아온 착한 아빠를 자랑스러워했던 너. 동혁아 그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힘을 좀 내줄래. 마지막 한 명까지 친구들 어떤 모습으로든 엄마아빠한테 돌아와 주길 너희들이 좀 도와줘. 

동혁아,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세금을 내고 묵묵히 일터에서 소시민으로 살아왔던 너와 친구들의 엄마아빠가 너희들의 희생이 제발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어. 네 동생이, 그리고 이 땅에 국민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여행 다니고, 마음 놓고 내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이 되기를 멀리서 응원해주길 바래.

내 아들 김동혁, 너가 가장 힘든 시간에(울음)… 너와 함께 있질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울음) 그리고 네가 가장 걱정했던 너의 여동생, 너의 착한 아빠, 꼭 이 새엄마가 지켜줄게. 

동혁아 사랑해….

생존자 장애진양의 아버지 장동원씨가 유가족 부모님들에게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정말 힘들었습니다. 유가족 부모님들 올라오셔서 얘기하시는 거 듣고 도저히 여러분들 만나 뵙지 않으면 이런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올라왔습니다. 

먼저 간 우리 딸의 친구들… 정말 소중한 친구들이었고요… (울음) 지금 남아있는 55명의 우리 아이들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부모님들도 힘들었습니다… 살아서… 힘들었습니다. 아직도 팽목항에서 오지 못하는 부모님들, 그리고 유가족분들, 아이들을 찾기 위해서 희생된 모든 분들 정말 죄송하고 감사드립니다. 

16일 아침에 아니 그 전에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1박2일>이란 걸 보면서 참 배가 좋았고 한 번 타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선택을 했더라고요, 그 배를 타고 싶다고. 그래서 떠났습니다. 16일 아침에 아이가 해맑게 영상통화를 하자고 왔더라고요.

제가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니까 피곤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고 끊었습니다. 8시 50분에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 콘테이너 박스가 바닥에 떠다닌다'고. 무슨 여객선에 콘테이너 박스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9시10분에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 해경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왜 그러니, 하니까 배가 기울어졌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한 걸 몰랐습니다. 알았어 아빠가 알려줄게, 하고 있는 와중에 전화가 또 왔습니다. 아빠, 언니하고 통화가 안 된대요. 언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고(울음)… 그러면서 물이 배에 들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때야 뭐가 문제가 있구나 하고 빨리 갑판 위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방송에서 뭐라 그러대? 하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 빨리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빨리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울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이하고 통화가 끝나고 저는 진도로 내려갔습니다. 

언론에서 아이들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아이가, 우리나라 재난관리 시스템이 그렇게 좋았던지 저는 진짜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이 오보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모는 내려가서 거의 진도에 도착하는데 아이가 전화가 왔더라고요. 아빠, 우리 탈출했다고. 

무슨 놈의 구조입니까! 살아남은 아이들 다 탈출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도착을 했더니 아이 명단이 없더라고요. 정말 가슴이 억장이 무너지고 어느 누구한테 물어봐도 그게 다라고 하더라고요. 남아있는 아이들은. 이쪽저쪽 다 얘기해 봐도 어느 누구도 얘기해주는 사람 없었고요. 제가 알아서 그쪽에 아는 사람하고 통화했더니 아이들이 거차도에 있다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이가 그쪽에서 진도까지 오기까지도 내리는 순간도 한 번도 못 안아봤습니다. 언론 때문에. 아이들이 지치고 쓰러졌는데도 계속 언론만 봤지 아이들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정말 이 나라 교육은 망했구나. 나라를 믿고 교육을 믿고 학교를 보냈더니 아이를 죽여서 보내고(울음)… 상처 입혀서 보냈습니다. 정말 이 나라 교육은 망했구나. 참으로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희생자 가족들, 저희 아이들 소식 궁금해 합니다. 저희 아이들도 한 번 전화통화 드렸고요. 부모님들 걱정하지 마십시오...(울음) 이 아이들 자라서 여러분들의 아들딸이었던(울음)… 그 아이들의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갈 겁니다(울음). 아픔이 있고… 잊지는 못하겠지만 아이들이 커서라도 분명히 이겨낼 거고, 이 아이들은 치료 잘 받고 잘 공부해서(울음)... 꼭 부모님들 찾아뵙겠습니다. 저희 생존자 부모도 꼭 부모님들 찾아뵙겠습니다. 

5월 8일 정말 여러분께 카네이션 드리고 싶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울음)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께 꼭 아이들의 밝은 모습, 여러분의 아들딸들로 저희 아들딸들이 꼭 해내겠습니다.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울음)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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